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우린 이대로 살 순 없지 않나

道雨 2022. 7. 27. 09:17

우린 이대로 살 순 없지 않나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내 몸도 그리고 내 심장도 굶주려 가네”.

 

백년 전, 미국 동부의 섬유 공장 노동자들은 공장주들의 짬짜미에 맞서 15%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공장주가 정부의 노동시간 제한조치에 임금 삭감으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공장주는 경찰과 법원과 함께 발끈했다. 이번에 제대로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며 총구를 닦고 몽둥이를 매만졌다.

당시 가장 힘셌던 노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장인정신”으로 무장하고 백인 남성으로 뭉친 미국노동연맹은 50여개의 다른 나라에서 온 이주민 노동자들의 파업을 냉소적으로 봤다. 게다가 여성노동자가 주도한 파업이었다. 끝내 지지하지 않았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이라는 신생 노조가 이들을 도왔다. 저임금의 배고픔도 컸지만 무시, 경멸, 차별의 고통은 더 컸다. 그래서 빵만이 아니라 “장미를 달라”고 외쳤다. 사람들은 “빵과 장미의 파업”이라 불렀다. 많은 이들이 힘을 모았다. 어둠에서 빛을 찾았던 헬렌 켈러는 ‘갈라진 노동’에 분개하고 모든 노동자를 감싸 안는 새로운 연대를 격렬히 옹호했다. 정치적 핍박이 따랐지만 개의치 않았다. 파업은 지루하게 이어지다 임금 5% 인상으로 겨우 마무리되었지만, 그 뒤로 체포, 투옥과 재판이 뒤따랐다.

 

들끓는 여론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였다. 기존 노조도 바뀌지 않았다. 노조가 모든 노동자에게 문을 활짝 여는 데는 수십년이 더 필요했다. 장미 한 송이를 피운다는 것,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는 일이었다.

 

얼마 전 유독 비릿했던 바닷가 바람 속에서 “빵과 장미”를 구했던 파업은 끝났다. 임금 인상 30%를 원했으나 4.5%를 얻었고, 여기 한번 봐달라는 목소리는 바람에 날리듯 사라지고 있다. 나는 이 짠 내 나는 싸움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알량한 이성을 동원해도 좀체 풀리지 않는다.

 

먼저 ‘빵’을 따져 보자. 가장 최근 사업체노동력 조사(2022년 4월)를 보면, 임금은 작년 같은 달에 비해 평균 6.4% 올랐다. 늘 그랬듯, 평균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300인 이상 대기업의 임금은 10.8%나 올랐는데, 다른 작은 기업들은 5.0% 정도 올렸다. 비정규직의 처지도 마찬가지로 반쪽 신세다.

게다가 올해 소비자 물가는 6% 이상 오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수치만 두고 보자면 4.5% 인상은 많은 노동자가 ‘투쟁’ 없이도 얻는 것이고, 물가상승에도 못 미친다. 빵의 크기가 외려 줄어들었다.

 

그런데 조선 관련 업종 기업들은 숙련 인력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한다. 인력이 부족하면 임금을 올려 부족을 메꾸는 것이 기업의 일이고, 이른바 시장의 원리다. 원가가 오르면 판매 가격은 대번 인상하면서, 노동에 대해서만 시장 논리는 접고 야박하게 구는지 모를 일이다. 빵을 줄 생각이 없었으니 장미는 언감생심이겠다.

 

시장가격 논리가 아니라면 결국 ‘힘’의 논리겠다. 그러면 ‘힘’은 어떤가. 자신을 용접하여 가둔 하청노동자를 도울 힘이 없었을까. 없지는 않았다. 힘이 있어도 쓰질 않았다.

