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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33〉

道雨 2007. 12. 31. 10:36
당군(唐軍)을 수장시킨 '문두루 비법'이란?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33〉사천왕사라는 절 (1)
  2006-08-21 오후 2:48:18

 

 660년 신라 무열왕이 당(唐)의 군대를 끌어들여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한 후, 당은 옛 백제 땅 부여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다. 663년 당은 신라마저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무열왕에 이어 즉위한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삼는 한편, 중국으로 데려갔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을 다시 귀국시켜 웅진도독으로 삼아 문무왕과 함께 서로 맹약을 맺도록 했다. 668년 신라와 당이 고구려를 멸한 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고구려 영역을 직접 지배하려 들면서 동맹국이었던 신라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신라도 고구려 부흥 세력을 배후에서 지원하여 당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백제 지역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옛 백제 땅에 대한 지배력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당은 신라에 대해 여러 차례 대규모 무력 공격을 시도했는데, 당의 공세가 본격화되던 무렵의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나온다.
  
  "총장(總章) 원년 무신(668년)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하였다. 그 뒤에 남은 군사가 백제에 머물면서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하는 것을 신라 사람들이 알아채고 군사를 내어 이를 대항하더니 당 고종(高宗)이 이 소문을 듣고 분노하여 설방(薛邦)을 시켜 군사를 동원하여 치려 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명랑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빌어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
  
  신주편 "명랑 신인"조에 나오는 위의 기사는 기이편 '문호왕 법민'조에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 경주시 배반동 낭산 기슭에 위치한 사적 제8호 사천왕사터의 금당터. 5, 6년 전의 사진이다. 일제 때인 1929년 처음 발굴된 이후 77년만인 올해 4월 재발굴에 들어갔다. 올해는 중심 사역(寺域)인 금당터와 서(西)목탑터에 대해 중점적으로 재조사를 벌인다. ⓒ프레시안

  "왕은 몹시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것을 막아 낼 방법을 물었다. 각간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요새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을 개설하면 좋겠습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했다.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명랑이 말했다. "채색 비단으로 절을 가설(假設)하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열두 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文豆婁) 비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하기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두 바다 속에 침몰되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의 한 대목을 연상했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제갈량이 연환계를 써서
조조의 군선(軍船)을 모두 묶어놓은 다음, 제단을 차려 동남풍이 불기를 기도하여, 동남풍이 불어오자 오(吳)의 장수 주유가 화공(火攻)으로 조조군을 대파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이들 두 사례에는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제갈량의 동남풍 기구(祈求)가 해마다 그 무렵이면 동남쪽에서 무역풍이 불어온다는 사실을 이용했던 것임에 비해, 명랑의 문두루 비법은 그와는 다른 차원의 종교적 의식(儀式) 행위였다는 점이 다. 문두루 비법은 『관정경(灌頂經)』이라는 밀교 경전에 나오는 주술(呪術)이다. 『관정경』에서는 문두루 비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내가 너를 위하여 대선(大仙)의 법을 말하리라. 만일 4부 대중 중에 사악한 귀신에게 홀려 털이 곤두서도록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몸을 상상하고 나서, 다음에 다시 천이백오십명의 제자들을 생각하고, 다음에 다시 여러 보살승을 생각하라. 이 세 가지를 상상하여 생각하고 나서 또다시 오방대신(五方大神)을 생각하라. 그 첫째는 단차아가(亶遮阿加)라 이름하는데, 그 몸이 장대하여 1장2척이고 청색 옷을 입고 청색 기운을 토하여 동방에 있다. 둘째는 이름을 마가기두(摩呵祇斗)라 하며, 그 몸이 장대하여 1장2척이고 적색 옷을 입고 적색 기운을 토하여 남방에 있다. 셋째는 이름을 이도열라(移兜涅羅)라 하며, 그 몸이 장대하여 1장2척이고 흰색 옷을 입고 흰색 기운을 토하여 서방에 있다. 넷째는 이름을 마하가니(摩訶伽尼)라 하며, 그 몸이 장대하여 1장2척이고 검정색 옷을 입고 검정색 기운을 토하여 북방에 있다. 다섯째는 이름을 오달라내(烏?羅?)라 하며, 그 몸이 장대하여 1장2척이고 황색 옷을 입고 황색 기운을 토하여 중앙에 있다." (…)
  
