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농공상은 다 일하라
▣ 이덕일 역사평론가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서울의 노론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했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학파 또는 북학파라고 한다.
상공업 중심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물을 비교하면서 여러 가지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고등학교 국사> 314쪽)
△ 유수원은 나주벽서 사건에 연루돼 죽은 수많은 소론 인사들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조정에 간신이 가득하다”는 벽서가 붙었다고 알려진 나주객사 금성관. (사진/권태균) |
소론, 노론의 쿠데타를 막다
위 기술의 핵심은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은 노론 집안 출신들이 제기했는데, 그 선구자는 유수원이라는 것이다. 이 기술을 읽으면 ‘유수원=노론’이라고 인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유수원은 노론에 의해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였다. 노론도 어떤 업적을 남겼음을 강조하기 위한 구차한 기술에 불과하다.
유수원의 일생을 보면 학자의 역저 한 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우서>(迂書)를 남기지 않았다면 그는 당쟁 와중에 희생된 수많은 장삼이사 중의 한 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기 일쑤여서 그가 <우서>의 저자라는 게 알려진 것은 20세기 중반이었다. 1938년 시카타 히로시(四方博)는 ‘이조 인구에 관한 신분계급별적 고찰’에서 <우서>를 “저자 미상”이라고 썼는데, 1942년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가 ‘해학유서서문’(海鶴遺書序文)에서 <우서>를 유수원의 작품으로 언급하면서 유수원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영조실록> 13년(1737) 10월24일조는 <우서>가 유수원의 작품임을 명시하고 있다. 비국 당상 이종성(李宗城)이, “단양 군수 유수원이 비록 귀는 먹었지만 문장을 잘합니다. 책을 한 권 지었는데, 나라를 위한 경륜을 논한 것입니다. 헛되이 늙는 것이 아깝습니다”라고 말하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신 역시 그 책을 보았는데, 책 이름을 <우서>라고 합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영조는 승정원에 <우서>를 구해 올리라고 명령했는데, 영조도 읽은 <우서>가 작자 미상으로 알려진 것은 역사에서 패자의 짐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유수원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들이 몰락한 숙종 20년(1694) 출생했다. 이 무렵 집권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는데, 그의 집안은 소론이었다. 노론은 소론의 반대 속에서 장희빈을 사사하고 그의 아들인 경종까지 제거하려 했다.
유수원이 문과 별시에 급제해 조정에 나갔던 때는 숙종 44년(1718)이었는데, 한 해 전 세자(경종)의 대리청정 문제를 두고 두 당파는 크게 부딪쳤다. 숙종과 노론 영수 이이명(李頤命)이 꼬투리를 잡아 세자를 내쫓기 위해 세자 대리청정을 시키기로 합의했는데, 소론에서 격렬하게 반발했던 것이다. 병석의 숙종이 죽으면서 경종이 즉위했는데, <당의통략>은 경종에 대해 “그 바탕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웠으며 경사(經史)를 강론할 때는 어려운 것을 묻고 뜻밖의 의사표시를 많이 했으나 어머니의 변고를 당하고 나서는 근심하고 조심하는 것이 점점 심해지더니 잠을 자는 것도 처음과 같지 못했다”라고 전하고 있다.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을 국왕으로 삼기 위해 왕세제 책봉을 추진했다. 집권 노론은 경종 1년(1721) 소론 대신들이 모두 퇴궐한 틈을 타서 경종을 위협해 왕세제 책봉을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이때 경종은 서른넷,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열일곱에 불과했으므로 젊은 왕에게 왕세제 책봉을 주장한 것은 명백한 쿠데타였다.
이때 왕세제 책봉 취소를 주장하고 나선 인물이 유수원의 종숙 유봉휘(劉鳳輝)였다. 유봉휘는 경종 1년 8월 세제 책봉은 ‘한강 밖에 있던 대신들도 모르는’ 상황에서 결정된 것으로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노론에서는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이 모두 나서 세제의 지위를 흔든다며 유봉휘의 처벌을 주장했다. 소론에서는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왕세제 책봉 취소를 주장하는 것은 유봉휘의 잘못이지만 그 마음만은 ‘나라를 위하는 단충(丹忠)’이라고 절충을 시도했는데, 이는 유봉휘를 옹호한 것 같지만 왕세제 책봉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소론 강경파인 준소(峻少)의 큰 반발을 샀다.
