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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자유시 사변 '독립군 몰살' 가담" 주장은 '거짓'

道雨 2023. 9. 1. 16:17

"홍범도, 자유시 사변 '독립군 몰살' 가담" 주장은 '거짓' 

 

 

 

자유시 참변은 러시아 인민혁명군이 주력부대... '빨치산'은 '의병'이라는 뜻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 내 독립운동가 흉상 이전을 추진하면서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된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국방부는 지난 28일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 자료에서 "▲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 소련 공산당의 자유시 참변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련 적군 제5군단 소속 '조선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 등의 역사적 사실" 등을 연관 근거로 제시했다.

 

지난 2021년 8월 홍 장군 유해 봉환 당시에도 일부 보수 언론과 '뉴라이트' 계열 학자가 "홍 장군이 자유시 사변에 가담해 독립군 몰살을 주도했다"고 주장하자, 역사학자들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오마이뉴스> 2021년 10월 30일 보도 "홍범도, 자유시 참변 당시 뒷산에 올라가 통곡" - 홍범도 서거 78주년 특별간담회 '유해봉환 후 왜곡보도 팩트체크' https://omn.kr/1vsbj)

 

봉오동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둔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공격한 '자유시 사변'과 연관됐다는 의혹이 사실인지, 아울러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 '빨치산'으로 참여했는지, 소련공산당 입당 이력이 북한의 6.25 남침 등과 관련이 있는지, 국방부 주장을 각각 따져봤다.

 

 

[검증 ①] "홍범도가 자유시 사변 가담?"→ "독립군 공격 가담 안해"
 

 

  국방부에서 28일 제기한 '홍범도 장군 자유시 참변 연관 의혹'의 근거로 추정되는 2021년 8월 당시 뉴데일리 보도. 당시 일부 보수 언론은 뉴라이트 계열 학자 주장 등을 근거로 홍 장군이 당시 독립군 공격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자유시 사변(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8일 러시아령 원동(극동)공화국 자유시(스보보드니)에 결집한 독립군 사이의 세력 다툼으로 무력 충돌이 발생한 사건으로, '우리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비극'으로 불린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17년 12월 28일 발간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94~100쪽)에 따르면,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가 '경신참변' 등을 일으켜 간도에 있는 독립군 근거지를 초토화시키자,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독립군 2천~2천300여 명이 '대일 완충국'이었던 원동공화국 자유시로 집결했다.

당시 이르쿠츠크파 고려혁명군이 1921년 6월 28일 통합 주도권을 놓고 서로 대립하던 상하이파 대한의용군을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29연대를 앞세워 무장 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 수십~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 군정의회(이르쿠츠크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한 것을 가담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30일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홍범도는 당시 자유시에 의탁하러 간 것이라, 볼셰비키가 주도한 자유시 참변에 개입할 권한도 여지도 없었다"면서 "홍범도 부대가 가해자 쪽 지휘부에 소속되긴 했지만, 6월 28일 무장해제 작전에는 러시아인 부대인 인민혁명군이 투입됐고 홍범도 군대는 동원되지 않았다. 한국인 부대는 상황 종료 후 시신 수습에 참여한 정도"라고 말했다. 

 

반병률 교수는 지난 2014년 저서 <홍범도 장군 - 자서전 홍범도 일지와 항일무장투쟁>(187쪽)에서,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홍범도편>(1967년)에 실린 '최계립이 김세일에게 쓴 편지' 내용을 근거로,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는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고 썼다.

 

장세윤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은 2021년 11월 5일 <역사와 현실> 시론('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의 귀환, 그 시사점과 과제)에서 "최근 일부 언론이나 인사들이 제기한 홍범도의 '자유시사변' 가담설이나 '자유시 학살' 개입설, '한국독립군 대학살', '독립군 학살 공모' 등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오히려 허재욱 휘하 부대 등 홍범도 관련 독립군부대가 이 사변의 피해자라 할 만 했다"라고 지적했다.

 

또 국방부는 '자유시 참변 재판위원 활동'도 문제 삼았다. 실제 홍 장군은 자유시 사변 5개월 뒤인 1921년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고려군사혁명법원'에 재판위원 3명 가운데 하나로 참여했다. 당시 법원은 50명에게 판결했는데, 그 뒤 상하이파에게 유리한 진상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3명만 실형을 받았다.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2017년 논문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에서 "홍범도는 한인빨치산들 사이에서 가지고 있던 명망과 권위 때문에 위원으로 선임되었을 것"이라면서 "불편부당하게 위원으로서 역할을 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홍범도는 이 재판에 위원으로 참가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후 주위로부터 많은 원성을 들어야 했다"고 밝혔다. 