정치의 풍경부터 보자면, 다수 정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분은 자신을 소년공 출신으로 소개했다. 복잡한 노동문제에 대해 그는 자신의 ‘출신성분’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런 정당이 이번에 유난히 조용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선업의 구조개선과 임금 문제를 책임지고 맡았던 정당이다. 책임 있는 지원과 지지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통령이 “법대로”를 외치자, 큐 사인을 받은 배우처럼 분노하고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민주유공자법을 지지하는 연판장을 돌렸다. 민주화운동으로 고초를 겪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야 인지상정이겠으나, 그 법안에는 해당자에게 “채용시험 때 득점의 5~10% 가산점”을 부여하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 차별에 항의하며 하청노동자가 싸울 때, 다른 쪽에서는 ‘특혜’를 만들고 있었다. 백번 지당한 이유가 있겠으나, 시의적절하진 않다.

 

노동의 ‘힘’도 갈라졌다. 이번 파업은 하청노동자라는 ‘하청 계급’의 파업이었다. ‘원청 계급’은 무심하고 냉정했다. 파업 노동자를 도우려는 그룹에 대해서는 가혹했다. 돕는 자를 비난하고, 그들과 조직적 연계를 끊으려고 했다. 하청노동자가 쓰러져 갈 때, ‘원청 계급’은 금속노조 탈퇴를 두고 투표했다. 요즘 부쩍 숫자를 늘린 전국적 노동조합들도 이를 어찌하지 못했다. 한쪽에서는 희망버스를 보낸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조선소 도크에서 자라나는 절망의 먹구름을 먼 산처럼 바라볼 뿐이었다. 정부와 산업은행에 대해 칼날을 바싹 올려세웠지만, 노동의 ‘계급적’ 분열에 대해 어쩔 줄 몰라 했다.

 

‘펜’의 힘도 아스라했다. 임금 30% 삭감이 파업의 원인이었으나, 어떤 연유로 어떻게 삭감이 이루어졌는지를 제대로 살펴보질 못했다. 철창에 갇힌 하청노동자의 얼굴과 잔뜩 화난 기업과 정부의 모습만 교대로 보여줄 뿐, 노동자의 현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현장에서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엇갈리고 심지어 모순적인 주장들이 설명되지 않은 채 분주하게 보도될 뿐이었다.

 

노동자가 ‘장미’를 요구한 대가는 컸다. 그간 도크 뒤편에서 숨어 있던 ‘힘’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파업으로 인한 손해액이 7000억원에 이른다면서, 파업 노동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한국의 손해배상 관련 법을 따지지는 않겠다. 무엇보다도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7000억원은 하청노조 조합원이 속한 모든 기업의 종업원들(약 2800명)의 임금을 노조의 요구대로 30% 인상한 뒤 그 임금 수준을 20년 이상 유지할 수 있는 규모의 돈이다. 어마어마한 액수다.

 

이는 곧 기업의 무책임성과 비합리성을 보여주는 얘기이기도 하다. 진정 그런 엄청난 피해가 예상된다면, 합리적인 기업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하청노동자와 서둘러 협상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금을 당장 두자리 숫자로 올리는 게 7000억원 손해 보는 것보다 합리적이다.

따라서 산업은행이든 누구든 기업의 운영을 최종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이런 대규모 피해를 준 책임자를 처벌하려 할 것이다. 짧은 법적 지식으로 다소 무리하게 짐작해 보자면 이 또한 배임 혐의가 아닌가.

‘기업이 서야 나라가 산다’고 믿으면서 이런 비합리적인 기업 대응을 내버려두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굳이 이유가 있다면, 어느 경제신문의 사설에서 외쳤던 것이었을까. 노조의 ‘못된 버릇’을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

 

하청 용접공 유최안은 “이대로 살 순 없습니다”라고 오래 외치다가 실려 나갔다. 임금 인상액은 아쉽지만, 제 목소리를 낸 것에 만족한다고 했다.

이제 부끄러운 우리가 따지고 물어야 한다. 우리 정말 이대로 살 순 없지 않나.

 

 

이상헌 | 노동경제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