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민요가 저항의 노래로 변할 때

道雨 2022. 12. 15. 10:37

민요가 저항의 노래로 변할 때

 

 

 

청년 시절.

‘조니 당신을 못 알아볼 뻔했어요’(Johnny I hardly knew ye)를 처음 들었을 때는, 가수 존 바에즈의 창법과 음색에만 주목했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포크송인 줄 알았다. 당연했다. 영어 노랫말이 들리지 않았으니까.

 

이 곡은 아일랜드 민요로 애절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니는 1800년 초반 영국과 실론(스리랑카) 사이 전쟁에 나가 팔과 다리를 잃는다. 초췌한 몰골로 아일랜드 고향마을 아타이(Athy)에 돌아왔으나, 이 노랫말의 화자인 여인은 옛 애인 조니를 거의 알아보지 못한다.

후렴구에서 반복 등장하는 ‘드럼과 총,’ 그리고 ‘훌쩍 훌쩍’을 뜻하는 의성어 ‘후루 후루’가 만드는 잔상이 오래 남는다.

 

‘길거리 발라드’ 형식의 원곡이 1960년대에는 ‘반전 포크송’으로 변모해 서구 전체로 퍼졌다. 이 곡은 또 박자와 리듬이 단순하게 바뀌어, 1980년대 한국의 대학가, 노동 현장, 거리 시위에 자주 등장했다.

‘후루 후루’ 부분은 ‘○○○은 물러나라, 훌라 훌라’로 바뀌었다.

어디에서 불리든 애절함과 안타까움이라는 정서 속에 깊이 밴 저항 의식은 질량보존 법칙처럼 유지되고 있다.

 

아일랜드 민요 ‘몰리 멀론’도 생각난다.

더블린 시내에서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해산물 파는 아름다운 여인 몰리 멀론이 1절에서 소개된다. 그의 부모도 생선장수였다. 몰리는 젊은 나이에 열병으로 죽게 된다. 이런 사연이 2절과 3절에서 이어진다.

더블리너스가 연주하는 곡을 들어보면, 몰리가 외치는 ‘꼬막과 홍합’(cockles and mussels), ‘살아 있어요’(alive alive o!) 부분이 인상 깊은 후렴구를 이룬다. 아일랜드 전통음악의 선율과 더블린 지역 악센트 덕분이다. 소박한 악기 ‘틴 휘슬’이 이끄는 도입부 역시 아름답고, 애절하다.

 

연약하고 애조 띤 선율을 가진 이 민요를 아일랜드 독립군들이 군가로 애창했다. 영국 식민지 750년. 1845년부터 5년간 이어진 ‘감자 기근’으로 백만명 이상 굶어 죽어야 했던 이 나라의 비극.

오죽하면 아일랜드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그의 작품 <겸손한 제안>에서 이렇게 말했을까.

‘아일랜드 아기는 살아 있는 것보다 죽어서 먹히는 것이 더 낫다.’

민초들이 몸으로 살며 겪은 엄청난 고통은, 평범한 민요마저 독립군가로 만들기에 충분해 보인다.

 

북부 이탈리아의 노동요였던 ‘안녕 내 사랑’(Bella ciao)도 이 맥락에서 빠질 수 없는 곡이다.

1943~1945년 파시스트 무솔리니와 독일 나치에 맞서 싸운 이탈리아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 노랫말의 핵심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침략자들이 들어왔소. 나는 빨치산으로서 싸우다 죽을지도 모르오. 혹시 내가 전사하면 산자락 아름다운 꽃그늘에 묻어주시게. 사람들이 지나다 그 꽃을 보면 자유를 위해 싸우다 죽은 저항군이라 말해주오. 안녕 아름다운 내 사랑.’

 

역사의 기막힌 순간을 만나 어느 날 빨치산이 되어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들. 평화로운 시기에 살았다면 이 노래를 불렀음직한 병사들은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생업에 종사했을 평범한 시민들이다. 총 들고 싸우다 죽더라도 꽃 아래 묻히고 싶다는 소박한 심경이 오히려 삶에 대한 더 간절한 기원처럼 들린다.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나는 고압선에 걸린 연처럼 무기력하게 일상을 흘려보냈다.

10월28일. 35년 지기 친구 부부를 만나 저녁을 먹었다.

10월31일 밤. 그 친구 외동딸의 빈소에 다녀왔다. 참사로 아이를 잃은 친구는 이틀 만에 눈물이 말라 소리 내어 울 수조차 없었다.

11월22일. 유가족 기자회견에서 그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는 모습을 화면으로 보았다. 참사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향해 여권 정치가들이 내뱉는 몰상식하고 비인간적인 발언들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뉴스 끊고 산 지 몇달 됐지만 나는 직감한다. 바닥 민심에 거대한 쓰나미가 일고 있음을. 국민이 감내해온 엄청난 고통은 소박한 민요를 저항의 노래로 탈바꿈시킬 것이다.

 

대통령과 집권당 국회의원들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참사 원인을 밝히고, 책임자를 문책한 다음, 진심으로 유족들에게 사과하라.

제 할 일 하지 않고 정치 모리배 짓을 계속해보라. 군소 정당으로 추락해 다시는 권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민심이 부르는 소박하고 간절한 노래를 겸허하게 들어야 할 시점이다. 거의 임계점에 이르렀다.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