  
▲ 사천왕사터의 서(西)목탑터 심초석. 사리공에 물이 고여 있다. ⓒ프레시안

  부처님께서 천제석(天帝釋)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오방신의 이름이다. 만일 후대 말세에 4부 대중이 위험한 재앙을 당하는 날에는 위의 오방신왕의 이름과 그 권속들을 원목(員木) 위에 써놓고 문두루법이라고 하라. 그 이치가 이와 같으니 너희는 마땅히 행하도록 하라." 천제석이 물었다. "원목 문두루는 가로와 세로를 얼마쯤 되게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로와 세로를 사십구분(49分)으로 하라." 천제석이 물었다. "어떤 나무가 제일 좋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금과 은과 진보(珍寶)가 가장 좋고 다음이 전단목(?檀木)이나 온갖 잡향(雜香)이다. 그런 것들로 문두루의 형상으로 삼아라." (…)
  
  부처님께서 천제석에게 말씀하셨다. "이 문두루는 모든 귀신을 압착시켜 갈아 없애어, 망령되이 그른 일들을 행할 수 없게 한다. 이 문두루로 산을 찍으면[印] 산이 무너지고, 모든 수목을 찍으면 그로 인해 수목이 부러지고, 강이나 바다를 찍으면 그로 인해서 물이 고갈되며, 물이나 불을 찍으면 물이나 불이 그로 인해서 소멸된다. 만일 사방에서 돌풍이 불어 흙먼지를 날릴 때, 인(印)을 들어 그곳으로 향하면 곧 바람이 멈추고 불지 않으며, 인을 들어 땅을 향하면 땅이 움직인다."

  
  이러한 문두루 비법이 과연 어떠한 효과를 가져왔는지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기사들이 참고가 된다. 당군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몰리다가 마침내는 매초성 전투, 기벌포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는 것이다. 당시 신라와 당 사이의 전투 기사를 추려보자면 이렇다.
  
  
▲ 사천왕사터의 금당 뒤편, 단석(壇席)으로 추정되는 곳의 초석(礎石). 그 독특한 생김새로 보아 문두루 비법의 설행과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다. ⓒ프레시안

  "14년(674년) 봄 (문무)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니, 당나라 고종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로써 왕의 관작(官爵)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 김인문이 당의 서울에 있어, 그를 신라 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이필(李弼), 이근행으로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왔다.
  
  15년(675년) 봄 2월, 유인궤가 우리 나라 군사를 칠중성에서 격파하였다. 인궤가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니, 황제가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그 곳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한 사죄하니 황제가 이를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빼앗아 마침내 국경이 고구려 남쪽 지방에 이르렀고, 그 곳을 주와 군으로 만들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침범한다는 소문을 듣고, 구군(九軍)을 출동시켜 이에 대비하였다.
  
  가을 9월, 설인귀가 숙위(宿衛) 학생 풍훈을 향도로 삼아 천성(泉城)을 공격하였다. 우리 장군 문훈 등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 1400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설인귀가 포위를 뚫고 후퇴하여, 우리는 전마(戰馬) 1천필을 또 얻게 되었다. 그 달 29일, 이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하자, 우리 군사가 그들을 격퇴시키고 3만380필의 전마와 그 이외에 이에 상당하는 병기도 얻었다. 안북하를 따라 관문과 성을 건설하고 또한 철관성을 쌓았다.
  
