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신라 최고의 화랑, 문노

道雨 2008. 1. 10. 15:43

 

 

 

             화랑 중의 화랑, 문노(文弩)



  우리는 흔히 화랑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사다함이고, 그 다음이 김유신과 김춘추 정도이다.

  그런데 정작 신라시대에 화랑 중의 화랑으로 가장 추앙을 받았던 사람은 8세 풍월주였던 문노(536-606)이다.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도 문노를 ‘사기(士氣)의 종주(宗主)’라고 추앙하였으며, 신라 왕실의 사당이 있었던 포석사(鮑石祠 : 우리가 흔히 포석정으로 알고 있는 곳)에도 문노의 초상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면 문노는 어떠한 인물인가?

  한 마디로 문노는 의리를 중시하고 술과 여자는 멀리한 화랑으로서, 호탕함과 함께 무사적 기질을 지닌 화랑정신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다.

  문노는 554년-579년 사이, 즉 아직 풍월주가 아니었던 신분인데도 낭도들을 거느리고 백제, 고구려, 북가야를 잇달아 쳐 큰 공을 세웠으나 상급을 받지 못했다. 이에 부하들 가운데 불평하는 자가 있자, 그들을 꾸짖으며 말했다.

  “대저 상벌이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이 날 우두머리로 삼았거늘 어찌 나의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

  문노는 후에 진흥왕이 급찬의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문노의 어머니는 가야왕의 딸 문화공주였다(혹은 왜국왕의 공녀라는 말도 있다). 사다함이 가야 원정을 떠나며 동행을 요청했지만, 문노는 “어찌 어미의 아들로 외가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 하고 의리를 지켜 거절한 의인(義人)이었다.

  사다함은 “나의 스승은 의인이다.”라고 문노를 평했고, 가야를 치면서도 부하들에게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주의를 주어 스승의 높은 뜻을 따랐다.

  부부관계도 타의 모범이 됐다. 어찌 보면 ‘공처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사소한 일까지 아내 윤궁에게 묻고 의논했다.

  또 마치 결벽증에 걸린 것같이 여자들을 목석처럼 대했다.

  “유화(遊花 : 풍월주에게 색을 제공한 여인들)로 더럽혀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무일유화지염].”는 화랑세기의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문노는 본래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부인의 권유로 할 수 없이 술을 조금 마시고, 침첩(枕妾) 한 명을 두었으나 난잡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문노는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아랫사람들을 사랑했고, 청탁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졌다. 이에 낭도들은 죽음으로 충성을 바쳤다. 이로써 사풍(士風)이 일어나 꽃피웠으니 통일대업이 그로부터 싹텄다고 하였다.


  필사본 화랑세기에서 전하는 문노에 관한 사항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8세 풍월주 문노


@ 문노의 어머니는 가야국의 문화공주 또는 야국왕의 공녀

  8세 풍월주 문노(文弩)는 비조부공(比助夫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가야국 문화공주(文華公主)다. 혹은 문화공주는 야국왕(野國王)이 바친 여자[貢女]라고 한다.

   문노의 어머니가 야국왕의 공녀라는 설은 당시의 국제관계를 밝혀 주는 단서가 된다. 야국 왕이 왜왕이라고 하면 왜국에서 신라에 왕녀를 공녀(貢女)로 바친 것이 되고, 그와 같은 공녀를 신하의 첩으로 삼도록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신라와 왜국이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한 단면임에 틀림없다.

  설령 문노의 어머니가 야국 왕의 왕녀인 공녀가 아니더라도 그와 같은 관계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밝힌 것은, 당시 신라인들이 신라와 왜 사이에 실제로 있었던 관계를 밝힌 것이 틀림없다.

 『호조공기(好助公記)』에는 ‘북국왕녀(北國王女)’라고 되어 있는데, 문노는 스스로 가야가 외조라고 말하였으니, 북국은 가야의 북국일 것이다. 법흥대제가 가야를 나누어 남ㆍ북으로 하였는데, 당시 신라의 세력은 가야 소국들을 남ㆍ북으로 나눌 정도였음을 잘 보여 준다.

