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윤 대통령의 ‘나의 투쟁’, 우리가 닮아가지 말아야 할 것

道雨 2022. 11. 18. 09:41

윤 대통령의 ‘나의 투쟁’, 우리가 닮아가지 말아야 할 것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뒤집어 “정치란 다른 수단에 의해 계속되는 전쟁”이라고 말했다.

 

토머스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배격하면서 “국가의 탄생을 주재했던 것은 전쟁”이라는 그의 가설적 담론이 떠오른 것은, 윤석열 대통령 취임 뒤 6개월을 지나면서다. 기회마다 “자유”를 외쳐온 그에게서 다원적 자유주의 사상에 기반한 통치행위를 찾기 어렵지만, 나치즘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칼 슈미트의 주장―정치의 본령을 화해할 수 없는 아군과 적군 사이 투쟁에서 찾았다―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의 품에 있다가 느닷없이 찾아온 기회를 거머쥔 그에게, 어떤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비전이나 청사진은 애당초 없었다. 대통령 당선 자체가 목적이었는데 덜컥 대통령이 됐다. 현실정치 경험은 없고 오로지 범죄(자)에 맞선 전쟁터에서 일생을 보낸 검사였다. 정치, 정책을 놓고 경쟁하기보다, 피아간 유무죄, 투쟁의 삶을 살아왔다.

 

경쟁과 투쟁의 차이는 상대방을 인정하는가 아닌가에 있는데, 검사의 상대방은 부정되고 사회에서 배제돼야 하는 범법자들뿐이다. 그런 검사에게서 인간 하나하나 앞에서 느낄 어떤 멈춤, 머뭇거림, 떨림, 흔들림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런 훈련은 그가 국가운영의 최고책임자로서 반대편의 충언이나 고언을 귀담아듣고 학습함으로써 부족한 공부를 채우려고 노력하기보다, 21세기 한국판 라스푸틴에게 의지하는 편을 택하게 했을 수 있다.

 

윤 대통령 취임 뒤 6개월 동안 보여준 것은 대통령실 용산 이전과 여성가족부 폐지를 비롯해, 독불장군식 밀어붙이기와 피아를 식별해 ‘아’는 껴안고 ‘비아’(적)는 내치는 행위가 대부분이었다. ‘내 사람’을 요직에 앉힌 인사, 그런 인사를 통한 검-경 갈등과 감사원 운영, 임기가 보장된 국민권익위원장 등에 대한 사퇴 압박, 언론 통제 등이 모두 그런 ‘피아 구별’에 준거한 것이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를 쫓아낸 일, 말로는 공정과 상식의 회복을 강조했으나 행동으로는 부인 김건희씨에게 얽힌 잡음에는 눈감는 불공정과, 자신의 말실수를 인정·사과하고 넘어가는 대신 뭉개는 몰상식을 보여줬던 것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행태상으로 볼 때, 현재 한국 정당정치의 장에서 여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두말할 필요 없지만, 집권여당인 국민의힘도 이전 문재인 정권을 반대하는 야당, 입법권력인 국회의 다수를 차지한 민주당에 반대하는 행태를 보일 뿐이다. 서로 반대하는 야당만 존재하므로 여야 간 협치나 통합은 실현 불가능한 주문이다.

 

정책 차이나 경쟁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에, 과거 문재인 정권의 통치행위는 통치행위로 인정될 수 없고 법적 제재 대상이 된다. 그 결과 법률상 독립기관인 감사원이 전 정권을, 검찰이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겨냥한 수사에 집중하고 있다.

 

이전 정권과 단절한다며 사정기관에 ‘내 사람’만을 앉히고, 교육, 노동, 경제, 외교, 국방 등 분야에는 구태의 극우적 인사들을 주로 기용했다. 결국 윤 대통령이 꾸린 진용은 과거로의 퇴행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물론 남북관계를 비롯해 모든 분야에서의 퇴행이다.

이전 정권 때 이뤄진 각종 유착 비리 색출을 그나마 윤 정권에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긍정적 역할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월호 참사가 먼 옛일이 아닌데, 우리는 다시 158명의 아까운 생명을 잃었다.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희생 앞에서 집권세력은 공적 책임을 절감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책을 모색하고 강구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책임자들은 면책성 발언으로 일관하고, 정권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세우기만 했다.

