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 바꾼 민주당, 다시 과거로
지금의 민주당을 만드는 데 노무현 대통령의 기여가 절대적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선거로 첫 정권교체를 이룬 건 김대중 대통령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민주당은 호남 중심의 ‘지역정당’을 넘어서지 못했다. 열악한 정치 환경을 뛰어넘은 건 김대중 개인의 정치력과 통찰력에 힘입은 바 컸다.
노무현 대통령을 거치며, 정확히는 2009년 5월23일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거치면서 민주당은 뚜렷하게 진화했다. 호남 정당에서 벗어나 수도권을 기반으로 한 전국 정당으로 발돋움했다. 이념적으론 ‘중도개혁’을 내세운 김대중 시대를 지나, 분명하게 ‘진보’를 내걸고 유권자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정당으로 탈바꿈했다.
노무현의 진보는 전통 진보정당으로부터 ‘신자유주의 변형’이란 비판을 받았지만, 어쨌든 민주당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중도에서 왼쪽까지 크게 넓히면서 폭넓은 대중 지지를 이끌어내는 기반으로 작용한 게 사실이다.
이런 변화의 밑바닥엔, 검찰의 집요한 수사 끝에 스스로를 던진 노무현 대통령의 자기희생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이었던 김경수 전 경남지사는 이렇게 말했다.
“노 대통령 서거 전엔 아무리 ‘진보’를 얘기해도 전달이 되지 않았는데, 서거라는 충격적 사건이 생기자, 국민들이 대통령이 해온 것과 말한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국민 인식에서 노무현의 시민민주주의에 대한 업그레이드가 일어났고, 민주당과 기존 진보정당 사이의 갭이 줄었다.”
그는 지역이란 벽을 뛰어넘었을 뿐 아니라, 20대 젊은 세대의 전폭적 지지라는 유리한 정치 지형을 민주당에 선사했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과 죽음을 목격한 20대는, 그후 십수년간 민주당의 가장 강력한 지지 기반으로 자리잡았다. 지난해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은 국민의힘에 참패했지만, 유일하게 40대에서만은 국민의힘을 압도했다.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180석을 얻는 역대급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지난 세번의 지방선거에서 수도권을 석권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배경에서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여론조사 편차를 고려해도 호남 광역단체장 3곳(광주, 전남·북)과 제주를 제외하면 단 한곳도 확실하게 앞서는 지역이 없다는 말이 민주당에서 흘러나온다. 어쩌면 민주당은 다시 호남의 벽에 갇힐지 모른다는 걱정이 안팎에서 고개를 든다. 그야말로 노 대통령 서거 이전의 정치 상황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지난 23일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 대통령 13주기 추도식엔, 여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정치인들이 모여 ‘노무현 정신’을 외쳤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 정치에 참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집권 시절 보수기득권 세력의 맹렬한 공격 대상이던 노무현은, 이제 좌우 가리지 않고 모든 정치세력이 끌어안아야 할 정치인으로 재조명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진짜 노무현이 추구했던 가치와 정신은 점점 더 앙상하게 말라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에 대한 더 큰 책임은, 변화에 둔감해진 민주당에 있다.
민주주의와 평화, 지방분권, 복지 확대 등이 노무현의 핵심 가치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시간이 지나도 많은 국민이 노무현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아니다. 국민이 그에게 감동하고 그의 가치를 염원하는 데엔,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누구보다 떳떳하고 흔들리지 않았던 ‘노무현의 길’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서 손쉽게 원칙과 명분을 저버리지 않고, 선거 승리보다 선거 과정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분명히 드러내려 애썼던 그의 행동이 국민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패배할 걸 알면서도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부산에서 세번이나 출마했다.
2000년 총선에서 세번째로 낙선했을 때, 그는 “승리니 패배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저는 누구와도 싸운 일이 없다.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목표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2002년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그를 기억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은 국민과 지지자들에게 그런 가치와 목표를 제대로 보여준 적이 있는가. ‘지방선거를 이기기 위해서’라는 말만 했던 것은 아닌가. 눈앞의 승리나 정치적 유불리가 아니라, 국민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고민하는 것, 지금 민주당에 필요한 건 이것이다.
박찬수 |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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