  이뇌(異腦)를 북국 왕으로 삼고 양화공주(兩花公主)로 처를 삼았으며, 청명(靑明)을 남국 왕으로 삼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이뇌의 숙부인 찬실(贊失)이 이뇌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때 호조공(好助公)이 가야에 사신으로 가서 책망하였다.

  이보다 앞서 찬실은 야국 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문화공주는 생각건대 틀림없이 찬실의 딸일 것이다. 처음 호조공의 첩이 되었는데, 비조부공과 더불어 몰래 통하여 공을 낳았다.


@ 가야의 외손

  공은 어려서부터 격검을 잘 하였고 의기(義氣)를 좋아하였다.

  가야가 반기를 들자, 사다함이 동행을 청하였다. 문노가 말하기를 “어찌 어미의 아들로서 외조(外祖)의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하였다. 마침내 가지 않았다.

  나라 사람 중에 비난하는 자가 있자, 사다함이 “나의 스승은 의인(義人)이다”하였다. 가야에 들어가자 함부로 죽이지 말도록 주의를 주어 그 뜻에 보답하였다.

  세종이 (풍월주의 지위를) 잇자, 그 낭도가 그에게 속하였다.

  앞서 호조공이 가야의 일을 잘 하여 자주 사신을 갔다. 비조공(比助公) 역시 (그 뒤를) 이었는데, 공을 세워 청화공주(靑華公主)의 딸 청진공주(靑珍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청진공주가 법흥제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비조공은 요직에 발탁되었다. 그 권세가 일곱 총신과 더불어 막상막하였다.

  비조공은 형세를 잘 엿보아 몰래 영실공(英失公)을 따랐으며 신하로서 섬겼다. 건복(建福) 2년(585)이 되면 시간적으로 너무 늦다. 따라서 건복 2년은 건원(建元) 2년 (537) 법흥왕 24년이 타당하다.

  2년 (537) 제가 장차 영실공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왕위를 넘겨주려 하였는데,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비조공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아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총신 중에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소태후가 정권을 장악하자 비조공을 물리치고 등용하지 않았다. 비조공은 이에 영실공과 더불어 물러나 머무는 곳에서 … 바둑 따위를 두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문노)공은 스스로 …이 되어 가야파 일도(一徒)를 모아 …을 이루었다. … 자가 배척하고 비난하였다.


@ 불신지신(不臣之臣)

  옥진궁주가 …을 근심하여 … 화랑에게 보호하게 하였다. 이화공이 공을 사다함의 스승으로 삼고 낭도로 하여금 공경하여 받들도록 하였다. 지소태후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이화공이 “천자에게 아직도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신하[불신지신 : 불신지신(不臣之臣)은 신하로 여기지 않는 신하를 의미한다. 사다함이 문노를 생각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가 있는데,

하물며 선도는 지조가 굳고 인격이 결백하고 기품이 높으니 한 가지 법으로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신의 별파유군(別派遊軍 : 일정한 소속 없이 필요에 따라 아군을 지원하고 적군을 공격하는 군대. 또는 일정한 부서를 맡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

입니다”하였다.

  개국(開國) 4년(554), 공이 17세에 무력(武力)을 따라 백제를 쳤다. 공이 있었는데 보답을 받지 못하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5년(555) 북한(北漢)에 나가 고구려를 쳤다. 7년 국원에 나가 북가야를 쳤다. 모두 공이 있었으나, 보답을 받지 못하였다. 부하 중 불평하는 자가 있으면, 위로하여 “대저 상벌이라는 것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어찌 나의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하였다.

  세종이 6세 (풍월주)가 되자, 친히 집으로 찾아와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 없소. 청컨대 나의 형이 되어 나를 도와주시오”하였다. 말이 심히 간절하여, 공이 이에 굽혀 섬겼다.

  세종은 이에 (진흥)제에게 말씀을 드려 이르기를 “비조부의 아들 문노는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 데 여러 번 공이 있었으나, 어미로 인하여 영달하지 못하였으니[골품제 사회에서 모계가 가지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나라를 위하여 아까운 일입니다”하였다. (진흥)제가 이에 급찬(級湌)의 위(位)를 내렸는데, 받지 않았다.

