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검경, 공권력, 공공 비리

국가의 품격과 ‘인혁당 빚고문’

道雨 2022. 6. 9. 10:07

국가의 품격과 ‘인혁당 빚고문’

 

지급한 보상금이 많다며 끝까지 빼앗겠다고?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룬 입지전적인 나라이다. ‘제2의 일본’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던 게 2002년 즈음이었는데, 해외 출장을 다녀보면 한국의 위상이 매년 달라지는 걸 실감한다.

한국 경제의 부상과 더불어 한국 문화, 케이(K)-콘텐츠의 힘 역시 최근 들어 나날이 커지고 있다. 지난 5월에는 비티에스(BTS)가 미국 대통령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아시아인 대상 혐오 반대를 말하고, 칸영화제에선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받는 등 문화 강국 이미지는 더욱 굳건해지는 추세다.

대한민국의 이런 오늘은 해와 달이 뜨고 지면서 저절로 찾아온 게 아니다. 유신독재와 그에 이은 군부독재 속에서도 끊임없는 민주화 투쟁 속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차근차근 완성해왔다.

내 아버지 이창복 선생은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조작 사건에 연루돼 8년 옥고를 겪었고, 출감 뒤 12년간 보호관찰 대상이 돼 직장을 얻을 수조차 없었다. 개인과 가정의 사회적 삶을 부숴버렸던 독재의 그늘은 짙었지만, 대한민국은 민주화 유공자들의 피와 눈물을 먹고 자라 오늘의 민주주의를 수립했다.

그런데 지금 국가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한 축, 민주주의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 민주화 유공자를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줬다가 많다고 도로 빼앗겠다며, 못 갚으니 연 20% 이자로 빚고문을 하고 있다. 이 가혹한 빚고문은 부동산 강제경매 소송과 집행이라는 형태로 진행 중이다.

지난 5월 서울고등법원은 ‘과다 지급된 배상금 원금 5억원만을 추징하고, 그간 누적된 지연이자 10억여원을 탕감하라’는 화해권고를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이에 이의신청을 했다. 지연이자 10억원까지 기어코 받아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법원이 이미 2차에 거쳐 화해조정안을 냈기 때문에, 정부의 이의신청이 철회되지 않는 한 원금과 지연이자를 더한 15억여원을 갚으라는 선고가 내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의 예로 빗대보자면 국가가 참전군인 등에게 대학진학과 등록금을 지원하더니, 지원금 규모가 컸다며 등록금 일부를 다시 내놓으라고 소송을 벌이는 꼴이다.

도대체 지구 위 어느 정부가 국가유공자를 대상으로 연리 20% 고리대 빚고문과 부동산 강제경매를 벌인단 말인가. 국가의 품격을 지키라!

오늘의 빚고문 사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시작했고, 문재인 정부에서 완성됐다. 빚고문 사태를 정의롭게 해결하겠다던 후보자 시절의 국정원장, 국가인권위 권고를 받아 오면 해결하겠다던 청와대, 국가폭력피해자 채무면제 법안을 만들어놓기만 하고 손 놓은 민주당, 배임이니 형평성을 주장하며 해결을 방해한 기획재정부, 인권위나 검찰개혁위원회 권고를 받은 적 없으니 경매를 속개하라는 정부법무공단 등등. 설과 추석이면 민주화 유공자라고 명절 선물로 토속주를 보내주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가 벌였던 일들을 과연 알고는 있을까?

‘촛불정부’ 구성원들의 한결같았던 변명은 하나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할 경우, 배임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민주당 국회의원들의 시선 역시 문제였다. 국가폭력 피해자의 채무를 면제하는 채권법 수정안이 2020년 10월에 발의됐지만, 일년 반이 지나는 동안 소위에서 한번 논의된 게 전부다.

모 국회의원은 민주당 의원들이 이 법안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추정했다. 빚고문 사태를 법원의 잘못된 선고를 바로잡는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기껏해야 이해 당사자 간의 이권 싸움으로 바라보는 저급한 시선 때문이라고. 빚고문 사태는, 정부가 힘이 없는 국민을 대상으로 위력을 행사하고 돈을 빼앗으려는 강도 행위에 가깝다.

지난 5월18일 정부가 고등법원의 화해권고안에 이의신청을 했던 날, 경매법원은 부동산 강제경매 기일을 통보했다. 다행히도 법원은 ‘진행 중인 민사소송이 있으니 경매기일을 연기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공은 다시 정부로 넘어갔다. 윤석열 정부는 전임 정부가 해결하지 못한 장기미제 사건을 해결하기를 희망한다. 인혁당 재건위 조작 사건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치졸한 빚고문 사태를 즉각 해결하라. 구순 노인들을 빚고문에서 해방시키라. 구순 노인들의 전 재산을 빼앗아 길거리로 내몰지 말라. 정부가 정녕 이 빚고문 사태를 ‘백골징포’로까지 몰고 갈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다. 윤석열 정부가 현명한 해결 방안을 내주길 소망한다.

 

이송우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