사는 백성 중에서 선발해야
이런 상황에서 노론은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서 더 큰 풍파를 일으킨다. 결국 세제 대리청정을 밀어붙이던 노론은 소론 강경파 김일경(金一鏡)의 역습으로 정권을 빼앗기고 나아가 목호룡의 고변사건으로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이 사형당하는 신임옥사(辛壬獄事)를 맞는다. 이런 상황에서 세제의 지위는 인정하는 소론 온건파인 완소(緩少) 조태구가 영의정이 되자 준소는 세제 연잉군의 왕위 계승이 기정사실화될 것을 우려해 조태구를 탄핵하고 나서는데 공격수가 바로 유수원이었다.
경종 3년(1723) 2월 사간원 정언 유수원은 영의정 조태구가 민생을 파탄시켰으며 종제였던 조태채가 사형당하자 ‘천리 길에 짐바리에 가득한 부의물(賻儀物)을 보냈다’고 탄핵했다. 유수원의 상소에 대해 <경종실록>의 사관은 “유수원은 곧 유봉휘의 종질로서 혹자는 그의 지시를 따른 것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유봉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아니라고 맹세했다고 한다”고 적으면서도 “그 조카의 장주(章奏·상소)를 어찌 아는 바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 상소로 유수원은 예안과 낭천(狼川·화천) 현감 등으로 좌천되는데, 이런 와중에 1년 뒤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 유수원이 지은 <우서>. 그는 이 책에서 상공업의 진흥을 적극 주장했다. |
경종독살설 속에 즉위한 영조는 즉위 뒤 노론과 소론을 모두 포용하는 탕평책을 표방했다. 그러나 소론 강경파 영수였던 김일경을 사형시킨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속마음은 노론에 있었다. 영조 즉위 초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던 유봉휘가 영조 1년(1725) 경원에 유배됐다가 2년 뒤 끝내 배사(配死·유배지에서 죽음)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유봉휘의 조카였던 유수원의 처지 또한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으나 이런 정치보복에 대한 반발로, 또 경종이 독살당했다고 믿은 소론 강경파들이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자 영조는 소론도 끌어안기로 방침을 바꿨다. 그래서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지 않은 유수원은 영조 4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된다. 그러나 탄핵권이 있는 지평은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자리인데도 그의 이름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가 실제로 지평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영조 11년(1735) 홍문관 교리 조명택(趙明澤)이 ‘유수원은 공의(公議)에 저지당한 자’인데 관직 후보자로 의망(擬望·추천)한 것이 한탄스럽다고 상소한 것처럼 노론은 유수원이 관직에 의망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벼슬에서 소외된 그는 <우서>를 편찬하는 것으로 울적한 심사를 달랬다. <우서>는 이광좌·이종성 등 소론 대신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읽히다가 영조 13년(1737)에는 영조에게도 추천된다. 이는 소론 대신들도 글의 논지에 공감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소론의 정치철학을 짐작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유수원은 <우서>의 머리말 격인 ‘논찬하는 본지를 기록한다’(記論讚本旨)에서 “마음속의 울결(鬱結·응어리)을 펼 수 없으면 할 수 없이 글을 지어 자성(自省)하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마음속에 맺힌 게 있어서 <우서>를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수원은 <우서>에서 “백성이 그 직업을 잃었기 때문에 가난해졌고, 백성이 가난해졌기 때문에 나라가 텅 비었다”면서 사민(四民·사농공상)이 각기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의 사고가 획기적인 것은 지배층인 사(士) 계급에 대한 규정 때문이다.
그는 ‘학교에 적을 두고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치기(治己)와 치인(治人)의 법을 배운 연후에 출신(出身)해서 임금을 섬기는 것’이 사인데 동시대의 인물들과 달리 사를 선천적인 신분으로 보지 않았다.
“무릇 백성의 자제 중에서 준수한 자를 뽑아서 교육해 사를 선발한다”(‘문벌의 폐단을 논한다’(論門閥之弊))는 주장이 이를 말해준다.