  낭도 중에 금천(金闡)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백운(白雲)과 제후(際厚)를 위하여 사사로이 사람을 죽였다. 조정에서 벌주려고 하자, 세종공이 이르기를 “의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상은 가하나 벌은 불가하다”하였다. 이에 작(爵)을 주어 기렸다. 이로써 공의 낭도들이 많이 세종공에게 귀의하였다.

  사도황후 역시 이름을 듣고 몰래 도우며, 이끌어 자기 편을 삼았다. 세종공이 출정하자, 북한산에 따라가 고구려병을 여러 차례 무찔렀다. 미실 궁주가 불러서 봉사(奉事)로 삼으려 하였으나, 승낙하지 않았다. 진지(眞智)가 즉위하자 지도황후가 일을 꾸미고 발탁하여 일길찬(一吉湌)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 진지의 폐위와 8세 풍월주

  세종이 사도의 밀조(密詔)를 받고 장차 진지를 폐위시키려 하며 공을 불러 묻기를 “… 위에는 발탁하여 등용한 은혜와 또한 황후와 더불어 근친이 되어 … 조(詔)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하니, 공이 말하기를 “신은 … 명으로 …할 뿐입니다. 어찌 감히 사사로운 정을 돌아보겠습니까?”하였다.

  진지가 폐위됨에 이르러, 공으로 아찬(阿湌)으로 진급했고, 비로소 미실에게 총애를 받아 선화의 위(位)를 얻게 되니 곧 8세 풍월주였다.


@ 통일 대업

  공은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아랫사람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했으며, 청탁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므로 명성이 크게 떨쳤고, 낭도들이 죽음으로써 충성을 바치기를 원했다. 사풍(士風)이 이로써 일어나 꽃피었다.

  통일 대업이 공으로부터 싹트지 않음이 없었다. 삼국 통일의 대업이 문노의 화랑도가 가지고 있던 사풍(士風)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비록 『화랑세기』에는 화랑도의 활동으로 그와 같은 내용이 구체적으로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화랑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 낭도 부곡

  공의 때에 낭도의 부곡(部曲)을 두었다. 좌우 봉사랑(左右奉事郞)을 좌우 대화랑(左右大花郞)으로 만들고, 전방 봉사랑(前方奉事郞)을 전방 대화랑(前方大花郞)으로 만들어서 각기 3부(部)의 낭도를 거느리게 하였다.

  또 진골화랑(眞骨花郞), 귀방 화랑(貴方花郞), 별방 화랑(別方花郞), 별문 화랑(別門花郞)을 두었고, 12ㆍ3 살의 빼어난 진골(眞骨 : 골품제 신분의 진골 신분을 가리킨다) 및 대족(大族 : 진골과 같은 신분은 아니지만 세력을 갖고 있고, 문노와 같은 아찬 이상의 관등을 갖게 되면 골품을 얻어 진골로 될 수 있는 세력을 가리킨다)의 자제로서 속하기를 원하는 자로써 이를 삼았다.

  좌화랑(左花郞) 2인, 우화랑(右花郞) 2인을 두었으며, 각기 소화랑(小花郞) 3인, 묘화랑(妙花郞) 7인을 거느렸다.

  좌삼부(左三部)는 도의(道義)ㆍ문사(文事)ㆍ무사(武事)를 맡았고, 우삼부(右三部)는 현묘(玄妙)ㆍ악사(樂事)ㆍ예사(藝事)를 맡았으며, 전삼부(前三部)는 유화(遊花)ㆍ제사(祭事)ㆍ공사(供事)를 맡았다. 이에 제도가 찬연히 갖추어졌다.


@ 문노의 아내 윤궁

  3년간 (풍월주로서)재위하고 비보랑에게 전하였다. 공은 오랫 동안 아내를 맞지 않았다. 국선(國仙)이 됨에 이르러 윤궁낭주를 받들어 내원(內援)으로 삼았다.

  윤궁은 황종공(거칠부)의 딸이다. 그 어미는 곧 미진부공의 친누이였으니, 미실궁주와는 종형제간이 되었다. 함께 동륜태자를 섬겨 윤실공주를 낳았다. 과부로 5년을 살았다.

   홍제鴻濟 5년(576) 10월, 공이 지도황후의 명으로 국선이 되고, 윤공을 받들어 선모(仙母)로 삼았다.

