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노동을 경시하는 나라

道雨 2022. 12. 28. 09:23

노동을 경시하는 나라

 

 

 

독일은 ‘의식(儀式) 알레르기’를 가진 나라다. 의식이 사라진 사회다. 예컨대 나는 독일 대학에서 입학식과 졸업식을 본 적이 없다. 박사학위가 통과된 뒤 멋진 학위수여식을 기대했던 나는 크게 실망했다.

 

독일에서 의식을 거부하는 관행이 굳어진 것은 바로 히틀러 때문이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그 자체가 ‘의식 공화국’이라고 할 만큼, 행사 때마다 성대하고 현란한 의식을 통해 국민의 의식(意識)을 조작하려 했기에, 나치 과거청산의 일환으로 모든 의식을 금기시한 것이다.

 
 

유일한 예외는 5월1일 노동절이었다. 독일의 노동절 행사를 보면서 ‘노동자의 힘’을 절감했다. 이날만은 연방공화국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여 엄숙한 의식을 거행했다. 대통령과 총리가 모두 참석한 가운데, 독일노조연맹 의장, 공공노조 위원장, 금속노조 위원장 등 노조 대표들이 정치인들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고 대안을 제시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예외적인 ‘국가적 의식’으로 노동절 행사를 치르는 것을 보면서, 이 나라가 노동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실감했다.

 

노동과 파업을 대하는 독일 국민의 의식 수준도 남달랐다.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공공노조 파업 기간 공공교통은 장기간 마비되고, 쓰레기 수거가 지체돼 온 동네에 악취가 진동했다.

이렇듯 시민들에게 커다란 불편을 안겨줬지만, 노조와 파업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시민들은 파업이란 노동자가 가진 최후의 정당한 저항수단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여기서 생긴 불편을 감수하는 것은 ‘공화국 시민’의 당연한 자세이자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독일 사회에서 노동은 존중받고, 파업은 인정받는다. 나아가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의 권한은 막강하다. 노사공동결정제가 대표적이다. 주지하다시피, 독일의 기업에서는 최고 의사결정기관인 이사회가 노동이사 50%, 주주이사 50%로 구성된다. 여기서 사장 등 경영진을 뽑는데, 이때 노동자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혁명적인’ 제도가 1976년 연방의회에서 90% 넘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됐다니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다. 당시 이 법을 대표 발의한 자민당(FDP) 원내대표 볼프강 미슈니크의 연설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노동사회의 미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우리는 정치시민(Staatsbürger)으로서는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주권자로 살지만, 경제시민(Wirtschaftsbürger)으로서는 노예로 산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이 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우리는 경제시민으로서도 주권자로 사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오늘날 독일이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강국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노사공동결정제 덕분이다. 노동자가 ‘노예’가 아니라 ‘주권자’로 살아가게 된 것, 경제 영역에서 가장 강력한 주체가 된 것이 독일 ‘경제기적’의 비결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독일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고, 최근 윤석열 정부에 들어서서는 그마저도 최악의 상황으로 내닫고 있다. 노동을 중시하고 노동자를 존중하며 노조를 협상의 파트너로 진지하게 대우하는 독일과 달리, 노동을 경시하고 노동자를 무시하며 노조를 적대시하는 시대착오적인 행태를 벌이고 있다.

최근 화물노조 파업 과정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보인 반노동 친자본의 편파적 태도는 상식과 금도를 넘어섰다.

 

윤석열 정부 들어 노동에 대한 탄압과 적대가 노골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사를 돌아보면 대한민국은 노동을 존중한 적이 없는 나라다.

 

여기엔 세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자본독재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본질적으로 군사독재에서 자본독재로 이행한 사회다. 자본은 한국 사회를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독점적 권력이 됐고, 노동은 적대시됐다.

둘째, 보수적인 정치지형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정치지형을 가진 나라로, 노동을 중시하는 정당이 집권한 적이 없다.

셋째, 반노동적 문화 때문이다. 학교에서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교육하지 않으며, ‘근로’라는 정체불명의 노예적 용어가 ‘노동’을 대체하면서 노동의 존엄에 대한 감수성도 지극히 희박하다.

 

우리도 선진국이 되었다고 하지만 진정한 선진국은 노동을 존중하는 나라다. 노동을 경시하고, 노동자를 적대시하고, 노조를 불온시하는 나라가 선진국일 수 없다.

노조의 파업에 천문학적 손해배상을 물려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나라는 야만국이다.

 

노란봉투법 제정으로 우리도 이제 성숙한 선진사회로 진입해야 한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