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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세종한테서 배워야 할 국가경영 ABC

道雨 2025. 5. 8. 15:24

지금 여기, 세종한테서 배워야 할 국가경영 ABC

 

원-명 교체기 창업과 수성 함께 성취한 성군

지배층 일신, 사상 전변, 경제시스템 재구축

연산, 인조 같은 혼군은 절대 알 수 없는 혜안

 

세종대왕.

 

 

 

14세기 중엽, 동북아는 요동친다.

원(元)에서 명(明)으로 대륙의 패권이 넘어가며, 97년간 유지되어 온 국제 질서에 엄중한 지각변동이 벌어진다.

그에 따라 고려도 지난 470년간 온존하여 온 내부 모순이 격화되며, 새로운 국가 창신에의 요구가 거세어 진다.

 

백성의 실질 삶을 돌보지 아니하고 1백 년을 집권해 온 친원(親元) 세력은, 위기 앞에 극도의 취약성을 보인다. 변방에서 힘을 축적해 온 군부 세력은 중앙 정부로 진출하고, 정부는 이들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다.

북으로는 홍건적이 두 차례나 밀려오고, 남으로는 왜구의 노략질이 끊임없는 외환(外患)이 벌어진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는 대원(對元) 무역에서 금, 은을 결제 수단으로 삼는 바람에 국고는 텅 비어 버린다.

 

이제 조선 창업은 필수이자, 필연적인 시대적 요청이 되었다. 이 같은 대내외적 격변과 역사적 요청에 따라, 1392년 신생 조선은 역사 무대에 전격 등장한다. 새로운 국가의 탄생이다.

 

당시 새로운 국가 조선이 성립하게 된 조건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 지배계급을 전면 교체했다.

신생 조선을 이끄는 지배계급은 고려의 유신에서 조선의 신진사대부들로 전격적이며, 대대적으로 교체되었다. 사람이 바꾸지 않는 한, 국가, 사회가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수레바퀴를 달지 않은 마차를 미는 것과 같다. 조선은 새로운 지배 엘리트층들을 수레바퀴 삼아 이들을 통해(또한 이들에 의해), 조선이란 신생 국가가 나아가도록 했다.

 

둘째, 새로운 사상의 등장이다.

조선은 고려의 지배계급이 이념화한 불교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 이념인 신유학으로 지배 이념을 전면 바꾸어 버렸다. 이는 이후 유교적 사상을 백성들 마음속에 하나의 명백한 가치 기준으로 내면화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상 통일된 사상 체계를 구현하는 시발점이 된다. 또한 인식의 기본 틀이라 할 그 사회 구성원들의 지적(知的) 토대를 형성하게 했다. 새로운 사유 체계가 생겨난 것이다.

 

셋째, 부의 재분배다.

고려의 유신들이 점유했던 장원 등 막대한 토지 및 생산수단을 재분배하며, 이를 대신해 신생 조선의 지배계급이 경제 주체로서 대거 참여하게 했다. 이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새로운 국가 이념과 체계를 공고히 하는 데 실질적인 물적, 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이것이 창업 시기 수행한 가장 큰 변화다.

 

조선 창업 정신의 승계는 그로부터 26년 지난 1418년 들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창업과 수성을 동시에 수행할 적임자로 세종이 역사 무대에 전면 등장한 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조신은 실질적으로 일신(一新)에 들어서게 된다.

 

세종은 낡은 시대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국가적 역량을 한곳에 쏟아부었다. 신생 조선이 직면한 실질적이고도 민생에 직접적으로 소용되는 현안 해결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선왕인 태종은 조선 성립의 3가지 조건을 이루려 했지만, 실질 민생문제는 미완 상태에서 답보했고, 국가의 고질적 난제인 낮은 생산성은 신생 세종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세종 10년까지 국가 경제에 이렇다 할 진척이 없었던 것은 이점을 잘 반영한다.

민생이 해결되지 않는 한 정치는 한낱 공염불에 불과하다.

 

이점을 직시 한 세종은 즉위교서를 비롯해, 재위 32년간 실질적인 민생론을 선언하고 실천해 간다. 그 중 대미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풍평(豊平)’이다. ‘절대 풍요의 경지’를 뜻하는 것으로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상향식 경제발전과 분배의 원리’를 구현하겠다는 것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경제적 풍요와 평등, 즉 성장과 분배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임무가 세종 정부에는 주어졌다. 이것이 세종 정부의 강력한 민생론(民生論)이다.

 

하지만 낮은 생산성 하에서는 결코 풍요로운 세상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우선 백성들의 먹거리 문제를 개선하는 게 가장 시급하고, 긴요하며, 파급력이 크다는 인식이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에 농업 생산성을 극대화하고자 혁신적인 농정기술을 모색했다. 고려조의 낮은 생산성이 국가 경영권 약화와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악순환 구조를 불러온 주요인이라는 것을 알고, 세종 정부는 생산성 향상으로 국가 재정을 개선하고자 했다.

