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 의령 지역 답사
- 오 봉 렬 -
* 답사일자 : 2003. 3. 9
아라가야의 땅 함안과 의병의 고장 의령은, 경남지역이면서도 부산에서는 비교적 가까운 편이고, 남해고속도로에 인접해 있는 곳이라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그러나 먼 곳에 다녀오다가 고속도로가 혼잡할 것 같으면 우회로로 많이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답사처로 삼아 다녀온 기억은 별로 없는 곳이었다. 오늘의 답사 이전에, 근방을 지나가는 길에 들러본 곳은 함안의 대산리 석불과 의령의 충익사, 보천사터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 답사를 해 본 결과 다른 어느 지역에 못지 않게 풍성한 답사처와 역사를 지니고 있어 마음 뿌듯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부산에서의 교통편에 맞춰 답사코스를 잡아 다녀온 곳을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무기연당, 함안군청, (아라고분군), 대산리 석불, 무진정, 4사자석탑(함성중학교), 서산서원, 어계고택, 채미정, 방어산 마애불, 정암나루, (충익사), 보천사터(부도와 석탑)
주씨고가(周氏古家)와 무기연당(舞沂蓮塘)
행정구역으로는 함안군에 속해 있지만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다. 구마고속도로 칠서나들목에서 빠져나가 마산 방향으로 가는 국도에서 약간 벗어난 곳인 무기리라는 동네에 있다.
‘주씨고가’라 함은 국담 주재성(菊潭 周宰成, 1681-1743)의 생가이자 국담 이래로 주씨의 종가가 되어온 옛집을 말한다. 이 옛집의 솟을삼문에는 충신 정려와 효자 정려가 나란히 걸려 있어 깊은 인상을 남겨준다.
국담은 영조 4년(1728)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함안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또한 사재를 내어 관군들도 도와주었는데, 난이 평정된 뒤 원대 복귀하던 관군들이 그 고마움에 보답하는 뜻으로 집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파 주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기연당이다. 무기연당은 사방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고 주씨고가의 사랑채와 무기연당 사이에 작은 문이 나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유감스럽게도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담장 너머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무기연당은 네모난 연못(주위를 석축으로 쌓았다) 안에 둥근 석산을 만들었으며, 두 채의 누정과 연못가의 굽어진 소나무가 운치있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누정의 반대 쪽에는 연당의 분위기와 맞지 않게 기양서원, 충효사, 영정각 등이 들어서 있다.
함안군청과 아라고분군
함안군청 로비에는 지역의 문화재를 소개하는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답사 안내 책에서 소개되지 않는 많은 향토문화재들을 화상을 통해 볼 수 있도록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우리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흔치 않은 4사자석탑이 본래 있던 자리를 떠나 함성중학교에 있다고 소개되어 나중에 찾아보기도 하였다.
군청 뒤쪽으로는 아라가야의 고분군이 펼쳐져 있는데 시간 관계상 들르지 못하고 대산리 가는 길에 도로상에서 멀리 능선위에 있는 고분들을 바라 보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대산리 석불, 무진정(無盡亭), 그리고 4사자석탑
예전에 큰 절이 있었다고 해서 대사리(大寺里)라 불리는 마을에 있다. 몇 년 전에 한 번 지나가는 길에 들렀던 곳이다.
머리 부분이 없어진 석조아미타불 1점과 보살상이 3점(1점은 머리부분이 없다) 있다. 비록 깨어지긴 했지만 아미타불은 균형잡혀 있는 모습인데 비해 보살상은 하체 부분의 비례가 맞지 않아 약간 어색하게 보인다.
석불이 있는 부분에 있는 느티나무가 동네 사람들의 좋은 휴식처가 될 듯 한데, 정면에 있는 폐교의 담장이 매우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차라리 담장이 없었으면 동네 전체의 분위기가 더 나아질 듯 싶고 불상들의 시야도 확 트일 듯 하다.
대사리 들어가는 갈림길이 있는 곳에 연못과 정자(무진정 : 이곳에서는 이수정으로 통한다)가 있는 정원이 있다. 기암괴석과 연못과 정자가 잘 어우러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데, 중앙의 섬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콘크리트로 되어 있는 점이 아쉬웠다. 정자는 조려(생육신의 한 사람)의 손자인 무진정 조삼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문을 잠가놓아 들어갈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 서원을 처음 세운 주세붕이 이 정자의 기문을 지었다고 한다. 담장이 없이 개방되어 있어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이나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로서 매우 잘 이용될 것 같다.
