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통일이 평화보다 자유를 앞세울 때

道雨 2024. 3. 25. 08:53

통일이 평화보다 자유를 앞세울 때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국내외 학계에서는 김정은의 이른바 ‘전략적 전쟁 결정론’과 ‘두 개 국가론’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전자의 경우, 우발적 군사 충돌과 확전 가능성은 있지만, 북이 ‘계획에 의한 대규모 전쟁’을 감행할 가능성은 적다는 견해가 모이고 있다. 그러나 후자에 대해서는 공세적 전술적 대응론과 수세적 구조적 전환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필자는 평양의 최근 행보를 구조적 전환으로 본다. 전통적으로 북한의 통일정책은 두 축으로 이루어져왔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지방정부, 두 개의 체제’를 특징으로 하는 연방제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 방안이 하나였고, ‘남조선’을 포함하는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을 이루기 위한 통일전선 전략이 다른 한 축이었다. 특히 3대 혁명 역량(북한, 남한, 국제사회) 강화를 통해 남측 내부에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고 공산혁명을 획책했던 통일전선 전략은 우리에게 큰 위협으로 작동해왔다. 과거 진보 정부에서조차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지 못했던 이유이다.

 

 

김정은 총비서는 지난 연말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를 교전 상태에 있는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올해 1월15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에서는 “공화국(북)의 민족 역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도 했다. 이는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남북기본합의서의 합의사항을 전면 무효로 하겠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하나의 국가론’에 기초한 연방제 통일 방안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언급이다. 북한 체제의 주요 특징 중 하나였던 ‘유훈 통치’가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북한은 2021년 8차 당대회에서 노동당 규약 서문의 전국적 범위에서의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이란 대목을 삭제하면서 통일전선 전략의 변화를 예고한 바 있다. 이번에 아예 폐기로 방향을 튼 셈이다. 노동당의 핵심 부서인 통일전선부를 공식적으로 해체하기에 앞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민족화해협의회 등 대남사업 부문 기구들을 대폭 정리했고 대남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와 대남 국영방송인 평양방송의 송출도 중단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북한 체제가 금과옥조처럼 다뤄왔던 평양 낙랑구역 통일거리의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또한 “꼴불견”이라며 철거를 지시했다는 점이었다. 이는 통일전선 전략의 완전한 폐기이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김정은 총비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를 ‘주적’으로 선포하고 외세와 야합하여 ‘정권붕괴’와 ‘흡수통일’의 기회만을 노리는 족속들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여기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범하지 말아야 할 착오… 미국의 식민지 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들과 통일문제를 논한다는 것이 우리의 국격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이는 ‘우리국가제일주의’라는 김정은 체제의 통치철학을 반영한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본질에서는 남측의 체제 위협에 대한 선제적 방어라 하겠다. 이제 통일전선 전략에 따른 남에 대한 체제 위협을 가하지 않을 터이니 대한민국도 헌법 3조의 영토조항 등을 거론하지 말고, 국제법과 국제규범에 따라 내정 간섭과 체제 위협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도 담겨 있다.

 

그러나 꼼꼼히 따져보면 이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반드시 부정적이라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 한국의 통일정책은 원래부터 ‘두 국가 모델’에 기초했다. ‘하나의 민족, 두 개의 국가, 두 개의 체제와 정부’라는 원칙에 따라 유럽연합식의 국가연합 모델을 상정해왔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단일민족 통일국가’를 선호하지만, 통일의 궁극적 형태는 남북 합의로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최근 평양의 ‘두 개 국가론’은 역설적으로 남측의 기존 주장에 접근해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어려운 과제는 적대적인 두 국가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우호와 선린의 관계로 전환하여 평화적 합의 통일의 물꼬를 트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다. 3·1절 경축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 정권의 폭정과 인권유린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으로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의 가치를 확장하는 것이 바로 통일”이라고 천명했다. 이를테면 자유의 북진 통일을 공식화한 셈이다. 통일부도 자유주의 통일 담론을 수립하기 위한 구체적 행보에 들어갔다.

 

‘평화’ 대신 ‘자유’를 맨 먼저 앞세운 통일정책이 가져다줄 미래는 과연 무엇인가. 전쟁, 파괴, 분단의 심화를 막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자유라는 창을 들고 라만차의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이미지가 겹쳐 보이는 이유다.

 

 

 

문정인 |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