  말갈이 아달성에 들어와 약탈을 하므로, 성주(城主) 소나가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 및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소수(小守) 유동이 전사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을 포위 공격하자, 현령(縣令) 탈기가 백성들을 이끌고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백성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또한 석현성을 포위하고 이를 점령하려 하자,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또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크고 작은 18회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6047명의 머리를 베고 2백필의 전마를 얻었다.
  
  16년(676년) 가을 7월에 당나라 군사가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해 와 함락시켰는데, 현령 거시지(居尸知)가 전사하였다. 겨울 11월, 사찬 시득이 수군을 이끌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우다가 패하였으나, 다시 크고 작은 22회의 전투에 나아가 승리하고 40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 일제 때에 부설된 동해남부선 철길이 사천왕사터 동북단을 관통하고 있다. 주춧돌이 허물어지지 않게 만들어 놓은 콘크리트 옹벽이 보인다. ⓒ프레시안

  동국대 김상현 교수는 '사천왕사의 창건과 의의'라는 논문에서, 문무왕을 비롯한 신라의 지배층이 대부분 불교를 신봉했으며,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신앙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예컨대, 문무왕은 '죽은 뒤 나라를 수호하는 큰 용이 되어 불교를 떠받들고 국가를 보위코자 한다'고 말했고, 김유신은 군사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기도를 하여 감응을 얻었다고 한다. 신라가 백제 땅에서 당군을 축출한 일로 김인문이 당나라 옥에 갇히게 되자, 신라 사람들은 인용사를 창건하여 그의 안전을 기원했다는 사실도 기록에 남아 있다. 김상현 교수는 문두루 비법 설행(設行)을 통해 표출된 신라인의 단합된 의지가 당나라 군사와 싸워서 승리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두루 비법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문무왕은 당의 침략에 대하여 문두루 비법이라는 응급처방으로 대처하는 한편, 명랑의 건의에 따라 사천왕사의 건립에 착수하게 되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9년(679년) 기사에 사천왕사를 낙성하였다는 짤막한 기록이 나온다. 문두루 비법을 처음 설행한 지 10년만에 사천왕사의 낙성을 보게 된 것이다.
  
  명랑은 사천왕사의 건립 장소로 낭산의 남쪽 신유림을 선택했다. 낭산은 신라 도성을 중심으로 동악 토함산, 서악 선도산, 남악 금오산, 북악 금강산 등으로 구성되는 오악(五嶽)의 중심인 중악(中嶽)이다. 또 '신(神)이 노니는 숲'이라는 뜻의 신유림(神遊林)은 신라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성소(聖所)로, 전불시대 7처 가람 중의 한 곳이었다. 그뿐 아니라, 낭산 정상에는 도리천(?利天)으로 비정된 선덕여왕의 능이 있는데, 도리천은 수미산의 중심으로 제석(帝釋)이 머무른다는 곳이다. 그리고 사천왕은 수미산의 네 방위를 수호하는 존재로 일찍부터 호법(護法) 혹은 호국신으로 여겨져왔다. 따라서 도리천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졌다면 사천왕사 일대는 사천왕천(四天王天)으로 비정되고 낭산 자체는 불교 성지인 수미산으로 관념되게 된다. 한 마디로, 사천왕사라는 절은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는 중차대한 시점에, 신라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지는 낭산의 신유림에 건립되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중대(中代) 신라에서 사천왕사가 차지하는 위치는 그보다 앞선 중고기(中古期) 신라에서 황룡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버금간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은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의 성전사원(成典寺院)에 관한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성전사원이란 왕실의 원찰(願刹) 성격이 강한 사찰로서 국가가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관원을 파견한 곳이었다. 『삼국사기』 직관지는 사천왕사, 봉성사, 감은사 등 7개소의 성전사원을 꼽고 있는데 사천왕사가 이들 성전사원의 첫머리에 꼽히고 있음으로 미루어 볼 때, 사천왕사의 사격(寺格)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김대식/서울디지털대 교수

출처 : 황소걸음
글쓴이 : 牛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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