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진

양산 향교와 효충사 답사사진 (2008. 1. 27)

道雨 2008. 1. 30. 15:58

 

 

     경남 양산의 양산 향교와 효충사 답사 사진 (2008. 1. 27)

 

 

 

 

* 홍살문 옆으로 담장을 잇대어 놓고, 반드시 홍살문 밑으로 들어가게 한 구조를 하고 있어 상당히 위압적인 느낌을 준다. 

 

* 담장 너머에서 바라본 향교의 모습. 정면의 누각(풍영루)이 시야를 가리며 역시 위압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 향교의 정문격인 풍영루의 모습이다. 건물의 위세에 비해 현판은 오히려 왜소해 보인다. 문을 굳게 닫고 있어 더욱 폐쇄적으로 보인다. 

 

 

 

* 문루 앞 옆으로는비석들이 늘어서 있다. 비석군 뒤로 보이는 건물은 유림회관?

 

 

* 풍영루 너머의 안쪽이다. 명륜당(강당)과 대성전(사당)이 보인다.  

 

 

* 양산 향교의 안내문

 

 

***  지역 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개방하는 것이 좋을 듯 한데, 문까지 닫아놓아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느낌을 주는 곳이다.

 

 

* 효충사 전경.

  효충사는 신라 때의 충신 박제상의 출생지에 세운 사당이다. 건물은 비록 단촐하고 왜소하지만, 만고의 충신 박제상의 출생지로서 관련한 의미는 자못 큰 곳이다.

 

 

 

* 현판도 초라하고 낡았으며, 마당의 계단도 시멘트로 발라놓아 영 볼품이 없다.  

 

 

 

* 마당 한쪽 편 귀퉁이에 있는 효충사 비석.

 

 

* 사당 안에 있는 박제상 영정과 위패.  유리 액자로 되어 있어 낯설다.  

 

 

 

* 박제상 영정과 함께 걸려 있는 백결선생의 영정과 위패.

  백결선생은 박제상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데, 거문고의 대가로서 방아타령과 관련된 설화로 유명하다.

  백결선생은 매우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 옷을 백 번도 넘게 꿰매 입어서 별명조차 '백결(百結)'이라고 했다는데, 영정 속의 옷은 어찌...

 

  또한 우리나라 위인들의 영정 그림들은 모두 엇비슷하니,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는 없는 걸까? 

  해남 녹우당에 있는  윤두서의 자화상 처럼, 개성이 뚜렷한 영정그림들을 또 볼 수는 없을까?

 

 

 

 

 

