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음악 관련

임을 위한 행진곡

道雨 2007. 6. 13. 13:38
 

 

                임을 위한 행진곡

 


♪ 가사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백기완 작시/ 김종률 작곡)

 

 

 

 


♬ 해설

 

이 노래는 백기완의 [묏비나리](1980년 12월)에서 가사를 따 왔다. 원래의 시는 대략 이러한다.

 

   --- (상략)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리리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 (하략)

 

 


  이 노래는 광주 항쟁 때 시민군 대변인으로 도청에서 전사한 윤상원과 79년 겨울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숨진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굿 [넋풀이]에서 영혼 결혼을 하는 두 남녀의 영혼이 부르는 노래로 작곡되었다.

  기타와 괭과리의 반주가 함께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호탕하면서도 투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지금 우리가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라고 부르는 마지막 구절이 원래는 '앞서서 가나니'였다는 점은 이 노래의 맥락을 짐작하게 한다. 즉 두 영혼이 '우리는 앞서서 가니, 살아 있는 자들이여, 기운을 내어 뒤를 따르라.'고 독려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다짐하는 내용인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 초 광주항쟁의 패배감과 좌절감을 극복하고 승리의 의지와 투쟁적  역동성을 획득해낸 최초의 작품이다. 

  광주항쟁 직후인 1981년에 광주항쟁은 '항쟁'으로서보다는 '대학살'로 다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엄청난 죽음에 충격받고 주체할 수 없는 패배감과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자괴감, 죄의식에 젖어 있었고, 이러한 패배감과 자괴감은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까지 진보적 지식인들 속에 자리 잡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일찍이 그 패배감과 자괴감을 올바르게 극복해냄으로써 1980년대 새로운 노래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첫 녹음…“울면서 불렀다”

 

 

임영희(54)가 사회운동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70년대 중반 광주 수피아여고 다닐 때 광주일고에서 공모한 ‘무등문학상’에 당선되면서부터였다.

그는 문예운동가들과 어울려 기독청년운동과 학생운동에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대학 진학 대신 양림교회의 기독청년회원들과 신학을 공부하던 그는 78년 유신헌법 반대 유인물 배포와 이른바 ‘부활절 벽화’ 사건으로, 79년에는 간첩조작사건으로 연달아 끌려가 국가폭력을 경험했다.

그 후유증으로 3개월 동안 미음으로 연명할 정도로 심신은 피폐해졌고 아버지는 지역에서 전셋집을 얻기도 힘들 정도로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이 임영희의 민주화운동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당시의 임영희를 송백회 회원 홍희윤은 이렇게 말한다. “79년쯤인가, 해남에 살 때 어디서 예쁜 아가씨들이 막 와서 말이야… 겁도 없이… 밤새 사람들이랑 눈빛을 빛내면서 얘기하더라구. … 이뻤어, 아름다웠어. 정말 열정이 있었어.”

그러나 그 열정과 아름다움은 80년 5월항쟁 이후 폭도로 몰리고 오랜 도피생활에 지치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눌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 피어나지 못한 채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해 5·18, 임영희는 윤한봉이 소장인 현대문화연구소의 간사이자 극단 광대 단원으로, 작가 황석영의 작품 <한씨연대기>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19일 금남로 안쪽 골목에 있던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연습실에 있던 그는 공수부대원들이 맞은편 무등고시학원까지 쳐들어가 공부하고 있던 학원생들을 진압봉으로 구타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어린 학원생들의 머리에서 선혈이 쏟아져내렸다.

너무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모습에 뭐든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뛰쳐나간 그는 항쟁 초기 시위대와 합류해 항쟁 기지였던 녹두서점에서 만들어 온 화염병을 투척하거나 ‘투사회보’ 유인물을 나눠줬다.

그러다 도청이 접수되자 5월22일 이후부터는 투사회보 편집팀, 광대, 송백회 등과 함께 항쟁본부가 옮겨간 와이더블유시에이에서 궐기대회 준비물과 검은 ‘근조 리본’을 제작하며 조직적인 투쟁에 참여했다. 투쟁 지휘부가 꾸려지자 그는 기금 모금조를 맡았다. 그리고 도청에서 마지막 날을 맞았다.


» 임영희씨
‘나는 지금도 27일 그 새벽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이 없었고 그 적막감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유언이 될지도 모를 그 순간 방 안에 둘러앉아 최후의 막걸리 잔을 돌려마신 뒤 몇 푼 안 되는 돈을, 만약 살아서 이 자리를 벗어날지도 모를 사람들의 차비로 나눠주었습니다. 용준이도… (윤)상원이도… 그것이 마지막 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새벽 처절한 총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광주를 빠져나와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슬퍼할 수만은 없어서 도피해서도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과 ‘투사의 노래’ 테이프, ‘항쟁일지’ 제작 등으로 분주했다.