  이에 앞서 공이 세종공을 모시고 출정했다가 돌아왔다. 세종공은 공이 아내를 맞지 않은 것을 근심하였다. 미실이 “나의 동생인 윤공이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데, 지위가 낮은 것이 걱정이다”하였다. 윤공이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데, 지위가 낮은 것이 걱정이다“하였다.

  윤궁이 듣고 말하기를 ”그 사람이 좋다면 어찌 위품(位品 : 신분을 논하지 않고 위품을 논한 것은, 일정한 위품을 갖게 되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헤아려진다. 특히 삼국 통일 이전 골품제 하에서는, 문노의 예와 같이 아찬 이상의 일정 관위에 오르면 골품을 얻게 되어, 진골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ㆍ고 시대는 골품 신분으로 모든 신라인을 편제하지 못하고, 그와 같은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을 논하겠는가?“하였다. 공 또한 듣고 기뻐하였다.

  공의 부제 비보랑 또한 윤궁과 종형제였는데, 공을 위하여 공을 계부(繼夫)로 맞이하도록 힘써 윤궁에게 권하였다.

   … “내가 비록 뜻이 있으나 다섯 가지 의롭지 못한 것을 어찌할 것인가. 비보(랑) …. 문노는 위가 낮다. 그러므로 윤실과 더불어 자(子) …를 꿇고 …. 나의 마음은 사철 내내 만족하지만, 지위가 낮으면 진종전군이 삼대의 영석(榮席)에서 나를 총애하니, 지금 늙어 … 사랑할 만한 것이 없으나, 누차 사람을 시켜 나를 부르는데, 정군(貞君)을 거절하고 다른 데로 가는 것이 세 번째 불의다. 압지가 재상의 신분으로 나를 마땅히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시집보내려는데, 거부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네 번째 불의다. 금태자가 형군(동륜태자)의 총애를 이으려는데, 거부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다섯 번째 불의다. 이 다섯 가지를 풀면 나는 문노에게 갈 것이다”하였다.

  비보가 돌아와 공에게 말하니, 공은 “낭주의 말이 옳다. 나는 기다릴 것이다”하였다.

  이 때에 진종(眞宗)이 이미 세상을 떠나자 사절四節의 의리가 끊어졌다. 공이 장차 크게 기용되려 하자 윤궁의 뜻이 자못 기울었다. 이에 공과 더불어 미실의 궁에서 서로 보았다.   공이 “우리 낭주가 아니면 선모(仙母)는 없으니, 내가 국선에 나아가지 못합니다”하니, 윤궁이 말하기를 “내가 군(君)을 그리워한지 오래 되어 창자가 이미 끊어졌습니다. 비록 골(骨)을 더럽힌다고 해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선모의 귀함입니까?”하였다.

  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나에게 국선이 영예롭다고 하나, 나는 스스로 선모의 영예를 가집니다”하였다. 윤궁은 이에 공에게 몸을 허락해 3자와 3녀를 낳았다. 대강(大綱)ㆍ충강(充剛)ㆍ금강(金剛)이라 하였다.


@ 윤궁의 충고

  윤궁은 밖으로는 비록 선모(仙母)였으나, 안으로는 실제로 부인이 되어 공의 일을 힘써 도왔다.

  공이 평소에 미실과 맞지 않았다. (이에) 윤궁이 간하기를 “군(君)은 세종전군의 신하인데, 미실궁주를 반대함은 옳지 않습니다. 전군(殿君)이 궁주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는 것은 군(君)이 나를 목숨처럼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군의 낭도가 만약 군을 옳다고 하고 나를 그르다고 하면 군은 어떻겠습니까?”하니, 공이 말하기를 “선모는 궁주와 같이 잘못이 없으니 낭도들이 어찌 비난하겠습니까?”하였다.

