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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실과 해당 언론사가 풀 문제라고?

道雨 2022. 11. 28. 09:38

대통령실과 해당 언론사가 풀 문제라고?

 

 

 

 

1830년 7월, 프랑스 파리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에서 시작해 1814년 나폴레옹 체제의 몰락까지 버텨내며 다시 권력을 회복했던 부르봉 왕조가 이 혁명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기엔 인쇄술이 만들어낸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16세기 인쇄술의 발명은 같은 문헌을 읽는 사람들 간에 정신적·지적 유대를 갖는 집단을 처음 만들어냈다. 인쇄술로 인해 책을 베끼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을 찍어낼 수 있게 됐고, 그 대표적 사례가 성서의 대중적 보급이었다. 교회 밖으로 나간 성서와 종교개혁이 맞물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특히 18세기 후반에는 정치적 견해를 함께 공유하며 서로 간에 정신적 유대를 갖는 ‘공중’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에 따르면, 프랑스에선 1789년 혁명이야말로 이런 공중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계기였다. 혁명이 일어나고 파리 시민들은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어느 때보다 알고 싶어 했다. 이런 욕망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신문에 대한 열렬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는 혁명이 일어나고 선포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 선언은 11조에서 “사상과 의사의 자유로운 통교는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의 하나다. 모든 시민은 자유로이 발언하고 기술하고 인쇄할 수 있다”며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다.

이렇게 파리의 시민들은 신문에 빠져들었다. 같은 신문을 읽는 사람들끼리 정신적 유대를 형성했고, 여러 신문을 통해 같은 사안에 관해 다른 의견을 갖는 다양한 공중이 등장했다.

 

이런 열기는 부르봉 왕조가 복고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보에 대한 공중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한 루이 18세는 1814년 헌장에서 “프랑스인들은 자기 의견을 출판하고 인쇄할 권리가 있다”는 말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했다. 하지만 오랜 망명생활을 거쳐 다시 권력을 잡은 왕과 귀족들에게 언론의 자유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은 이들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언론이 문제였다. 다시 권력을 되찾은 왕과 귀족에게 호의적인 언론보다 비판적인 언론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1824년 루이 18세의 뒤를 이은 샤를 10세가 극단적인 복고주의 정치로 치달으며 상황은 더 악화했다. 왕은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몰락한 지주들에 대한 배상정책을 추진했을 뿐만 아니라, 신성모독죄 제정과 장자상속권 부활 같은, 혁명 이전으로 프랑스를 되돌리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았다.

 

자유주의 세력이 다수였던 의회가 이에 저항하자, 1830년 5월 왕은 의회 해산으로 맞섰다. 이에 따라 치러진 7월 선거에서 또다시 반왕당파 세력이 압승을 거뒀다. 하지만 왕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자격을 제한할 수 있도록 선거법을 개정하고, 정기간행물 출판을 중단한다’는 칙령으로 맞섰다.

 

이에 자유주의 성향의 신문 <나시오날>은 1면에 “합법적 정권은 끝이 났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복종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다”라는 선언으로 칙령에 응수했다. 다른 비판적인 언론도 7월27일 아침에 발행된 신문 기사를 통해 <나시오날>의 선언에 일제히 호응했다.

언론의 자유와 함께 성장한 공중 역시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결국, 수천명의 사상자를 낸 사흘간의 혁명 끝에, 파리에 남은 이는 언론인들이었고 떠난 이는 왕이었다.

 

과거회귀적 무능 논란이 그치지 않는 현 정부 아래 ‘국익’을 명분으로 언론의 자유 제한을 정당화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더 기이한 건 헌법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헌법 가치인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이슈가 한창인 가운데 빚어진 대통령 출근길 질의응답 논란을 두고 “대통령실과 해당 언론사가 풀어야 할 문제”라는 대통령실 출입기자단 성명을 보면, 정작 언론인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역사는 말한다. 공권력의 언론에 대한 억압은 대체로 공권력의 무능과 무리한 정책을 가리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더하여 7월 혁명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억압적 공권력에 맞서 언론의 자유를 지키는 최전선엔 언론인 자신이 있었다. 그래야 공중도 함께 선다’고 말이다.

 

 

 

김만권 |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