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충무공의 얼이 서린 고장 : 통영 답사기

道雨 2007. 6. 8. 17:18
1004 

              충무공의 얼이 서린 고장 : 통영


* 답사일자 : 2003. 7. 17                                  오  봉  렬


  오늘의 답사 계획을 세우기를, 통영과 거제도를 묶어 잡았으나, 시간이 부족하여 거제도에는 발을 들여 놓지도 못하였고 통영도 일부 빠뜨리게 되었다. 애초에 지난 일요일에 다녀올 계획이었지만,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부산 시내 박물관(패총박물관, 근대박물관) 관람으로 바꾸었고, 오늘 제헌절 공휴일을 이용하여 다녀오게 되었다.

  예전의 충무시와 통영군이 통합되어 통영시로 되었는데, 통영은 통제영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고, 충무는 충무공 이순신과 관련되었으니 둘 다 역사적인 뜻을 가졌다고 하겠다.

  세병관, 충렬사, 한산도 등 충무공과 관련된 역사유적을 중심으로 돌아 본 답사가 되었다.



                   세병관 · 통영향토역사관 · 문화동 벅수


  임진왜란 중인 선조 26년(1593)에 원활한 지휘체계를 세우기 위해 삼도수군통제사를 신설하고 전라좌수사 충무공 이순신으로 하여금 겸직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제1대 통제사는  충무공, 제2대 통제사는 원균, 제3대 통제사는 다시 충무공으로 이어졌으며, 고종 32년(1895)에 통제영이 폐지될 때까지 모두 208명의 통제사가 임명되었다고 한다.

  통제영은 최초로 한산도에 두었으며, 임진왜란 후 거제, 여수 등으로 옮겼다가 1604년 통영으로 옮겨왔다.

  통영시에서는 통제영 복원사업을 하고 있는데, 세병관 주변에 있는 초등학교, 상업학교, 세무서 등은 옮길 예정이라 하며, 법원 자리에는 통제영 당시의 건물을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세병관(洗兵館)은 선조 36년(1603),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이 통제영에 세운 객사이다. 건물의 규모가 엄청나게 크며, 비록 1970년대에 보수된 것이기는 하지만 400년을 버티어 온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당당한 건물이다. ‘洗兵館’이라고 쓰인 현판의 글자 하나의 크기가 2m나 될 정도로 위풍당당하다.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이니 전쟁을 끝나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 것이다. 세병관으로 들어가는 문에도 지과문(止戈門 : 창을 거둔다는 뜻)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무력으로써 무력을 억지한다고나 할까?

  세병관은 사방이 벽체가 없이 모두 개방된 1동짜리 건물이지만, 건물 중앙 세 칸의 뒤쪽 부분에 마룻바닥을 한 단 높이고 우물천장과 삼면에 창호문을 달아 다른 공간과 구분하고 있는데, 바로 임금의 궐패를 모시는 공간이다. 세병관이 책에는 보물로 되어 있는데, 관리인 말에 의하면 작년(2002년도)에 국보 제305호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세병관 아래쪽에 수항루(受降樓)라는 누각이 있는데, 왜적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던 곳이라고 하니, 임진왜란으로 시달림을 받던 백성들에게 다소나마 위안이 되었을 듯 싶다.

  세병관 앞에 있는 통영향토역사관은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통영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과 통영에 관한 기록사진들을 알차게 전시하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 통영시 문화관광과에서 파견나왔다는 젊은 사람이 근무하고 있다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어 통영에 대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답사 다닐 때 향토역사관은 꼭 둘러보는 것이 좋겠다.

  차가 다니는 길에서 세병관으로 올라오는 입구에 철책으로 가두어진 벅수가 하나 있다. 주민들이 마을에 재앙이 생기는 것을 막고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돌장승이다. 다른 데서 흔히 보는 것과 달리, 송곳니가 크게 튀어나오는 등 위압적이고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다. ‘土地大將軍’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통영 충렬사? 해저터널


  통영에는 충무공 사당이 두 개가 있는데 착량묘(鑿梁廟)와 충렬사(忠烈祠)이다. 착량묘는 해저터널 위쪽 언덕에 있는데,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599년에 군인과 이 지방 사람들이 착량 언덕에 초당을 지어 이순신의 초상을 봉안하고 제사를 모셨으니 가장 오래된 충무공의 사당인 셈이다.

