시사, 상식

대통령 취임사를 비판한다. 그래서 누구의 ‘자유’인가

道雨 2022. 5. 12. 09:16

대통령 취임사를 비판한다

 

‘오직 자유’와 성장지상주의가 답?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는 한마디로 “19세기의 자본가가 쓴 허위와 모순투성이의 성명서”다. 이에 담긴 개념과 의식이 그 정도 수준이고, 미사여구로 포장했을 뿐이지, 문제와 원인, 대안이 서로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 전체를 포괄하는 말로 서두를 연다.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겠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400년의 경험을 통해 전 세계인이 알게 된 것은, 견제 없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체제를 기반으로 하면, 실제 국민이 아니라 권력자와 자본가가 주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기업의 단 한 가지 목적은 이윤을 늘리는 것이고, 자본은 이를 위해 국가와 동맹을 맺고, 온갖 불법과 폭력, 더 나아가 전쟁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발전한 미국과 유럽은, 자유의 개념을 재정의하거나, 이에 정의를 조화시키거나, 국가와 시민사회가 시장을 견제하는 시스템을 만들거나, 직접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로 보완하거나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이번 취임사의 핵심어 중 핵심어는 ‘자유’다. 35번 나올 뿐만 아니라 모든 대안으로 이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자유의 개념 또한 19세기적 개념에 머물고 있다.

이제 자유는 “모든 억압과 구속,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뜻한 대로 행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소극적 자유(freedom from)일 뿐이다.

이제 자유는 타자를 빈곤, 억압,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때 느끼는 희열인 대자적 자유(freedom for), 노동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여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거나, 수행과 정진을 통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적극적 자유(freedom to)를 포함한다.

소극적 자유만을 추구하는 한, 불평등, 공정과 정의의 상실, 구조적 폭력의 증대 등, 자유로부터 빚어지는 폐단을 극복하기 어려우며, 엘리트를 제외한 나머지의 자유는 오히려 축소된다.

 

윤 대통령은 팬데믹 위기, 기후변화, 에너지 위기, 분쟁의 평화적 해결의 후퇴, 양극화 심화, 민주주의의 위기 등을 지적하면서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라고 말하고 있는데, 인과적 오류이자 적반하장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만으로 국한해도, 자본과 국가의 유착, 언론의 기업화, 시민사회와 공론장의 붕괴, 부족주의, 에스엔에스(SNS)의 확대가 원인이고, 반지성주의는 이에 따른 현상일 뿐이다.

무엇보다 윤석열은 이를 획책한 장본인이다. 적반하장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성찰부터 해야 한다.

무지하면서도 독선적인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대통령의 주변에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이 전면과 후면 모두에 포진하고 있는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후위기와 양극화를 거론하면서도 “도약과 빠른 성장을 이룩하지 않고는 해결하기 어렵다”며, 성장 일변도의 정책을 취하겠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가장 큰 희생자인 노동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다.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근본 원인은 성장 일변도의 신자유주의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사령부인 국제통화기금(IMF)이, 낙수효과는 허구이고, 그 반대로 저소득층을 지원하여 경제를 활성화하는 분수효과가 더 효력이 있다며, 이미 오래전부터 유턴을 하였다.

피케티나 스티글리츠와 같은 진보적 경제학자만이 아니라 보수주의자들도, 불평등과 기후위기의 대안으로 지속가능한 발전과 조세혁명, 글로벌 자본세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원인이 견제가 없는 자유주의 시장 경제와 성장정책인데, 이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모순과 오류의 극치다.

 

과학기술과 혁신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도 구세기적 발상이다. 중세의 주술의 정원에서 계몽의 시대로 나아갈 때는 과학기술이 대안이었다. 하지만 20세기부터 이미 과학기술의 비인간화, 도구화, 반지성화를 지적하였다. 기후위기와 불평등, 팬데믹의 한 원인도 이것이기에, 인간과 생명의 얼굴을 한 과학기술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평화 또한 폭력과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소극적이고 낡은 평화관에 머물고 있다. 구조적 폭력을 없애는 것이 진정한 평화의 길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국내 문제든, 북한 문제든. 국제 문제든, 협력과 연대를 강조하고 있는데, 문제를 원인과 대책 없이 당위적으로 개인의 협력과 연대로 해결하자는 것은 히틀러가 즐겨 사용하던 어법이다. 시대에 부합하는 인식과 성찰을 바란다.