  윤궁이 이에 힘써 미실의 잘못을 감싸며 말하기를 “사람이 모두 장단과 과실이 있는 것은 형세가 부득이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군이 오랫동안 전쟁터 시석(矢石)에 있어서, 오직 강철 같은 심장만을 법으로 삼고 처자의 즐거움이 없는 것은 세상과 통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군의 아들을 가졌는데, 군이 한 마음으로 뜻을 굳게 지키고 권문에 거스른다면 이 뱃속의 아이는 장차 어떤 처지에 있겠습니까. … 아이의 좋은 아버지로서 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하였다


@ 대사(大私)와 공(公)

  공이 탄식하며 “… 의지와 기개로 선모를 받드는데, 선모는 세상일로 나를 감싸는 것 … 손은 사사로움입니다. 정(情)이 사사로이 행해지게 되면 의리가 감추어지게 되고, … 그렇지만 나의 선모가 신(臣)에게 허락한 뜻은 가히 죽음으로써 맹세한 것입니다. 차라리 … 무리를 … 할지언정 선모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사로운 인정에 끌려야 하겠소?” 하니,

  윤궁은 웃으며 말하기를

   “정이 아니면 군과 내가 어찌 색사(色事)로써 서로 범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의(義)는 정(情)에서 나오고 정은 지(志)에서 나오니, 세 가지는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큰 정은 의가 되고 큰 사사로움은 공(公)이 된다고 했습니다. 만약 무리에게 사사롭지 않으면 무리를 거둘 방법이 없습니다. 군은 어찌 일찍이 사사로움이 없겠습니까. 군과 더불어 동침한 밤에 나는 대철우(大鐵牛) 꿈을 꾸었는데, 반드시 호랑이 새끼를 낳을 것입니다. 그대의 영웅스러움으로써 어찌 좋은 씨앗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대중 또한 사람의 자식입니다. 남의 자식은 소중하게 여기고 자기 자식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자기를 손상시켜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역시 사사로움에서 나옵니다. 군과 더불어 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정의 순수함입니다. 무리들이 군에게 의지하는 것은 정이 섞인 것입니다. 청컨대 내 아이의 좋은 아버지가 되어 나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하였다.

  공이 크게 깨달아서 말하기를 “선모는 진실로 성인입니다. 신은 어리석을 뿐입니다”하였다. 이에 정이 더욱 두터워졌다. 공은 굽혀 미실을 섬기고 설원을 받아들여 주었다.


@ 문노의 자녀

  과연 대강을 낳았는데 후에 재상에 이르렀다. 충강 역시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금강은 가장 귀하게 되어 백성과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금강은 태종무열왕 2년(655) 정월에 이찬(伊湌)으로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삼국사기』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2년 춘정월). 그리고 태종무열왕 7년 정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금강의 뒤를 이어 이찬(伊湌)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삼국사기』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7년 춘정월). (상대등은 군신회의(群臣會議)인 대등회의(大等會議)의 의장으로 가장 높은 관직이다)

  윤강允剛)ㆍ현강玄剛ㆍ신강信剛은 모두 귀한 집안에 시집가서 영화롭고 귀하게 되었다. 윤궁의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 득골품(得骨品)

  공은 대강을 낳고 나서 사사로운 정의 진실됨을 더욱 크게 느끼고, 모든 일을 번번이 윤궁에게 물어서 행하였다.

  혹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초년의 기상이 없어졌다”하면 공은 듣고 웃으며, “나도 지난날 전군이 궁주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을 보고 흉을 보았는데, 내가 스스로 그렇게 되고 보니 알겠구나. 너희들 또한 스스로 당하면 알 것이다”하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공이 (진지왕을) 폐립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선화(仙花)가 되기에 이르렀다. 모두 윤궁의 내조가 많았다. 관위(官位)가 이찬에 이르러 비로소 골품을 얻으니(이는 아찬이 되어 윤궁과 같은 진골 신분이 된 것을 의미한다. 중고 시대에 골품 신분제의 운용 실상을 볼 수 있다. 당시 모든 사람이 골품을 가졌던 것은 아니나, 공을 세워 아찬의 관등을 갖게 되면 골품을 얻었다는 사실은 골품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삼국 통일 이후에는 신라인들이 골품 신분으로 편제되어, 신분적인 유동성이 크게 줄어든 것이 아닌가 한다), 윤궁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지아비가 될 날이 멀지 않습니다”하였다. 미실이 과연 제에게 청하자, 조(詔)를 내려 윤궁을 공의 정처(正妻)로 삼았다.