어떤 방법을 찾았을까?

 

농사직설.

 

 

 

세종 정부는 세종 10년부터 본격적으로 먹거리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해법을 찾고자 경상도 감사로 하여금 지방관들이 각 고을의 나이 든 농부들을 직접 찾아가 그 지방의 풍토에 맞은 농사법을 자세히 물어 보고하게 했다. 임금이 신민에게 구언(求言)하듯, 현장에서 답을 구한 것이다.

 

이들 혁신채집가들은 백성을 만나는 과정에서 민간이 알고 있는 혁신농법을 찾아냈다. 곧바로 이를 구체화해 중앙 정부에 올려 보냈다. 농지 정지 작업, 파종 방법, 김매는 순서, 수확 방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농법 지식이 우리 역사상 이때 처음으로 체계화된다.

여기다 오곡이 땅의 성격에 따라 달리 자란다는 땅과 곡식간의 상응 원리와, 잡곡을 교배해 우량종자를 만드는 방법까지 파악했다. 그 결과 ‘지방민들이 이미 알고 시행하는 바’는 하나의 원천 소스로 모아져 추려졌다.

취합된 농사 관련 데이터들을 모아, 총재 정초(鄭招)와 종부소윤 변효문(卞孝文)은 군더더기 없이 이를 요약하고, 또 모든 자료를 분석해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게 편집했다.

그리하여 1년 후 민간 보급을 위한 19쪽짜리 간결한 농서가 엮여지는데, 농사에 관한 직접적인 이야기만 다룬 책이라 하여 <농사직설>이라 이름하였다. 이 농법 교범서는 곧이어 전국 각도의 농민들에게 배포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혁신적인 농서는 전국의 농사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이것이 조선 농법이 근본부터 달라지게 된 배경이다. 이 작업의 가장 큰 의의는 민간의 숨은 지식을 찾아내 국가 지식으로 전환한 점이다. 시대는 달라도 기업과 구성원들의 지식을 총화해 내는 것이 국가정책의 주요 원칙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세종의 신농법은 얼마만큼의 생산성 향상을 가져왔을까?

 

수치를 보면, 고려 초에 약 3,000평의 논에서 평균 6~11석이 생산되던 벼농사가, 1430년에는 토지 품질에 따라 20~30석 내지 50~60석으로 대폭 늘어났다. 300~600퍼센트의 생산성 향상이 뒤따랐다.

씨 뿌린 것으로 따지자면, 고려 초에는 파종 후 약 3배 정도를 수확한 것에 반해, 세종 때에는 40배를 수확했다. 4,000퍼센트의 혁신이 있었다. 그야말로 생산성 혁명, 경제 혁명 그 자체였다.

 

혁신농법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 농법에서 이룬 혁신 활동은 다양한 경영 방법으로 계승돼, 경영환경 개선책인 ‘시비(施肥)경영’, 아웃소싱 방법인 ‘객토(客土)경영’, 준비 경영법인 ‘추경(秋耕)경영’, 제2의 수익원 개발법인 ‘간종(間種)경영’, 무한확장과 원금보장법인 ‘혼작(混作)경영’으로 구체화 되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엄청난 AI· 딥러닝 방식을 당대 석학들이 동원해 지식 혁명을 이뤄낸 것이다.

 

그 결과 먹거리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던 국가적 관심사는 완전한 결실을 맺게 된다. 나아가 농업혁명에서 시작한 창조의 역동성은 전 분야로 확산되면서, <농사직설>은 이후 근 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나라 기본 농서로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즉 지식이 경제 도약의 기반이 된 것이다.

 

생산성 향상의 혜택은 일반 백성들에게로 고스란히 돌아가, 백성들이 부담하여야 할 조세율은 직전 1/10에서 1/20로 100퍼센트 경감되었고, 정부 및 민간에 쌓인 막대한 잉여는 조선의 국가 경제를 획기적으로 돌리는 데 이바지했다.

그야말로 세종이 꿈꾸었던 ‘풍평’ , 즉 성장과 분배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은 것이다. 나아가 조세 정의가 실현되며 국가 주요 정책은 성공적인 지속성을 띠게 된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세종 정부는 국가적 잉여를 망실하거나, 실기하지 않았다. 세종 10~14년경부터 국가적 잉여를 과학기구를 만드는 자원으로 집중 투입해 자격루, 앙부일구 같은 온갖 과학기구와 악기제조, 화폐주조 등이 산업이 불처럼 번져 나갔다.

