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평화 중재자’로 거듭나려는 중국, 미국의 선택은?

道雨 2023. 3. 27. 09:58

‘평화 중재자’로 거듭나려는 중국, 미국의 선택은?

 

 

 

 

* 지난 2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열린 만찬에서 술잔을 들고 있다. 모스크바/로이터 연합뉴스

 

 

 

2월21일 중국공공외교협회와 베이징대가 공동 주최한 ‘란팅’(블루룸) 포럼에 화상으로 참여했다. 란팅은 중국 외교부 기자실 회의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기조연설자로 나선 친강 외교부장은 지난해 4월 보아오포럼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이 제안했던 ‘글로벌 안보 이니셔티브’(GSI) 개념 문건을 발표하면서, 여섯가지 원칙과 20개의 구체적인 협력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지에스아이 구상이 세계 안보 문제에 관한 중국적 대안이자, 세계 갈등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청사진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건에 담긴 여섯가지 원칙은 공동, 포괄, 협력, 지속가능한 안보 비전을 견지하고, 각국의 주권과 영토 완전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유엔 헌장의 목적과 원칙을 준수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자국의 안보를 위해 타국의 안보를 침해하지 않으며, 대화와 협의로 분쟁을 해결하고, 전통·비전통 영역에서 안보를 지켜야 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세부 협력 방안으로는 강대국 간 조율과 긍정적 상호작용 촉진, ‘핵전쟁은 이길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는 공동 인식의 유지, 우크라이나 위기와 같은 지역적 문제의 정치적 해결, 아세안(ASEAN) 중심의 안보협력 지원 등이 제시됐다.

 

낯익지 않은가.

흡사 미국 민주당 외교정책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자유주의 노선을 연상케 할 정도다.

조 바이든 민주당 행정부가 중국 견제를 위해 공세적 현실주의 행보에 나서고 있는 지금, 베이징은 오히려 자유주의 담론을 정책으로 내걸어 차별화를 시도하는 셈이다.

말 그대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필자는 두가지 문제점을 제기했다.

하나는 보편적 국제규범과 국제법에 기초한 구상을 ‘중국 특색’으로 포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점, 다른 하나는 실행 가능성의 한계였다.

과거 시진핑 주석이 내놓았던 ‘아시아 안보구상’ 등 여러 제안 가운데 제대로 실행된 것은 없었던 만큼, 이번 제안이 실행 가능하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중국 쪽 인사들은 전자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후자의 경우 곧 가시적 조치가 있을 것이니 지켜보라고 말했다.

 

3월10일 ‘가시적 조치’가 무엇인지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 정부 중재로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국가안보 책임자가 베이징에서 회동한 뒤 “양국이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2개월 안에 상대국에 대사관을 다시 열기로 합의했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2016년 사우디 정부의 시아파 성직자 사형 집행을 계기로 국교가 단절된 지 7년 만이다.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와 시아파의 종주국인 이란은 지역 패권을 두고 적대적 경합을 벌여왔고, 예멘, 시리아 등지에서 대리전쟁을 치러왔다. 이번 타결이 중동 평화에 큰 호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후 중동 평화의 중재자를 자처해왔던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든 한 수였다.

 

베이징의 이런 행보는 중동에 그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 1주년이었던 2월24일, 중국은 현 사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12가지 요구가 담긴 평화안을 공개했다. 각국의 주권 존중, 즉각적 휴전과 종전 촉구 및 평화협상 개시, 인도주의적 위기 해결, 일방적 제재 중단, 전후 재건 등을 포함한 이 평화안은, 중국이 우크라이나 사태에서도 평화의 중재자 이미지를 확보하겠다는 야심이 깔렸다.

이를 위해 시진핑 주석은 3월20일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었고, 우크라이나 쪽과도 소통을 지속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영토 반환, 전범 처리, 전후 복구와 전쟁 배상 문제에 관한 충분한 논의 없이 휴전이 성사되기는 어렵다. 사실 이번 시진핑-푸틴 정상회담도 평화 중재보다는 양국의 전략적 밀착으로 귀결됐다.

그렇지만 유엔이 무기력에 빠지고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중재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베이징이 먼저 발 빠르게 중재자를 자임하고 나섰다. 비록 휴전과 종전의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지만, 중국 지에스아이 외교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하겠다.

 

흔히 중국 외교를 ‘전랑 외교’라고 부른다. 거칠고 공격적인 외교 행태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가 인도·태평양 전략과 가치 동맹을 내걸고 진영 구축을 시도하는 최근의 빈틈을 노려, 베이징은 오히려 세계 평화와 안정을 위한 중재 외교를 적극적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세계는 미국의 동맹과 우방만으로 구성돼 있지 않고, 분쟁과 갈등은 주로 미국의 영향권 밖에서 발생하고 있다. 중국의 지에스아이 외교 행보가 미국의 외교적 지도력에 커다란 도전이 될 수 있는 이유다.

 

미국도 이제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새로운 외교적 발상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문정인 |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