@ 포석사와 혼인

  진평대왕과 세종전군이 친히 포석사(鮑石祠 : 포석정이 포석사와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포석사에는 왕들이나 문노와 같은 중요한 사람들의 화상 등이 있음이 틀림없다. 『삼국사기』12, 신라본기 12 경애왕 4년 9월에는 견훤이 고울부(영천)에 침입하였는데, 겨울 11월에 왕경으로 쳐들어온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 때 경애왕은 비빈(妃嬪) 종척들과 함께 포석정에 가서 잔치를 베풀고 논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기록의 잘못일 것이다. 견훤이 가까이 쳐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포석사에 나아가 나라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고 빌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에 나아가 크게 …, 그리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늘 비로소 낭군이 되었으니 …의 귀함이 어찌 가히 이 경사에 미치겠습니까”하니, 윤궁이 말하기를 “첩의 몸은 … 이에 같은 골의 남편으로 갖게 되었으니, 결혼식을 해야 합니다. 어제 이전에 낭군은 첩의 신하였으므로 첩을 따르는 것이 많았으나, 오늘 이후 첩은 낭군의 처로써 마땅히 낭군의 명을 따라야 합니다”하였다.

  마침내 감히 다시 공과 다투지 않고 공의 명령을 힘써 따랐다. 검소하고 무리를 사랑하여,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낭도에게 주었다. 공이 종양을 앓았는데 입으로 빨아서 낳게 하였다.


@ 영웅과 주색

  공은 풍월주로서, 유화(遊花)로 인하여 더럽혀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집에 있으며 마음이 허락하고 조용한 모습이 마침 물수리와 원앙 같았다.

  양위함에 이르러 공은 윤궁과 더불어 늘 수레를 같이 타고 야외로 나가 노닐고 돌아왔다. 공은 본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윤궁이 일찍이 공에게 “첩이 듣건대 영웅은 주색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낭군은 술을 안 마시고 색을 절제하니 첩이 속으로는 부끄러워합니다”하였다.

  공이 웃으며 “색을 좋아하면 그대가 질투를 할 것이며, 술을 좋아하면 그대의 일이 많아 질 것이다”하였다.

  윤궁이 “장부는 마땅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지, 어찌 한 여자를 염두에 두겠습니까. 잠자리를 모시는 첩이 있으면 저의 일을 대신하게 되니, 기쁜 일이지 투기할 일이 아닙니다. 지아비를 위하여 일이 많은 것은 처의 영광입니다. 행하기를 청합니다”하였다. 공은 이에 술을 조금씩 마시고 침첩(枕妾) 한 명을 두었으나, 난잡한 적이 없었다.

  젊어서 지극히 방정하고 빈틈이 없었는데, 윤궁을 처로 맞이한 후로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화목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부인이 남자를 이렇게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부부를 말할 때는 반드시 공의 부처를 들며 말하기를 “지아비를 택하는 데는 마땅히 문선화(文仙花)와 같아야 하고, 처를 얻는 데는 마땅히 윤낭주와 같아야 한다”하였다.


@ 사기(士氣)의 으뜸

  포석사에 화상을 모셨다. 유신이 삼한을 통합하고 나서 공을 사기(士氣)의 으뜸(宗主)으로 삼았다. 각간으로 추증(追贈)하고, 관위를 각간으로 추증하여 올린 것은 그 일족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궁의 선단(仙壇 : 화랑들을 모신 제단이 아닌가 생각된다)에서 대제를 행하였다. 신궁의 기능 중 왕이 아닌 문노와 같은 사람을 위한 대제를 지낸 것을 볼 수 있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공은 건복(建福) 23년(606)에 세상을 떠났으며, 나이가 69세였다. 낭주는 이 해에 공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선(仙)이 되었다. 공보다 10살이 적었다.[또는 “낭주 또한 이 해에 공을 따랐다. 상선(上仙)은 공보다 10살이 적었다.”고 할 수도 있으나, 갑자기 상선보다 10살이 적었다는 사실이 나오는 이유가 이해하기 어려워 위와 같이 해석하였다.]


  찬하여 말한다 : 가야의 외손이고 사기의 으뜸으로, 선의 꽃이 되니 우리나라의 위엄을 떨치다.


