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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후퇴’의 시대, 시민단체가 위기인 이유 있는 이유

道雨 2023. 3. 22. 12:07

‘거대한 후퇴’의 시대, 시민단체가 위기인 이유 있는 이유

 

 

* 전국 400여개 시민단체가 결합한 총선시민연대 대표단이 2000년 4월3일 오전 서울 정동이벤트홀에서 4·13총선 낙선운동 대상자 명단을 발표한 뒤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부정부패와 반인권, 납세비리, 저질언행 관련자 등 낙천·낙선 운동은 광범위한 시민 지지를 받았고, 86명 낙선 대상자 가운데 59명(69%)이 실제 낙선했다. 특히 수도권 지역에서는 20명 가운데 19명이 무더기로 떨어지면서 큰 바람이 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금 우리는 시대의 전환기에 서 있습니다.”

 

1994년 9월10일,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에 울려 퍼진 참여연대 창립선언문 첫 구절이다.

선언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민주주의란 문자 그대로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 명실상부한 나라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이 발동되는 과정을 엄정히 감시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 모두가 힘을 합쳐 새로운 시대, 참여와 인권의 시대를 만들어 갑시다.”

 

창립 초기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으로 합류해 훗날 협동사무처장을 지낸 차병직 변호사는 저서 <사건으로 보는 시민운동사>에서, 참여연대의 시작은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이었다고 말한다. “민주적 가치와 공공성의 구현에 헌신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으로 창립된 참여연대의 “궤적은 산문적이나, 태동의 근원에는 열정의 시적 원리가 작동했다”는 것이다.

 

출범 초 난상토론 끝에 결정된 참여연대의 이름은 낯설고 긴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였다. 우여곡절 끝에 약칭을 문패로 확정한 건 1999년 제5차 정기총회에서였다.

이 신생 단체는 창립 10년이 채 안돼 대한민국 시민운동의 대표주자로 발돋움한다.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 총선 낙천낙선 운동 등 굵직굵직한 권력감시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민생문제 공론화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연대활동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였다.

 

 

복지 분야에서의 성취도 괄목할만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의료보험 통합과 의약분업 시행, 국민연금 개혁 등,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보건복지 정책논의 과정에서 참여연대는 강력한 정책의제 형성자였다.

대통령과 관료 중심으로 이뤄지던 대한민국 정책 결정의 폐쇄회로에 균열을 낸 것이다.

 

창립선언문 초안을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현 서울시교육감)는 이 단체 기관지 <참여사회>(2004년 5월호)에 실은 글에서 “회원들의 오케스트라, 무수한 헌신들이 만들어진 기적”이었다고 자평했다.

 

“시민의 힘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꿈을 먼저 꾼 이들도 있었다.

1987년 여성문제 해결을 통해 사회 민주화를 쟁취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한국여성단체연합, 1988년 인권변호사들이 모여 닻을 올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1989년 공정한 소득분배에 기초한 경제정의 실현을 취지로 발족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반공해 운동에 뿌리를 두고 1993년 전국 조직으로 출범한 환경운동연합과 1991년 일찍이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세상을 외치며 창립된 녹색연합 등이었다.

 

민주화 이후 잇따라 출범한 이들 진보적 시민단체는 때로는 손을 맞잡기도, 때로는 서로를 타산지석이나 반면교사로 삼으며 시대적 과제에 맞서 분투하며 성장했다. 시니어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그 시절’은 시민단체의 황금기였다. 취약한 재정과 부족한 인력으로 늘 고단했지만, 벅차고 보람찼다고 떠올린다.

정치학자 김영순(서울과학기술대 교수)은 저서 <한국복지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에서 시민운동 조직들이 “민주화 이후 한국 복지정치에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큰 영향력을 행사한 행위자가 됐다”면서 “이런 공익적 시민운동단체의 강한 역할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례없는 것”이라고 평했다.

 

2011년 ‘복지국가실현연석회의’는 그 정점이자 동시에 시민단체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줬다. 참여연대를 비롯해 400여개 단체가 결합한 거대한 ‘제휴체’였던 연석회의에는 복지는 물론 교육, 노동, 여성, 주거, 장애인, 의료분야 단체들이 총집결했다.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민생·복지 16대 입법 정책과제’를 발표하며 복지국가의 깃발을 치켜들었으나, 일반 시민참여를 끌어내지 못한 채, 2012년 대선 이후 개점휴업 상태로 연명하다 해산됐다.

 

박영선 전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연석회의 해소는 복지국가운동이 전개될 것이라는 사회적 기대가 무산된 것은 물론, 시민사회 내적으로도 무책임한 사회운동의 전례를 남겼다”고 평가했다.