 

이도흠 |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그래서 누구의 ‘자유’인가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는 ‘자유’의 폭포 세례와도 같았다. 양과 질 모두 그랬다. 16분 남짓 동안 35번 입에 올렸고, 대한민국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할 독보적 가치로 추어올렸다.

 

그러나 그의 취임사는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인 ‘하이쿠’처럼 언어 밖으로 탈주하려는 텅 빈 기표 같기도 했다. 그는 ‘국민 여러분’과 ‘세계 시민 여러분’에게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정확하게 인식해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문할 뿐, 왜 자유가 양극화와 사회 갈등을 치유하고 도약과 빠른 성장을 가능케 하는 과학·기술·혁신과 필연적 관계인지 따위에는 지극히 말을 삼갔다. 친절한 설명이 있어도 채워 넣기 어려운 그 광막한 행간은, 결국 그가 5번 호명한 ‘여러분’ 몫으로 할당됐다.

 

하지만 각자 흩어져 따로 노는 저 파편적 개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돌연한 비약을, 온전한 방정식으로 재구성하기란 애초 불가능해 보인다. 누구는 ‘반지성주의’로 퇴행하고 있는 우리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를 일갈했다고 읽고, 다른 누구는 자유 진영 중심의 국제 질서 재편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의지를 드러냈다고 읽는다. 팔할이 해몽이고, 나머지 이할은 인상평이다. 현실과 어긋나거나 까마득하게 멀다 해도 하등 이상한 노릇이 아니다.

가령,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스테펀 해거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석좌교수가 지난 1월 발표한 논문(‘한국은 민주주의 퇴행에 취약한가?’)을 보면, 지표로 나타나는 우리의 정치권리나 시민자유 등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조금 내려앉았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회복했다.

물론 1인당 국민총소득(GNI) 같은 경제지표가 그렇듯, 정치지표 또한 삶의 실상과는 거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관적 의지를 한껏 현실에 투사하다, 별안간 ‘자유’를 만병통치약처럼 내놓은 건 뜬금없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윤 대통령이 몇번이고 ‘세계 시민’을 호명한 까닭은, 자신이 제시한 솔루션이 국제사회에도 소구되기를 바라서였을 터이다. 그러나 이 또한 ‘포스트 신자유주의 시대’로 진입한 오늘의 각국 또는 국제 정세 흐름과 확연히 동떨어져 있다. 30년 넘게 시대를 풍미해온 신자유주의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신호탄으로 쇠락의 길로 들어선 뒤, 그 자리를 대신할 좌우의 헤게모니 싸움은 크게 포퓰리즘과 보호적 신국가주의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파올로 제르바우도, <거대한 반격>)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된 영국의 브렉시트를 비롯한 우파적 양상과, 미국의 버니 샌더스와 영국의 제러미 코빈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사회주의의 부상 모두 포퓰리즘적인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또한 좌파와 우파는 사회를 보호하느냐, 아니면 유산자를 보호하느냐를 두고 대립하지만, 둘 다 국가의 개입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보호적 신국가주의의 특성을 공유한다. 신자유주의는 양쪽 모두에 적이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무대에서 퇴장한 것은 아니다. 폭력적 기세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러나 황혼기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소싯적에 밀턴 프리드먼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의 저서를 읽은 것을 긍지로 내세우는 윤 대통령의 취임사에는, 자본의 자유가 성장으로 이어져 만인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교리가 어른거린다. 그러나 ‘여성가족부 폐지’에서 보듯, 대선 캠페인에서 보여준 그의 포퓰리즘은 다른 후보들을 압도했다. 이런 이율배반이 그의 취임사를 ‘근엄한 농담’으로 읽히게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김수영, ‘푸른 하늘을’).

‘피의 냄새’는 자유가 절로 주어지는 시혜가 아님을 강하게 암시한다.

장자크 루소의 자유에 대한 전제조건인 ‘일반의지’는, 무한한 정보력과 탁월한 판단이성을 가진 것으로 간주한 남성 부르주아지를 주체로 한정했다. 자유주의 안에는 필연적인 ‘비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취임사는 ‘자유’의 숭고한 파토스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일관된 언행으로 볼 때, 누군가는 피를 흘리지 않으면 비자유의 나락으로 떨어질 거라는 두려움은 부질없는 망상이 아니다.