#  박제상 설화(朴堤上說話)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에 관한 설화. 박제상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왕자를 구한 뒤 자신은 죽음을 당한 인물전설이다. 
  그의 아내가 기다리다가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아내의 죽음 설화도 포함된다.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되어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왕제 보해(寶海 : 삼국사기에는 卜好)를 구하러 변복을 하고 가서, 왕의 추격을 무릅쓰고 같이 탈출하여 무사히 귀국하였다.
  다음에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왕제 미해(美海 : 삼국사기에는 未斯欣)를 구하러 가서 신라를 도망해 왔다고 하며 왕의 신임을 얻은 뒤에 미해를 탈출시키고 자기는 붙잡혀서 문초를 받았다.
  일본 왕의 문초와 설득에도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으며, 차라리 계림의 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이나 녹을 먹지 않겠다.라는 말로 계림 사람임을 주장한 뒤에, 발바닥의 껍질을 벗기운 채 불타 죽었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등장인물의 이름에 차이가 있고, 왕제의 부하 이름이 삼국유사에는 보이지만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사실상 부사(副使)가 따라간 것을 밝힌 것도 되고, 박제상이 귀환 활동을 할 때 협조를 얻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귀국할 수 있게 설정한 것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왕을 설득하였더니 순순히 왕제를 풀어 주었다고 하여 박제상의 언변을 중시하였고, 삼국유사
는 야간 탈출을 하였다고 해서 담력과 지혜를 중시하였다.
  두 기록 다 박제상이 집에 들르지 않고 즉시 일본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것은 부부나 가정의 정보다 국사가 더 중요하다는 박제상의 충성심을 드러내면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함께 드러낸 대목이다.
  그러나 이들 문헌은 박제상의 사실(史實)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민간설화 측면에서는 박제상 부인 편을 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남편이 집을 떠나자 몸부림쳐 울었고(그래서 望德寺 앞 모래톱을 長沙라고 함.), 만류를 뿌리치고 다리를 뻗고 울었고(그래서 그곳을 伐知旨라 함.), 일본에 간 남편을 치술령에 올라가 그리워하다가 죽어서 치술령 신모(神母)가 되었으며, 그 사당이 지금까지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삼국사기
보다 설화적인 증거를 많이 제시하고 있다.
  박제상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죽어서 망부석이 되었는데, 그곳의 주민은 아직도 부인의 정렬을 칭송하고 있다 한다. 다른 구전으로는 박제상의 아내는 죽어서
라는 새가 되고 같이 기다리던 세 딸은
이라는 새가 되었다고 한다.
  또 이들이 떨어져 죽은 치술령고개 밑에는
은을암(隱乙庵)이 있는데, 이 암자는 절벽에 떨어져 죽을 때 새가 되어 숨어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부인과 딸이 죽어서 새가 된 것은 새에게는 멀리 날아가서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날개가 달려 공간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이 새라면 바다를 건너가서 남편과 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으련만
……
하고 간절히 바라던 것이 사후에 새로 변신하여 성취되었다.
  죽음을 초월하면서 사랑은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며, 살아서 바다 건너로 떠날 수 없는 한을 죽어서 새가 되어 풀고 만난 점에서 한국인의 애정관이 절절히 표출된 것이다. 딸이 아버지를 만나려고 새가 된 것도 죽음을 건너 이어지는 부녀간의 사랑이다.
  이때 은을암은 박제상 처자를 모시고 기념하던 당으로서 망부석과 같은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 치술령의 산신이나 신모가 된 것은 주민이 박제상 부인을 존경하는 마음과 신앙심이 강조된 현상이며, 산신이 되었으므로 당연히 당이 지어진 것이다.
  이 설화에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충성심에 박제상 자신과 그의 아내와 딸의 인간적인 고뇌를 근거로 한 애정
·정렬·효도 등의 복합적인 윤리관
이 들어 있다. 구전설화 쪽이 더 인간적이며 가정적인 것은 물론이다.

 

 

 

***  백결선생(百結先生)
  생몰년 미상.  신라시대의 음악가로서 금(琴 : 거문고)의 명수.  경주의 낭산(狼山) 밑에 살던 빈한한 선비로 세사를 달관했던 인물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이름도 성도 알 수 없으며, 가세가 빈곤하여 늘 누더기옷을 입고 다녔는데 그 모양은 마치 메추리가 매달린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백결(百結: 백번을 기웠다는 뜻)선생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일찌기 영계기(榮啓期 : 사슴가죽 옷에 새끼띠를 매고 늘 금을 타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는 중국 춘추시대의 인물)를 흠모한 나머지 스스로도 금을 타며 인생의 희로애환을 모두 달래어갔다.
  어느해 세모를 맞아 이웃에서는 조粟〕를 찧어 별식을 마련하는데, 선생의 집안은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그의 아내가 이같은 가난을 상심하자, 그는 곧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무릇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매인 일이어서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부질없이 상심하는가.”라고 하며, 이내 가야금으로 방아찧는 소리를 연주하여 그의 아내를 위로해주었다.
  이때의 음악이 후세에 대악(碓樂), 즉 방아타령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  박제상과 그의 가족

 

  영해박씨(寧海朴氏) 족보에는 백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보이는데, 그의 이름은 박문량(朴文良)이며, 414년(실성왕 13)에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눌지왕 때 아버지 박제상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순절하자, 그의 어머니 김씨와 누나인 아기(阿奇)와 아경(阿慶)은 비보를 듣고 이내 자결하였고, 가운데 누나인 아영(阿榮)만이 남아서 백결을 양육하였다고 한다.

  그뒤 아영이 궁중으로 출가하자 그도 함께 입궐하였으며, 장성해서는 각간(角干) 이수현(李壽玄)의 딸과 혼인하여 관직에도 있었다.
  478년(자비왕 21) 모든 관직을 떠나 향리로 돌아갔는데, 이때 그는 〈낙천악 樂天樂〉이라는 귀향곡을 지어 불렀다고 한다.
  더없이 청렴하고 결백했던 그는 궁중으로부터의 일체의 후원을 거절하고, 스스로 궁색한 생활을 즐기다가 말년에는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백결선생은 대악과 낙천악(樂天樂)을 남겼다.

                                                                    

                                             -  영해박씨 족보에 근거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