사태가 진정된 뒤 광주로 다시 내려와 부상자 현황 파악과 분류작업을 지속했다. ‘어떻게든 무엇이든 광주를 알려야 한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고 생각한 그는 술과 정신과 치료로도 달랠 수 없었던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안은 채, 그는 광주시민들이 폭도가 아님을 알리는 진실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81년 봄, 그 삼엄한 경계 속에서 연극 <누가, 검은 리본을 달았을까?>를 무대에 올렸다. 남도예술회관에서 황석영·홍성담·오정묵 등이 주도한 ‘광주를 위한 연극’이 처음 상연되던 날, 그는 홍성담이 제작한 항쟁 슬라이드 위로 김종률의 ‘검은 리본’이 울려퍼지던 마지막 순간의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오늘 검은 리본 달았지… 당신은 하얀 수의를 입었지만… 나는 오늘 검은 리본 달았지.’

 

그해 겨울 광주 운암동 황석영·홍희윤의 집 2층 서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처음 불러 녹음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오정묵이 첫 소절을 부르고, 그가 “산 자여 따르라”를 울면서 불렀다. ‘노동 열사’ 고 박기순과 ‘마지막 시민군’ 고 윤상원 열사의 영혼결혼식을 노래굿 형식으로 표현한 이 테이프는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에서 제작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패배의식을 떨쳐버리고 전진하는 새 노래가 탄생한 것이다.

“처음 녹음할 때만 해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 민주화 선봉에서 민중 애국가로 불려질 줄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오늘도 잠 못 드는 밤이면 혼자 이 노래를 부른다.

 

<정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

 

 

 

 * 해남 달마산 미황사 부도밭

 

 

 

 

 

        '임을 위한 행진곡' 배제된 '대통령 축사'
- 시민의 민주주의 5월정신 통시적 연대 끊으려는 권력의 욕망
 
최재천 변호사
‘고통의 연대.’ 몇 해 전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세계화를 모색하는 세미나에서 내놓은 개념입니다. 김 교수는 전시 성격이 강한 형식적 세계화 논의를 비판하며, 이와는 달리 광주의 영속성이 더욱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영속성을 위해 필요한 개념이 ‘고통의 연대’입니다.
 
‘고통의 연대’는 공시적인 차원과 통시적인 차원의 감성과 이성의 연대로 구분됩니다. 공시적 차원에서의 연대는 지역과 계층의 차이를 초월해서 5월 광주의 당사자들이 겪은 슬픔에 대해 공감하는 것을 말하고, 통시적 차원의 연대는 5월 ‘광주의 정신’을 부단히 현재화하기 위한 인식적 노력을 의미합니다.
 


지난 18일 망월동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행사가 두 군데서 열렸습니다. 정부가 주최한 자리와 5.18 기념행사위원회가 마련한 별도의 행사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정부가 주최한 행사에서 빠진 것이 주된 이유입니다. 저는 이 사건에서 ‘고통의 연대’를 두 차원에서 모두 단절시키려는 정부의 강박과, 정부의 의도를 감지한 시민들의 혜안을 생각합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월 광주의 상징입니다. ‘도청 앞 광장’도 ‘금남로’도 ‘전남도청’도 ‘망월동’도 80년 봄 광주시민들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만,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지역을 초월해서 계층을 초월해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장소라면 어디에서든지 불렸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중 몇몇은 5월 광주를 떠올리기 마련이고 노래를 부르는 맥락에 따라 ‘광주’와 ‘현재’를 접속시켰을 것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고통의 연대’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정부는 ‘연대’를 가능케 했던 매체, 즉 노래를 행사에서 지워버리고 대신 대통령 기념사에 이런 내용을 채워 넣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기폭제였다. 지금은 민주주의가 성숙돼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거리의 정치’와 ‘포퓰리즘’이 사라져야 한다.‘
 
68혁명이 ‘노동에 대한 불손’과 ‘게으름’을 낳았기 때문에 그 시대적 유산을 끊어야 한다던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됩니다. 아니 사르코지는 차라리 ‘직구 승부’를 했다고 할까요? 세계관이 다른 부분을 ‘역사적 단절’로 환치시키는 것이 어찌 ‘직구 승부’이겠습니까만, 적어도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빌어 ‘민주주의’의 전통을 단절시키자는 이상한 선동은 아니었으니까요.
 
대통령 기념사는 ‘연대의 아이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을 지워버리고, ‘시민에 의한 민주주의’라는 5월 광주정신의 통시적 연대를 끊으려는 현 권력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대통령의 참석여부에 대한 비판은 연대의 고리를 끊어버리려는 기도에 비하면 훨씬 비중이 작아야 합니다.
 
고민입니다. 진정으로 5월 광주, 아니 그 뒤로 이어진 수많은 의로운 죽음과 연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입니다. 스텐리 코언은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스탠리 코언 지음, 조효제 옮김, 창비 펴냄)에서 국가가 저지른 잔혹한 사건에 대해 대중들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외면한다고 합니다. 대중의 반응은 ‘그런 일은 없다’부터 ‘그럴만했다’까지 다양합니다.

코언은 이 반응들을 충격에 대한 회피라고 파악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폭력에 인권이라는 정의로 맞서는 것은 정직한 눈으로 참혹한 현실을 바라보는 용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많은 분들이 시민의식을 학습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하십니다. 공감합니다. 소위 국가와 시민사회의 ‘이중 민주화’가 필요하고, 시민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더 많은 인력과 자원이 시민의식 학습을 위한 교육에 들어가야 한다는 데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고통의 연대’는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민의식이 허약해지는 때마다 권력은 연대의 고리를 끊으려는 기도를 재차 삼차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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