‘지식기반 자원과 여론 동원을 통한 압력행사’를 통해 의제를 관철해야 하는 시민운동의 한계를 새삼 확인케 하는 계기였다는 분석도 나왔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중반 결성된 한국사회 주요 시민사회단체들은, 저마다 부침을 겪으며 어느덧 30년 안팎의 연륜을 쌓았다.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 약화했지만, 참여연대를 비롯한 진보적 시민단체들은 여전히 한국 정책생태계의 의제 제기자와 ‘대의의 대행’을 통한 복지국가 정치의 행위자로서 면모를 잇고 있다.

 

하지만, 요즘 그 어느 때와도 다른 ‘위기의 터널’을 지나고 있기도 하다. 민주화 직후인 80년대 말이나 90년대는 물론 복지국가 깃발을 올리던 2010년대, ‘조국 사태’에 따른 내홍과 정체성 논란을 불러온 격동의 문재인 정부 시기와는 또다른 위기다.

기후위기와 미·중 갈등에 따른 국제정치 지형의 급변, 저출생고령화, 남북에 이은 남녀, 세대 등 갈등전선의 다각화 같은 복합위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시민사회 단체의 필요성과 그간의 성과를 부정, 부인하는 집권세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 참여연대 주요 임원과 상근자들이 지난 1월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퇴행과 폭주에 맞서, 불평등과 차별을 넘어 꺾이지 않는 시민의 힘으로 승리하는 2023’이라는 제목의 신년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지난 3월7일 개최된 노동·시민사회연대포럼에서 ㈔시민 김소연 연구위원은 “지난 20년간 진보·보수정권을 가리지 않고 시민단체와 정부 간 소통창구였던 국무총리실 산하 시민사회위원회(옛 시민사회발전위원회)도 중단됐다”면서 “서울시, 충남도 등에서 마을공동체, 사회혁신, 협치 등 정책이 중단되거나 파행적으로 추진되고, 시민사회 관련 부서들이 없어지고 협치형 중간지원조직들이 폐쇄되고 예산이 대폭 축소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도 오늘날 대한민국은 “국가의 공공성과 민주주의, 노동과 시민사회가 총체적 위기에 놓인 거대한 후퇴의 시대”를 맞고 있다며, 특히 많은 시민단체가 “국가기관을 동원한 도덕적∙이념적 낙인과 법적 수단에 의한 억압을 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 대통령이 “시민단체의 부정이익을 환수해 고통받는 자영업자와 어려운 약자를 위해 쓰겠다”고 발언하고, 서울시장이 “서울시의 곳간이 시민단체 전용 ATM기(현금자동입출금기)로 전락했다”고 비난하는 상황이다. 대통령실은 시민단체 보조금을 전수조사해 의심사례는 지원금 회수나 수사의뢰 등 조처를 지시했고, 서울시에서는 청년, 복지, 시민참여 등 예산이 축소되고 있다. 시민운동 활성화 지원은커녕 국가기관이 시민단체를 표적 삼아 공격하고 있다.

 

더욱 우려스런 대목은 시민이 바라보는 시민단체 신뢰도는 그 이전부터 낮아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공익을 위한 시민의 대변자란 이미지에 출세나 권력, 사적 이익을 좇는 이익단체란 부정적 이미지가 채색되고, 심지어 위선적 기득권층으로 바라보는 혐오 이미지까지 덧씌워졌다.

 

한국행정연구원의 사회통합실태조사를 보면, 2013년 50.5%였던 시민단체 신뢰도는 2019년 44.1%로 떨어졌다. 기관별 신뢰도 순위는 2000년대 초 1위에서 2019년엔 의료기관, 교육기관, 금융기관, 지방자치단체, 대기업, 정부부처 등에 밀린 11번째로 추락했다.

 

이런 부정적 인식과 불신은 정책생태계의 신선한 의제 제기자이자 복지정치의 주요한 행위자로서 시민단체의 활동기반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

 

87년 민주화 이후 서른여섯해째를 맞는 현재, 한국의 시민단체는 또 다른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기후위기와 글로벌 경기침체, 인구문제까지 겹쳐진 복합위기의 전환기에, 민주주의의 퇴행마저 목도된다. 협치 채널은 무너지고, 공적 권력으로부터 부도덕한 집단으로 공격받으며 영향력과 신뢰도가 떨어진 상황은, 시민단체들이 전례없는 위기를 맞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시대변화를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다 함께 손을 맞잡아 대응하는 움직임은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다.

어쩌면 그런 무기력함이야말로 오늘날 시민단체들의 진짜 위기인 건 아닐까.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