함성중학교에 4사자석탑이 있어서 찾아갔는데, 기단부에 있어야 할 사자들은 다른 데로 옮겨진 듯 보이지 않고 윗부분 만이 남아 있었다. 아마 5층(?)석탑인 듯 한데 일부 몸돌이 없이 지붕돌이 겹쳐지는 등 유실된 부분이 많아 불확실하였다. 사자가 기단부를 받치고 있는 석탑은 화엄사 4사자석탑과 사자빈신사터 4사자석탑 등 2개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곳에 있는 것도 잘 복원하면 보물로 지정될 만한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함성중학교에는 이 외에도 동헌터의 주춧돌 등이 있고, 입구에는 민속전시관이 만들어져 있었지만 일요일은 휴관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전부터 느껴온 것이지만 박물관, 전시관, 문화관, 도서관 등의 시설은 일요일과 공휴일에 문을 열어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산서원, 어계고택, 채미정
어계 조려(어계 조려, 1420-1489)는 조선 초 생육신의 한 사람이며 함안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단종 원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있을 때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비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절의를 지키기 위해 이곳 함안으로 물러나 죽을 때까지 은거하며 단종을 연모하였다. 이러한 어계의 삶을 함안 사람들은 중국 주나라 때의 충신인 백이·숙제에 비유하였다.
어계고택을 찾아가는 길에 큰길 옆에 있는 서산서원이 먼저 눈에 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 조려 선생을 모신 사액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근래에 다시 세웠다고 하며, 우리가 가던 날도 한창 보수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서원 옆에는 함안 조씨의 비각과 함께 비석 여럿이 눈길을 끈다.
어계천을 따라 약 5분 정도 걸어가면 어계고택이 나온다. 옛날에는 물고기가 많아 어계라고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길을 확장하느라 물길이 많이 좁아지고 수량도 많지 않다. 그러나 곳곳에 옛날의 샘이 있고, 물가의 나무 그늘을 적절히 이용하는 아이디어(물을 가로질러 공간을 만들어 그늘을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등, 걸어가면서 보는 눈맛이 괜찮다.
어계고택은 건물의 형태가 비교적 단순하고 검약한 편이며 평범한 민가양식이다. 정면에 ‘琴隱遺風’이라고 쓰인 현판이 눈길을 끈다.
어계고택에서 다시 마을입구로 나오면 채미정이 있다. 옛 서원의 부속정자였던 채미정(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죽은 백이·숙제에 비유)은 근래에 복원되었는데 건물에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채미정과 붙어 있는 얕은 언덕 위에는 문풍정(聞風亭)이라는 근래에 세운 전망 좋은 정자가 있다. 정자에 붙어 있는 현판을 읽어 보면서 이 정자를 세운 내력을 알아보고 바람을 즐기는 맛도 괜찮은 듯 하다.
방어산 마애불
마애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고 한창 불사가 진행 중이었다. 요즘 들어서는 절들이 대체로 거대한 축대를 쌓는 곳이 많아, 우악스럽기도 하고 위압적이기도 하면서 뭔가 불안해 보이는 것이 많더니 이곳도 마찬가지다. 절에서는 ‘약사여래불’을 찾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여래’나 ‘불’이나 모두 부처님을 뜻하니 이것도 ‘처갓집’ 마냥 중복되어 쓰이는 것일 터, 발음하기 좋으니까 그러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일반신도는 그러러니 해도 명색이 절의 스님은 그리 쓰지 않는 것이 좋을 듯 생각되었다.
절에서도 한참을 올라간 곳에 마애불이 있다. 3월 중순인데 눈이 쌓여 있고 일부는 녹아서 질척거린다. 발 밑이 미끄러워 넘어질까 조심스럽다. 마애불이 있는 곳에 도착하니 신도들 몇분이 열심히 불공을 드리고 있다. 어느 나이 든 보살이 절에서 들리던 소리와 마찬가지로 ‘약사여래불’을 낭송하는데 어찌나 우렁찬지 마이크로 하는 줄 알았을 정도이다.