과학 기술과 연관된 분야를 전부 석권해 나가며, 15세기 당시 지구상의 대문명국으로서 조선의 르네상스는 만개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같은 동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옛 집현전으로 알려진 경복궁 수정전. 

 

 

 

세종이 즉위와 함께 제일 먼저 한 일은, ‘지식을 모으는 큰집’이란 뜻의 집현전(集賢殿)을 만든 것이었다. 여기서 37년간 100여명의 통섭형 인재들이 쏟아져 나오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고려가 젊은 피를 수혈받지 못해 쓰러진 것과 달리, 신생 조선은 처음부터 강한 지적 활력을 불어넣어, 창업에 이어 수성 시기에 접어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국가 창신(創新)에의 대도약을 이뤄냈다. 성공의 릴레이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민생에 활력을 불어넣은 세종 정부의 활동을 통해 알게 되는 점은 무엇인가?

 

국가 창업에는 일련의 대변화가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한 국가가 일신하려면 ⯅재배 계급의 변화와 ⯅사상적인 전변, 그리고 ⯅경제 시스템의 재구축이 필연적으로 뒤따라야만 한다. 이 3축이 국가 창신의 기본 틀이다.

 

조선 창업 시기와 세종 시대를 돌아보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묻게 된다.

3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열의와 실천을 담보한 ‘빛의 혁명’ 주체들이 국가, 사회 전면에 부상해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데 혁혁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피 흘려 어렵게 세우면 다시 반역 세력에 의해 무너지길 반복하여 온 한국 현대사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또 시민이 이룩한 ‘빛의 혁명 정신’이 흔들리지 않는 주추가 되도록 내재화하고 강화하는 민주혁명의 이념을 폭넓고 깊이 있게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도록 하여야 한다. 창업 반세기가 훌쩍 넘은 대한민국은 낡은 관념을 버리고, 사상적 전변을 꾀할 때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경제 시스템의 재정비와 부의 재분배 문제가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한다. 이것이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고 대한민국이 새롭게 성장과 통합으로 가는 길임은 자명하다 하겠다.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것은 지금이야말로 공고한 민주혁명과 국가 창신에의 요구가 강렬하게 요구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창업 후 많은 내란을 겪어왔다. 민주 제도의 틀이 도전받지 아니하고 유지 되어 왔더라면 수많은 사람이 피 흘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국가 도약은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드높아졌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빛의 혁명’을 통해 국가 창신에의 부동(不動)한 기틀을 세워야 한다. 단지 한때의 정권 창출을 목표 삼지 말아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다른 시대에는 다른 리더십이 요구된다. 무(武)에서 문(文)으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 세종은 자신의 책무가 무엇인지 알고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할 때 민주사회의 토대를 다시금 튼튼하게 할 수 있고, 국가가 도약할 수 있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여전히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창업과 수성 시기를 동시에 안고 가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혁명은 끊임없는 과정일 뿐이다.

 

 

용비어천가.

 

 

 

첨언으로,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후 최초로 만든 국가경영 지침서라 할 『용비어천가』에서, ‘절대로 잊지 말라’는 뜻의 <무망장(毋忘章)>을 집어넣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 내용은, 조선의 창업 군주들은 창업 시기 ‘집조차 없어 움막에서 살기도 했고, 군대 행렬을 따라다니느라 갑옷을 벗어보지도 못하였으며, 싸움터에 나가서 밥을 먹지 못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닐 만큼 어렵게 창업을 이뤘으니, 후대들은 이 점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국왕이라면 이를 알고 반드시 백성을 부지런히 돌보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자리에서 쫓겨날 때 전대 왕들의 덕을 믿어 보아야 아무 소용 없다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이보다 더한 악행을 가까이서 보고 있다.

 

세종의 국왕의 책무에 부응해 “과덕(寡德)한 내가 왕업을 계승하여서는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였다(寡予承緖, 夙夜兢惕,세종 26년 윤7월 25일)”고 고백한다.

그 때문에 더욱 “국왕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극한의 노력을 다하였다”고 토로했다.

이런 혼신을 다한 국가 경영을 후대의 연산군, 인조 같은 혼군들이 어찌 알겠는가?

 

 

지금 세계는 요동치고, 중요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과거처럼 판이 그대로 굳어 있다면 오히려 우리에겐 강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순위 바꿈이 일어나기 어렵다.

지금은 14세기처럼 위기의 시기이자, 최대 기회의 시대이기도 하다. 조선 창업과 세종 시기를 살펴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역사에는 ‘해야 할 바’와 ‘하지 말아야 할 바’에 대한 뚜렷한 답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바로 어두운 역사의 길을 헤쳐 나가는 한 줄기 빛이다.

빛을 바라보고 가는 민족에겐 반드시 희망이 있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humanity36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