 

우리는 취임사를 해석하지 말고, 물어야 한다. 그 자유는 누구의 자유인가.

 

 

안영춘 | 논설위원

jona@hani.co.kr

 

********************************************************************************************************

 

윤석열대통령 ‘반지성주의’ 말할 자격이 있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다”.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다. “이러한 상황이 우리가 처해있는 문제의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윤석열대통령의 취임사에서 한 말이다.

 

                        ▲대중의 진지한 이를 향한 반감은 '씹선비'라는 상징어로 나타났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윤석열 대통령이 반지성주의를 말할 계제(階梯)인가>
 
“극빈층이거나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은 자유의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가? 물론 취임사를 대통령이 직접 쓰지 않았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그런데 ‘손발 노동은 인도도 아닌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니 ‘가난한 사람은 부정식품도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세금을 걷어서 나눠줄 거면 일반적으로 안 걷는 게 제일 좋다’느니 ‘페미니즘이 정치적으로 악용돼 건전한 교제도 막는다’거나, ‘가난하고 못 배우면 자유를 못 느낀다’...면서 “무지와 내로남불”을 밥먹듯이 하던 사람이 반지성주의를 말할 자격이 있나?

오죽하면 홍준표 후보는 윤석열을 지칭해 “역대 정치권을 통틀어 대표적인 ‘막말’의 대가”라고 했을까? 우리는 지난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프롬프터가 오작동하자 2분 가까이 ‘얼음’이 된 윤석열후보를 잊지 않고 있다. 프롬프터가 없으면 한마디도 하지 못한 대통령 후보. 이를 두고 당시 박찬대 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수석대변인은 “개인의 무지는 개인 문제로 그치지만 정치인의 국정 무지는 국가적 재앙의 근원”이라고 했다. 윤석열대통령의 취임사를 들으면 마치 ‘자신이나 자신도 관련된 얘기를 마치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남 얘기하듯 하는... 박근혜의 유체이탈화법’ 듣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반지성주의란...?>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는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미국의 역사를 개척시대와 실용주의 문화 속에서 지식인에게 가한 체제순응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 윤석열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말한 “(민주주의 위기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라면서 “국가 간, 국가 내부의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고 했다.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한다”면서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다”라고 주장했다.

 

 

 

반지성주의는 매카시즘이 미국 사회를 휩쓸어 미국 민주주의마저 위협하던 시기에 등장했다. 윤 대통령 취임사의 ‘반지성주의’ 사용은 매우 생뚱맞다. 윤 대통령이야말로 여성주의를 향한 공격, 즉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다양성을 옹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여성가족부)를 공격하며 대통령에 당선됐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극빈한 생활을 하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무엇인지 모를 뿐 아니라, 자유가 왜 개인에게 필요한지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던 사람이 ‘반지성주의’라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대통령이라고 어깨에 힘을 주고 허세를 떨며 참모가 써준 원고나 읽는다고 권위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모르면 솔직하게 모른다고 하고 마음을 열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더 친밀감이 있고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윤석열대통령은 지난 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까맣게 잊고 국민들 앞에 유식한 채 그리고 고상한 용어로 된 원고를 읽는다고 존경받는 대통령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 중의 착각이다. 문인화가 김주대 시인은 “가장 나쁜 것은 ‘멍청하고 교활하고 음흉한데 사람들 앞에 나서서 사람들을 지도하려는 것, 지도자가 되려는 것’”이라고 했다.
 
윤대통령이 좋아하는 ‘자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작은 정부’, ‘규제풀기’...는 자본이 좋아 하는 세상이다. 시장실패를 불러온 ‘작은 정부’로 국민의 복지를 줄이고, 풀 수 있는 규제를 다 풀어 ‘자본의 천국’을 만들고 싶어하는 말이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고 ‘내 생각과 다르면 적’이라고 생각하고 민주시민이기를 부정하는 고집과 독선이야말로 진짜 반지성주의가 아닌가? 민주시민으로서 버려야 할 전근대적인 가치관이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 흑백논리, 표리부동, 왜곡, 은폐’다. 대통령이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만을 내세우는 아집과 망상에 사로잡힌다면 그런 세상에 자유를 누릴 사람은 누구일까?

 

[ 김용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