  충렬사는 선조 39년(1606) 충무공의 부하였던 이운룡이 통제사로 부임해 왔을 때 왕명에 따라 지었으며, 삼도수군통제사가 봄 가을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전시관에는 팔사품(八賜品 : 충무공의 전공을 높이 산 명나라 신종이 보낸 여덟 가지 선물)과 충무공이 수군을 사열하는 모습(요즘의 관함식과 같음)을 그린 대형 병풍이 있었다. 이 그림에는 삼도(경상, 전라, 충청)의 총 함선 숫자와 병력 등이 군 단위까지 망라되어 있어 당시의 수군 편제나 병력 등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충렬사 앞에는 명정샘이라는 2개의 우물이 있다. 일정(日井)의 日과 월정(月井)의 月을 합쳐 명정(明井)이라 지었다고 한다. 일정은 충무공 향사에만 사용하고 월정은 민가에서 사용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수량이 제법 많아 보인다.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는 좁은 물길로 모래와 자갈의 퇴적으로 반도와 섬이 거의 연결되어 있었다. 한산대첩 때에는 쫓기던 왜선들이 이곳을 물길인 줄 잘못 알고 도망쳐 들어왔다가 배가 갈 수 없자 땅을 파헤치고 물길을 뚫어 도망했다 하여 ‘판데목’ 또는 ‘판도목’(鑿梁)이라 불리웠다.

  이 판데목에는 돌다리(그 이전에는 나무다리)가 놓여 있어 사람과 말이 건너다녔고 다리 밑으로는 작은 배가 다녔다. 이후 일제가 다리를 허물고 운하를 파서 물길을  넓히고 운하 밑으로는 굴을 뚫었던 것이다. 일제가 이곳에 다리를 놓지 않고 굴을 판 것은 왜군들이 많이 죽은 지점 위로 걸어다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어쨌든 이 해저터널은 1927년부터 1932년까지 5년 넘게 걸려 완공되었으며, 개통 당시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로 한동안 통영의 명소였다. 현재 해저터널은 인도(자전거는 다님)로만 쓰이며, 동네 아이들의 인라인 스케이트 놀이터가 되었다.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제승당)


  임진왜란 전까지 한산도는 나라에서 쓸 말을 기르던 조용한 목장지였는데, 충무공이 통제영을 설치함으로써 국방요지로 자리잡게 된 곳이라고 한다. 섬 전체가 충무공의 유적지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한산도에 가려면 미륵도에 있는 도남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약 15분간 가야 한다. 한산도로 가는 배 안에서는 해설사가 한산대첩과 주변의 볼거리에 대해 재미있게 설명해준다.

  한산대첩은 임진왜란 3대첩 중에서도 가장 빛난 승전인데, 이 한산해전에서 충무공은 그 유명한 학익진으로 왜선 70여척 가운데 59척을 격파하였고, 아군은 배를 한 척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 한산대첩의 승리로 인해 조선 수군은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불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남해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왜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제승당 선착장에 내리면 약 1시간 가량 섬을 돌아보도록 하고는, 배는 해금강을 향해 떠난다.

  해안 산책길을 따라 약 1km 정도 걸어가면서, 충무공이 사용했던 우물의 물 맛도 보고, 잎이 손바닥같이 생긴 팔손이나무(손이 아니고 손가락이 8개)도 보면서, 나무숲의 내음을 맡으며 가노라면 곧 제승당에 도착한다.

  제승당 경내에는 중심건물인 제승당(制勝堂)을 비롯하여 충무사, 수루, 한산정 등의 여러 건물이 있으나, 모두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성역화 작업과 함께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제승당 건물 안에는 ‘한산대첩도’ 등의 그림과 거북선 모형, 총통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관람객이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수루(戍樓)는 일종의 망루로서 충무공이 자주 올라 왜적의 동태를 살폈다는 곳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라는 우국충정의 「한산도가」를 읊은 곳으로 유명하다. 수루에서 잠시 더위를 식히며 한산도 앞 바다를 내려다 보며 충무공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戍樓의 戍字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궁금하다.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 통영시 홈페이지 게시판에 문의해 두었다.

  한산정은 정자이면서 활터이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활터로 유일한 곳이라고 한다. 한산정에서 과녁 사이가 145m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하여 활쏘기를 수련하면서 실제 해전에서 적선과의 사정거리를 측정했다고 하니 새삼 충무공의 그  치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분위기에 젖는 것도 잠시 뿐, 주어진 1시간이 너무 짧아 대충 돌아보고는 서둘러 선착장에 다시 돌아와야 한다. 여유있게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빗방울도 뿌리고 시간도 늦어 여기에서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몇 년 전에 답사했던 고성의 송학동 고분을 찾아보았다. 이번에 찾아보니 고분 주변의 정화작업이 한창이었다.


  세병관?, 충렬사?, 제승당 등 이번에 찾아 본 곳곳마다 역대 통제사의 비석들이 많이 있었다. 예전의 것을 땅에 묻고 그 자리에 새로 세운 것들도 있었다. 역시 통영은 통제영(통제사)과는 뗄 수 없는 관계의 도시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답사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안, 의령 지역 답사기 (2003)  (0) 2007.06.08
포항 지역 답사기  (0) 2007.06.08
창녕지방 답사기  (0) 2007.06.08
양양, 강릉 지역 답사기  (0) 2007.06.08
삼백의 고장, 상주지역 답사기  (0) 2007.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