@ 세계(世系)

  아버지는 비조부(比助夫)이고, 할아버지는 호조(好助)이며, 증조는 비지(比知)이다.

  호조의 어머니는 곧 등흔공(登欣公)의 누이인 조리(助里)이다. 또한 …이 되다.

  선혜황후는 묘심의 일로 폐하여 살게 되고 군(君)…. …감과 상통하여 비조부와 양화공주를 낳았다. 비조부 또한 호조공의 첩 문화공주文華公主와 통하여 공을 낳았다.

  문화공주는 북국 왕(北國王)의 딸이다. 또는 야국왕(野國王)의 딸이라고 한다. 역사 기록에 그 세계가 없다.






### 풍월주와 관련된 사실들

 

 세

 이름

재임기간 

재임 

년수

생존기간

 아버지 

 이름

 어머니 

 이름

 화주(처) 

 이름

 부제

 1

 위화랑

 540-?

 9

 

 섬진공

 벽아

 준실

 미진부

 2

 미진부

 ?-548

 

 아시공

삼엽공주

 묘도

 모랑

 3

 모랑

 548-555

 8

 

 법흥왕

보과공주(백제)

 준화

 이화랑

 4

 이화랑

 555-561

 7

    -603

 위화랑

 준실

숙명공주 

토함→사다함

 5

 사다함

  561

 546-561

 구리지

금진낭주

 

 설화랑

 6

 세종

 561-568 

 (572)

 8

 

 태종공 

 (이사부)

지소태후

 미실

 설화랑

원화

 미실

 568-572

 5

 

 미진부

 묘도

 

 

 7

 설화랑

 572-579

 8

 549-606

 설성

금진낭주

준화낭주

 미생

 8

 문노

 579-582

 4

 538-606

 비조부

문화공주

 윤궁

 비보랑

 9

 비보랑

 582-585

 3

 549-?

비대전군

실보낭주

세진낭주? 

덕명공주

 

 10

 미생랑

 585-588

 3

 550-609

 미진부

 묘도

 준모

 하종

 11

 하종

 588-591

 3

 564-?

 세종

 미실

 미모

 보리공

 12

 보리공

 591-596

 6

 573-?

 이화랑

숙명공주

 만룡

서현→용춘공

 13

 용춘공

 596-603

 8

 578-647

 금륜(진지왕)

지도태후

천명공주

 호림공

 14

 호림공

 603-612

 10

 579-?

 복승공

송화공주

 현강

보종공→유신공

 15

 유신공

 612-?

 10

 595-673

 서현

 만명

 영모

 춘추공

 16

 보종공

 ?-621

 581-?

 설화랑

 미실

양명공주

 염장공

 17

 염장공

 621-626

 6

 586-648

 천주공

지도태후

 하희

춘추공(흠순공) 

 18

 춘추공

 626-629

 4

 603-661

 용춘공

 마야

 문희

 흠순공

 19

 흠순공

 629-632

 4

 599-680

 서현

 만명

보단낭주

 예원공

 20

 예원공

 632-634

 3

 607-673

 보리공

 만룡

우야공주

 선품공

 21

 선품공

 634-637

 4

 609-643

 구륜공

 보화

 보룡

 양도공

 22

 양도공

 637-640

 4

 610-670

 모종공

양명공주

 보량

윤장→군관

 23

 군관공

 640-643

 4

 612-681

 동란공

석명공주

 천운

 천광공

 24

 천광공

 643-647

 5

 

 수품공

 천장

 윤화

 춘장

 25

 춘장

 647-652

 6

 

 염장공

 하희

천봉낭주

 진공

 26

 진공

 652-656

 5

 622-681

 사린공

 호명

 흠신

 흠돌

 27

 흠돌

 656-662

 7

 627-681

 달복

 정희

 진광

 흥원

 28

 오기공

 662-664

 3

633-681이후

 예원공

우야공주

 운명

 원선공

 29

 원선

 664-667

 4

 636-?

 흠순공

 보단

 

 

 30

 천관

 667-674

 8

 639-?

 군관공

 천운

(흠돌의 딸)

 

 31

 흠언

 674-678

 5

 645-?

 흠돌

 언원

(흥원의 딸)

 

 32

 신공

 678-681

 4

 649-?

 진공

 흠신

(흥원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