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앞으로도 우린 파쇼와 싸우게 된다

道雨 2025. 2. 3. 09:18

앞으로도 우린 파쇼와 싸우게 된다

 

*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영장실질심사가 열린 지난달 1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을 둘러싼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욕설과 저주와 폭력의 언어가 난무하는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는, 섬뜩하고 괴이하지만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12·3 계엄에 명확히 반대했던 바이든 행정부는 물론이고, 자국 이익 앞에서는 동맹도 필요 없다는 (오랜 동맹국 덴마크로부터 그린란드를 빼앗겠다는) 트럼프가 집권했는데도 성조기를 흔들어대는 청맹과니들인데다, 뜬금없이 시진핑을 탄핵하자는 초국적 정치 구호로 큰 웃음을 준다. 혐중 프레임에 갇혀 자기들끼리 ‘화교’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최근엔 집회 중단을 선언하고 잠적한 배인규 신남성연대 대표를 향해, ‘배인규는 사실 화교’라며 공격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화교는 대부분 청나라 때 건너온 조상의 자손이거나 중국과 대립하는 ‘자유’ 대만 출신 아닌가.

 

이런 명백한 모순도 알아채지 못하는 무지와 맹신이, ‘선거연수원 체포 중국인 99명 주일 미군기지 압송’ 같은 가짜뉴스가 창궐하는 토양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극단적 성향의 ‘집단 무지성’은, 선동에 취약해서 폭력과 결합해 광기로 변하기 쉽다. 1·19 법원 폭동만이 아니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테러 역시, 특정 개인이나 단체를 악마화하는 선동이 물리적 위력으로 전화한 결과다.

극우의 백색테러는 계엄 사태 이후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계엄 사태를 포함하여 지금 우리 공동체가 처한 위기는, 윤석열 정부 내내 계속된 정치적 기획으로 ‘만들어진 위기’다.

‘강남-영남-교회’라는 기득권 삼위일체에, 대통령실이 체계적으로 관리한 극우 유튜버들이 가세하여, 레드 콤플렉스에 찌든 60~70대와 반페미니즘으로 의식화한 일부 2030 남성을 흥분시키고 있다.

 

눈에 띄는 건 무지해 보이는 군중이지만, 이들에게 ‘슈퍼챗’과 후원금을 쏘며 전투에 나서라고 독려하는 건 기득권 세력이다.

윤석열 친구이자 변호인 석동현은, 자신이 대신 벌금을 내주겠다며 폭동을 사주하기도 했다. 전광훈이나 유튜버들은 진정한 배후가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 앞에 나선 행동대장일 뿐이다.(처벌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선동에 취약한 흥분한 대중과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기득권 세력의 존재는, 히틀러의 나치즘을 낳았던 정치적 배경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나치즘의 대중적 원동력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에 따른 막대한 배상금과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만이 극에 달했던 하류 중산층, 노동자, 농민이었지만, 대자본과 융커(귀족 지주)의 지지와 후원이 없었다면 나치즘의 정치적 확립은 어려웠을 거라고,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에서 지적한 바 있다.

 

 

에리히 프롬의 정의에 따르면, 나치즘(파시즘)을 비롯한 권위주의(전체주의) 이념은, 타인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욕망(가학성)압도적으로 강한 외부의 힘에 복종하고 싶어 하는 갈망(피학성)을 동시에 지닌다.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유대인)를 짓밟으면서 강력한 독재 권력에 굴종하고 싶어 하는 양면성이 나치즘의 본질이라는 설명인데, 윤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의 극우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안으로는 노동자와 성소수자, 장애인을 비롯한 약자를 멸시하면서 독재의 향수에 젖고, 밖으로는 미국과 일본에 조아리면서 북한과 중국을 깔아뭉갠다.

내부의 적을 만들어 분열을 부추기고 힘센 나라에 빌붙기, 친일-친미와 반북-혐중, 친재벌과 반노동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다니는데, 에리히 프롬식으로 말하면, 열등감과 우월감이 공존하는 분열적 심리 상태의 반영인 셈이다.(지난 연휴 동안 세계를 뒤흔든 ‘딥시크’의 중국을 상대로 우월감을 느낀다는 생각 자체가 코미디다. 혐오를 하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건 알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현대사에서 보수를 참칭했던 정권 가운데 파쇼적이지 않았던 정권이 과연 있었나 싶다. 빨갱이 사냥과 노조 탄압은 물론이고,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지역(차별)주의 역시 파시즘적 분열 정책의 산물이다.

파시즘의 정치적 후계자인 국민의힘은 계엄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법원 폭동을 옹호하더니, 헌법재판소 결정마저 불복할 것처럼 을러대고 있다. 앞으로도 우린 파쇼와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민의 절반가량을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한 윤석열이라는 돈키호테로 인해, 새삼 재인식하게 된 사실이 있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 현대사는 ‘파시즘으로부터의 도피’ 여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민주화 운동의 다른 이름은 반파시즘 투쟁이었다는 것이다.

민주화가 완성됐다고 쉽게 생각했지만, 완벽한 착각이었다.

 

민주주의 시제에 완료형이란 없다. 오직 현재 진행형만 있을 뿐이다.

 

 

 

이재성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