 

반병률 교수는 "홍범도는 당시 자유시 사변의 진상이 안 밝혀진 상태에서 국제공산당(레닌이 주도한 '코민테른')의 정당한 결정으로 무장해제가 진행된 걸로 보고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것"이라면서 "슈마츠키(코민테른 원동비서부 책임자)가 홍범도의 명망을 이용했을 뿐, 미리 짜인 각본대로 재판했기 때문에 그가 재판 결과를 바꿀 수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반 교수는 자유시 사변 진상조사 결과 슈마츠키가 중앙과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게 밝혀지자, 홍 장군은 1921년 12월 14일 최진동, 이청천 등 간도 독립군 간부 28명과,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를 마친 뒤에는 김동한, 최진동 등과 함께 소비에트 혁명군 군정위원회, 러시아 중앙총회 검사부 당국자, 코민테른 집행부 등에 슈마츠키와 이르쿠츠크파 등 자유시 사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두 차례 제출했다고 밝혔다.

 

 

 

[검증 ②] "봉오동 전투에 '빨치산'으로 참가?" → "러시아 적군 아닌 '의병' 의미"

 

국방부가 "홍범도 장군의 빨치산 증명서에는 활동기간이 1919~1922년으로 기록되어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도 빨치산으로서 참가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의병 활동'을 했다는 의미로 '빨치산(파르티잔, 러시아어: партизан, 영어: partisan)'이라고 썼는데, 마치 러시아 적군 소속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왜곡했다고 지적했다.

 

반병률 교수는 "빨치산이란 용어 자체가 의용군을 뜻하고, '독립군'도 러시아식으로 표현하면 빨치산"이라면서 "홍범도가 자신의 직업을 '의병'이라고 썼듯, 빨치산은 독립군 활동을 의미한 것이지, '러시아 적군 소속 빨치산'으로 활동했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실제 홍 장군은 1922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참석 당시, 조사표에 직업을 '의병', 입국 목적은 '고려 독립'으로 적었다.
 

  1922년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당시 홍범도의 조사표. 빨간 원 안에 '고려 독립'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보인다.

 

 
[검증 ③] "6.25 사주한 소련공산당 활동?" → "1927년 입당해 1943년 서거, 북한과 무관"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걸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우당이회영기념사업회, 시민모임 독립, 카자흐스탄 독립운동가후손 청년회 관계자들이 30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등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 백지화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고 있다.

 

 

 

1927년 홍 장군의 소련공산당 입당에 관해서도 반병률 교수는 "당시 소련 공산당은 이미 소련의 합법적인 정당이었다"면서 "홍범도 나이도 이미 60살이었고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하는 직업적인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고, 집단농장에서 독립군 출신 부하들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반 교수는 "그가 처음부터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면, 그사이 한인사회당이나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등과 같이 공산 혁명을 추구하는 전위 정당에 들어갔어야 했다"면서 "홍범도는 합법적이면서 대중적인 정당에 들어간 것이고, 중요한 직책도 맡지 않았다"고 밝혔다

 

1868년 8월 27일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이, 1927년 10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할 때는 59세였고, 1929년부터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69세인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지금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고, 1943년 7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1943년 사망한 홍범도 장군의 소련공산당 활동은, 1950년 6.25는 물론 북한 김일성 정권 수립과도 연관이 없다. 하지만 국방부는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공산당의 사주를 받고 불법 남침하여 6.25전쟁을 자행한 엄연한 사실을 고려할 때, 공산주의 이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하여 기념하는 것은 육사의 정체성을 고려시 적절하지 않"다며, 북한과 연결지었다.

이에 반 교수는 "그런 논리라면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도 스탈린의 소련과 손잡았기 때문에 한미동맹도 해선 안 되는 것"이라면서 "그만큼 국제관계는 변화무쌍하고 국가와 이익에 따라 변하는 건데, 국방부는 서로 연관성도 없는 것들을 엮어 홍범도를 문제삼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레닌이 (1922년) 홍범도에게 권총 등을 선물한 것도 반일제국주의 전쟁 참여 노고를 치하해서 준 것인데, (뉴라이트에서는) 마치 '자유시 참변 때 독립군 진압에 기여한 공로'로 준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홍범도 장군, 독립군 몰살된 자유시 참변과 연관"

 

 

 

[김시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