양반 사대부 계급의 자식들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자식 중에서 준수한 자를 교육해 벼슬아치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의 사 계급을 군역에 종사하지 않고, 농공상에도 종사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거나 고리대 또는 노비 소송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자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나주벽서사건의 연루자로
무엇보다 그는 상공업의 진흥을 적극 주장했다. 그의 상공업 진흥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부상(富商)과 세약소민(細弱小民·가난한 백성들)의 결합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부상은 반드시 세약소민의 힘을 얻어야 액점(額店·상점)을 개설할 수 있다. 부상이 혼자서 경영할 수는 없다. 대저 작은 것은 큰 것에 통합되고, 가난한 자는 부자에게 예속되는 것이 사리상 떳떳한 일이다”라고 유수원은 강자와 약자가 서로 제휴하면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상과 빈상(貧商)의 제휴를 ‘동과’, 또는 ‘합과’라고 불렀는데, 요즘 말로 하면 대기업과 협력업체의 공생관계 같은 것이다. 그는 서울의 시전(市廛) 같은 상업시설을 작은 군읍에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농본상말(農本商末) 사고에 젖어 있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유수원은 영조 13년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이조판서 조현명(趙顯命)의 천거로 비변사 문랑(文郞·문과 출신의 당하관)이 된다. 그리고 소론 영수였던 조현명은 영조 17년(1741) 2월 유수원에게 영조를 직접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때 영조는 귀 먹은 유수원에게 주서(注書)에게 써서 보여주는 반 필담으로 대화를 진행했다.
‘귀머거리 맑은 대쑥’이란 뜻의 농암(聾菴)이란 호는 자신의 신체 상황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이때 유수원은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써서 바쳤는데, <우서>에 나오는 관제 개혁안을 보강한 것으로 추측된다. 유수원은 홍문관이나 승정원 같은 청요직도 3년을 주기로 승진시키자는 방안을 제시하는데, 이에 대해 영조는 “이 말은 옳으며 이 그림 또한 좋다”고 흡족해하면서 그를 비국 낭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영조 19년(1743) 우참찬 이덕수(李德壽)와 함께 <속오례의>(續五禮儀)를 편찬하는데, 이듬해 이덕수가 사망하고 대신 편찬 책임을 맡은 예조판서 이종성은 유수원을 체차하고 윤광소(尹光紹)에게 실무책임을 맡겼다.
이후 11년 동안 유수원에 대한 기록은 <영조실록>에서 사라진다. 그러다가 영조 31년(1755) 나주벽서사건의 연루자로 충격적으로 등장한다. 소론 강경파가 일으킨 나주벽서사건으로 수많은 소론 인사들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체포된 그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지 않는다. 윤혜(尹惠) 등과 함께 이 사건의 주모자인 신치운(申致雲) 등과 친했다고 시인하면서 묻지 않는 말까지 진술했다.
“매양 서로 만날 때마다 흉언과 패설을 김일경과 박필몽처럼 하였고, 때로는 김일경과 박필몽보다 더했는데, 신도 거기에 난만하게 수작하여 참여했습니다. 대개 신은 여러 역적 가운데 비단 흉적을 알 뿐만 아니라 이는 실로 당준(黨峻·강한 당론)의 마음에서 나라를 원망하기에 이른 것이며,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에서 항상 헤아리기 어려운 패설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영조실록> 31년 5월 25일)
장희빈 죽음부터 이어진 비극
이인좌 난의 주모자인 박필몽(朴弼夢)보다 더했다는 것은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경종에 대한 충성을 의리로 간직한 이들, 경종독살설을 사실로 믿은 이들은 영조를 끝내 임금으로 여길 수 없었던 것이다.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심악(沈鍔)은 “신은 유수원의 역절(逆節)을 나라를 향한 정성이라 생각하였고, 유수원의 흉언(凶言)을 대역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라고 답한다. 심악은 “유수원과 함께 죄를 입는다면 죽어도 기쁘겠습니다”라고도 말했다.
나주벽서사건으로 처형당한 인물은 무려 500명을 헤아리는데, 이 비극적 사건의 뿌리는 집권 노론의 장희빈 사사와 경종 독살에 있었던 것이다. 즉, 노론이 경종 대신 연잉군을 임금으로 택군(擇君)한 데 있었다.
유수원은 그 자신이 처형당한 것은 물론 가족까지 모두 연좌되어 집안 전체가 폐고(廢固)되고 말았다. 경종에 대한 충심을 간직했던 한 선구적 실학자의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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