 

봉건시대 왕도 가뭄이나 수해가 발생해 백성이 고통을 당하면, 자신의 부덕 탓이라며 하늘을 우러러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대통령실 이전 결과, 용산경찰서는 대통령 경호 부담이 크게 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경찰청을 관할하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파면하라는 최소한의 요구조차 외면하고 있다.

이런 ‘피아식별법’에 따른 것일 텐데, 대신 일선 경찰을 닦달하다 용산서 정보계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출생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고 자살률은 가장 높은 대한민국이다. 사회를 따뜻하게 보듬어도 모자란데 각계각층에서 분노가 분출하고 있다. 분노는 적개심으로, 나아가 증오심으로 진화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이 탑승한 항공기 추락을 염원한 종교인까지 있었다.

 

맹자가 인간 본성으로 꼽은 인의예지(仁義禮智) 4단,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우리한테서 저 멀리 물러나고 있다. 집권세력에 맞서 싸우되 닮지는 말아야 한다.

 

<민들레>라는 신생 온라인 매체가 가족 동의 없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을 발표했다. 애도의 뜻보다 정치적 목적이, 적개심이 스며 있다고 느끼는 게 나만의 일일까?

숫자로만 표시될 때 애도의 뜻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점에는 충분히 동의한다. 그렇지만 감정 이입을 가능케 할 서사가 없는 이름뿐이라는 점에서, 숫자만 밝혔던 것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행위들은 오히려 집권세력에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윤석열 정권이 성립된 것부터가 민주당 강성 의원들과 극렬 지지자들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그래서 강조하건대 ‘윤석열 퇴진 촛불’을 들자고 선동하지 말라. 아직 때가 아니고 자칫 역풍을 불러올 수 있다. 지금 윤 정권에 맞서 싸울 선차적 방안, 시민사회가 제기해야 할 것은, 민주당과 정의당에 미래지향적인 입법권력을 행사하도록 강력히 요구해 관철하는 일이다. 노란봉투법 등 말로 그쳤던 법안이 한둘이 아니다. 국가보안법과 정당법 폐지, 노동법 개선, 교원과 공무원의 정치기본권, 차별금지법 제정, 비례대표 확대, 결선투표제 등….

 

돌아보라.

이들 중 단 하나에라도 이른바 검수완박법, 공수처법에 기울였던 역량의 10분의 1이라도 기울였는지를!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 라스푸틴

 

라스푸틴(Grigory E. Rasputin, 1872~1916)은 러시아의 요승으로 농민 출신이었으나, 1911년 혈우병으로 고생하던 황태자의 지병을 말끔히 치료하여 황실의 신임을 얻으며, 니콜라이 2세의 부인인 알렉산드라 황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수상을 비롯한 러시아 의회에서는 라스푸틴의 방탕한 생활에 우려의 시각을 보냈다. 특히 라스푸틴이 황실의 신임을 바탕으로 국가 대사에 참견하자, 더욱더 경계하며 라스푸틴을 추방하는 방법도 꾀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1913년, 러시아 시민들은 라스푸틴과 같은 난봉꾼이 러시아 정세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이와 더불어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해 황실의 명성은 바닥에 떨어졌다. 그해 로마노프 왕실은 300년 기념일을 맞았지만, 대중은 그들 앞에 나타난 니콜라이 2세에게 싸늘한 반응만 보였다.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개입은 니콜라이 2세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라스푸틴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사이 러시아는 독일에 크게 패하면서 러시아의 왕권은 또 한 번 급격히 흔들렸다.

1915년 4월, 니콜라이 2세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러시아군을 몸소 지휘하기 위해 전장에 나서면서, 알렉산드라 여왕이 권력을 잡자, 라스푸틴의 영향력은 정점에 달했다.

 

이에 1916년 12월, 황태자를 중심으로 한 암살단은 라스푸틴의 와인에 청산가리를 탔다. 그러나 라스푸틴이 죽지 않자, 다급해진 암살대원이 권총을 난사하여 살해한 후 시체를 강가에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는 반성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모든 지식인들이 왕실에서 쫓겨나고, 라스푸틴의 아첨꾼들만 왕실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러시아는 혁명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