마애불은 약 5m 정도 되는 수직의 암벽에 선각으로 새겨져 있다. 가운데에 약사여래가 있고 좌우에 월광보살과 일광보살이 있는 삼존불이다. 책에서 보던 사진보다 훨씬 더 선명하여 기대 이상의 흡족한 마음이 일어났다. 삼존불 앞에 어느 나이 지긋한 분이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있었다. 보살 한 분이 왜 하루종일 사진을 찍느냐고 물으니, 시간마다 햇빛이 비치는 각도가 다름에 따라 부처님이 다르게 보인다고 대답하신다.
절에 계신 보살 한 분이 들고 온 비닐봉지 속의 쌀을 주변의 돌 위에다 부어 놓길래 까마귀들 주려고 그러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하신다(조금 전에 까마귀들이 많이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나서 그 보살은 쌀을 비운 비닐봉지에 마애불 주변의 쓰레기를 주워 담아 내려가셨다. 우렁찬 목소리로 ‘약사여래불’을 외치던 사람보다도 이 보살님이(또는 이 분의 후손들이) 내세에 더 많은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산을 내려왔다.
정암나루와 충익사
남강을 가로지르는 정암교(구도로로 가야 한다)를 건너면 바로 있다. 정암정(鼎巖亭)과 정암(鼎巖) 일대를 정암나루라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곽재우와 그의 의병들이 대승을 거둔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아흐레 만인 1592년 4월 22일, 전국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가, 함안에서 몰려와 의령 쪽으로 가기 위해 남강을 건너려던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적지이다. 이때 몰려온 왜적 2만 명과 맞써 싸운 의병 수는 고작 1,000여 명으로 20대 1의 전투에서 크게 이긴 것이다. 정암정은 이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정암정이 있는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바위가 정암인데 바위의 뿌리 부분이 솥의 다리처럼 세 개로 떠 받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암정이 있는 바위는 층층바위로 되어 있는데 발 밑의 물이 회돌이 치면서 매우 깊어 보였다.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바위 벼랑에는 많은 새들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의령 읍내에 있는 충익사는 곽재우와 그 휘하 열일곱 의병장을 모신 사당인데 얼마 전에 가 본 관계로 그냥 지나쳤다.
덕곡서원, 보천사터 3층석탑과 부도
큰 길에서 갈라지는 길 오른쪽 언덕편에 보이는 옛 건물이 덕곡서원이다. 안내문을 보니 퇴계 이황의 처가가 이곳이라고 하며, 퇴계가 한때 이곳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서원이라고 한다. 건물이 특이한 것은 없으며, 강학공간은 생략한 채 주로 사당공간만을 지니고 있었다.
보천사터 입구에는 상당히 넓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고 지금도 공사가 계속되고 있는데, 아마도 호젓한 분위기의 답사는 이번이 마지막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탑 주위에 각종 시설물이 들어서면, 그 번잡함이 탑과 부도만 있던 이곳의 고즈넉한 분위기도 끝장을 내고 말 것이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전에 왔을 때도 탑 뒤에 조성된 절로 올라가는 길에 수백 개의 불상(관세음보살인가 잘 모르겠다)을 늘어 세워 경건한 마음은 커녕, 속물스런 생각이 들어 불쾌한 마음이 들었었기에 이번에는 그 쪽으로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보천사터 3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탑의 양식을 충실히 따른 고려 초기의 탑이며, 기단이 매우 튼실하게 되어 있다.
보천사터 부도는 팔각원당형이며 몸체의 앞 뒷면에 자물쇠 모양이 양각되어 있고 비교적 균형이 잘 잡혀있는 부도이다.
이번 함안 · 의령지방의 답사는 별로 준비하지 못한 채 찾아보았지만 돌아오는 길의 뿌듯함은 어느 유명 답사처 못지 않았다. 고대 가야왕국으로부터 신라 · 고려 · 조선을 거쳐오는 동안의 역사적 체취가 많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국보로 지정된 것은 없고 보물로 지정된 것도 몇 점에 불과하지만 훌륭한 선조들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 많아, 그분들의 고결한 삶과 그 숨결이 지금도 옆에서 느껴지는 듯 하다.
'답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해 답사여행 (답사기) (김현숙) (0) | 2007.06.18 |
---|---|
안동, 의성답사기 (김현숙) (0) | 2007.06.18 |
포항 지역 답사기 (0) | 2007.06.08 |
충무공의 얼이 서린 고장 : 통영 답사기 (0) | 2007.06.08 |
창녕지방 답사기 (0) | 2007.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