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헌법의 시간

道雨 2025. 5. 9. 10:12

헌법의 시간

 

 

 

 

 

 

헌법재판관 퇴임 뒤 마련된 담소 자리에서 어떤 변호사가 물어 온 게 있다.

소송은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데 꼭 이길 가능성이 큰 재판만 맡아 해야 하느냐.

그날 한 답변의 요지는 이렇다.

원칙적으로 승소 가능성이 절반이 넘는 재판을 수임하는 게 좋다. 지는 재판은 의뢰인에게 미안하고, 변호사의 경력에도 좋지 않다. 특히 공적인 재판은 선례로 남기 때문에, 패소하는 경우 부담도 적지 않다.

따라서 사건을 맡을 때는 사적 성격의 사건인지, 공적인 것인지를 잘 판별해야 한다. 후자의 경우는 사안 자체가 중요한 경우가 많으므로, 사건 초기부터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패소에 대비한 대비책을 미리 마련해두는 게 바람직하다.

 

지난달 4일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사건 결정이 선고되었다. 재판관 전원일치 파면이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여기서 그와 같이 예상한 이유를 자세히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국회의 입법권과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계엄령이 발효되었다. 무장한 군 병력이 국회 내로 유리창을 깨고 진입하는 장면과 국회 본청 가까이 착륙하는 헬기들의 모습이 생중계되었다.

법률가의 눈으로 보면, 비상계엄의 내란죄 구성요건 사실이 모두 증명된 밤이었다.

 

헌법재판소가 겉으로 보기에 상당한 시간을 들여 신중히 숙의하는 듯 보였지만, 비상계엄 당일 이후 헌법재판소가 밝혀야 할 새로운 사실은 없다시피 했다. 그렇다면 탄핵 사건 번호가 주어졌을 때 사건의 승패는 이미 거의 결정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전 대통령이 헌재 재판정에서 한 진술이나 대리인들의 변론을 보면, 그와 같이 재판에서 패소할 가능성은 거의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은 지난달 17일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에 초청되어, ‘법률가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200여명의 학생 앞에서 강연한 일이 있다.

그는 대통령 탄핵심판과 관련해서 ‘관용과 자제’를 뛰어넘었느냐 아니냐가 판단 기준인데, 야당의 탄핵소추는 그걸 넘지 않았고 비상계엄은 그걸 넘었다는 게 헌재 판단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날 질의응답에서 “야당에 적용되는 권리가 여당에도 적용돼야 하고, 여당에 인정되는 절제가 야당에도 인정돼야 그것이 통합”이라며 “나에게 적용되는 원칙과 너에게 적용되는 원칙이 다르면 어떻게 통합이 되겠는가”라고 강조했다.

문 전 재판관은 “관용과 자제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며 “그 통합을 우리가 좀 고수해보자, 그래서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평등권을 획기적으로 증진시켰다고 평가받는 사건으로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1952)이 있다. 여덟살 소녀 린다 브라운은 집 근처에 가까운 초등학교가 있는데도, 기찻길 건너 멀리 다른 학교에 다녀야 했다. 피부색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브라운은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1954년 5월17일 연방대법원의 위헌 판결이 내려졌다. 학교가 인종을 분리해서 학생을 가르치는 건 평등권 침해라는 만장일치 판결이었다.

브라운 사건은 사건 초기에는 헌법 위반을 지지하는 대법관들의 수가 소수였으나, 입원 중인 대법관을 직접 찾아가 설득한 얼 워런 연방대법원장의 열정과 노력으로 다수가 되고, 이윽고 만장일치라는 통합에 성공한 예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헌법재판소는 탄핵 사건 선고 이전에도 그 통합적 위상을 보여준 바 있다. 즉 지난 2월27일 마은혁 헌법재판관 불임명에 대한 권한쟁의 사건에서 만장일치로 청구를 인용하였다.

헌법재판소는 최상목 전 대통령 권한대행이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 국회의 권한을 침해한 위법 행위라고 결정했다. 마은혁 재판관은 지난달 8일 임명되었고, 헌법재판소는 비로소 9인 완전체가 됐다.

 

마 재판관이 헌재 구성원으로서 재판관의 직무를 시작하여 담당한 첫 주심 사건이, 한덕수 전 총리가 했던 이완규, 함상훈 헌법재판관 후보자 지명의 효력정지 가처분이었다.

이 사건은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이 행사하는 헌법재판관 지명권을 행사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는 이미 정계선 등 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은 전력이 있었다. 한 전 총리는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은 나라가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전념하되 헌법기관 임명을 포함한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 권한 행사는 자제하라는 것이 우리 헌법과 법률에 담긴 일관된 정신”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달 16일 만장일치로 한 전 총리의 모순된 헌법재판관 지명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지난 1일 대법원은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이재명에 대한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죄 상고심 판결에서, 예상 밖의 빠른 선고를 하면서, 무죄 판결한 원심 판결을 유죄의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사건을 환송받은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는 첫 공판 기일을 오는 15일로 정했다가 대선 후인 다음달 18일로 변경했다.

 

 

이 후보는 파기 환송된 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을 비롯해 모두 5건의 재판을 받고 있다. 그가 만약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그의 재판은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84조에 따라 중단될까.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 검찰은 대통령 불소추 특권이 없음에도 법원에 재판 절차 중지 요청서를 제출했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당시 자신과의 관계를 공개하지 않는 대가로 성인물 배우에게 돈을 주고 회사 장부에는 다른 용도로 기재한 혐의로 유죄 평결을 받은 상태였다.

법원은 “평범한 시민으로서 도널드 트럼프는 유죄이지만, 대통령직에 당선된 인물로서 피고인을 판결의 심각성으로부터 보호할 이유가 있다”며, 형량 면제 판결을 내렸다. 대통령 지위와 미국 사회의 통합을 고려한 판결로 보인다.

 

 

바야흐로 다시 헌법의 시간이다.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법원이 재판을 계속하고자 하면, 궁극적으로 헌법재판소가 헌법 84조의 해석을 통해 최종 방향을 정해야 할지 모른다.

헌법재판소가 비상계엄 이후 주어진 소임을 다하기 위해 보여준 관용과 절제, 그리고 그것을 지켜가기 위한 통합의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석태 | 전 헌법재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