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스크랩] `군사적 측면에서 본` 韓日 성곽 비교분석

道雨 2007. 7. 1. 15:20

 '군사적 측면에서 본' 韓日 성곽 비교분석

일본내 3대 성(城) 중 하나인 히메지성. 전쟁과 적에 대비하는 그들의 철저함을 역사의 현장을 통해서 알고,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해서 한국의 성과 비교하는 이 글을 씁니다.

역사기행면에서나 군사 부분에서나 히메지성 여행은 꼭 권장하고 싶습니다. 일본의 성은 "잔인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합니다. 같은 동양 유교문화권이면서도 일본의 성은 중국이나 우리와는 많은 차이점을 보입니다. 성곽의 요새화나 전투기법적 측면에서 보면 일본의 성은 오히려 서양의 성(Castle)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이와 대조되는 것이 중국의 만리장성(The Great Wall)입니다.

▼ 히메지 성안 입구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념석과 히메지 천수각


▼ 히메지시 관광안내소내에 전시된 히메지성의 모형입니다.


▼ 히메지시 관광안내소내에 전시된 히메지성의 모형을 다른 각도에서 본 것. 그 구조가 매우 입체적으로 되어 있으며, 성 입구에서 성의 중심인 천수각까지 가는데는 수많은 장애물과 차단벽으로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 전국시대(에도시대) 히메지 성과 성 주변의 모습을 가상하여 본 모형. 일본의 성 안에는 전문 무사(사무라이)집단만 출입(거주)할 수 있으며 평민과 완전히 구별된다. 사진의 성곽을 잘 보면 알수 있지만 마치 양파껍질처럼 2중 3중 4중의 방어시설로 꽉 차 있습니다.


▼ 히메지성내 천수각에 보관 전시되고 있는 히메지성 건축 기본 개념도. 해자의 모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 일본성의 특징중 하나인 해자. 적의 공격과 침입을 막는 1차적 방어책입니다. 서양의 중세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방어책이지요. 일본은 우리처럼 산성(山城) 중심이 아닌 평산성(平山城) 형태이므로 성 주변에 해자가 둘러쳐 집니다.


▼지금부터는 한국의 성을 소개합니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크게 산성과 도성으로 나눠 볼수 있는데, 아무래도 대표적인 것은 산성입니다. 험난한 지형을 이용한 축조물로 방어책으로서 옹성과 치성이 있지만, 전술적 개념으로 본다면 서양이나 일본의 성(Castle)과는 달리 만리장성같은 'Wall'에 가까워 보입니다.
'Castle'이 아닌 'Wall'의 구조이다 보니, 한 곳이라도 뚫리게 되면 치명적이 될 수 있는 약점이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성벽입니다. 모서리 부분과 다른 부분이 구조적으로 동일합니다.


▼우리의 축성방식과 일본의 축성방식에서 가장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성의 모서리 부분에 해당합니다. 아래는 일본 성의 전통적 석축(石蓄) 방식을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남한산성의 경우 모서리부분이 계단형으로 된 반면, 일본의 경우에는 모서리를 깎아서 각을 세워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의 크기도 다른 부분보다 월등히 큰 바위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 모서리 부분과 다른 부분의 차이점을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일본의 석축방식이다. 빈 공간이 없도록 잔 돌로 메우고 있습니다. 성벽을 타고 오르기 어렵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입니다.


▼남한산성의 성벽 모습. 모서리나 다른 부분이나 같은 석축방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수원화성의 모형을 통해본 일본 성과의 비교
18세기 실학자 정약용 선생이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수원화성의 모형입니다. 축성방법에서 기중기를 사용했다고 해서 유명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이 수원화성을 통해서 우리는 일본의 성과 또 다른 차이점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수원화성의 모형. 전체적인 모형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존 산성과 같은 'Wall'의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일본의 성과 비교했을 때 가장 다른 부분은 바로 성 안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 성 안에는 평상시에도 백성이 함께 살고 있으나 일본의 성은 성주(城主)와 호위무사 집단인 사무라이만이 기거했지요.
우리나라 성의 경우 그 기본 개념은 유사시 성밖의 백성이 성안으로 들어와서 농성전을 벌이는 개념입니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과 진주성에서의 농성전은 그 대표적 사례이지요. 병자호란 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 수원화성 모형 안에 보이는 초가집 민가 모형. 군과 민이 똘똘 뭉쳐 농성전에서 승리하면 다행이었으나 실패할 경우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전술적으로 사용한 산성 중심의 농성전은 사실 양동작전의 일환으로 적용했습니다. 적이 침략하면 청야작전을 통해서 농성전을 벌이는 한편, 후방에서 적의 배후나 보급을 차단하는 전법입니다.
그런데 이 전법이 조선시대에 와서는 전통을 무시하고 무작정 피난으로 변질되었으니, 문약(文弱)에 의한 국방 소홀의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수원화성 모형 가운데 옹성. 그런데 결정적으로 수원화성은 실전을 치르지 못했습니다.


▼ 수원화성은 예나 지금이나 성안에 관리와 백성이 함께 생활하는 조선후기 제 2의 수도로 정조대황의 행궁 역할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일본의 성과 한국의 성을 비교해 봤습니다. 석축 방법과 전쟁시 운영 방법면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저 히메지성의 심장인 천수각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도깨비뉴스 국방전문 리포터 고성혁 dkbnews@dkbnews.com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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