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진

경주 용장사터 답사 사진(2007. 12. 30)

道雨 2008. 1. 4. 20:47

 

 

 

             경주 남산 용장사터 답사 사진 (2007. 12. 30)

 

 

* 경주의 여러 곳을 많이 돌아보았지만, 남산의 용장사터를 지금까지 가보질 못했기에 이번에 마음먹고 한 번 다녀왔다.

  사진으로만 많이 보아온 용장사터 석탑과 석불의 모습을 그리며, 용장골 마을로 들어와 계곡 첫자락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산에 올랐다. 보문리 절터에서 추위와 바람에 떨고난 후 오후가 되어서인지, 산에 오를 때는 별로 추운 줄 몰랐다. 오히려 여름철 더울 때 오르는 것보다 더욱 낫겠다 싶었다.

    

**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경주 남산(金鰲山) 용장사에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

 

 

* 보문리에서 용장사터로 가기 전에 명활산성에 들렀다.

 

* 명활산성 성벽(부분)

  보문단지에서 불국사 쪽으로 질러가는 길을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명활산성 안내판이 보인다. 오늘의 주 목표가 남산의 용장사터였기에, 이곳에서는 성벽위쪽으로 올라가 보고는 바로 내려왔다. 산성의 흔적을 살펴볼려면 나중에 다시 와봐야 할 것 같다.

* 명활산성은 경주의 동쪽을 방어하는 산성이다. 감포쪽에서 오는 적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 때 비담의 난이 일어났는데, 김유신은 월성에, 비담은 명활산성에 진을 쳤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  비담의 난


   비담의 난은 선덕여왕 때 상대등의 요직에 있던 비담이 ‘여왕폐위’의 기치를 내걸고 647년(선덕여왕 16년)에 일으킨 반란이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이 난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646년 11월에 상대등에 임명된 비담은 그 이듬해 정월 염종廉宗 등과 더불어 선덕여왕의 정치적 무능을 이유 삼아 군사를 일으켰다.

  반란을 일으킨 비담군은 보문호가 내려다보이는 명활산성에 진을 쳤고, 김유신이 이끄는 여왕의 군대는 첨성대 뒤편에 자리잡은 반월성에 진을 친 재 10여 일 동안 공방전을 벌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큰 별이 반월성에 떨어졌다. 이것을 본 비담은 “별이 떨어진 곳에는 반드시 피를 흘린다 하였으니 여왕이 패할 징조다”라고 말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비담의 말을 들은 반군들은 북과 꽹과리를 두들기며 승리감에 들떴다.

  그러자 김유신은 여왕을 안심시키고 동요하는 군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묘책을 짜냈다. 그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이고는 커다란 연에 매달아 허공에 날려보냈다. 이는 연이 사용된 최초의 기록이다.

  이튿날 동이 트자 김유신은 사람들을 시켜, 어젯밤에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자 여왕의 군사는 사기가 올랐고 비담의 군사는 실망했다. 김유신은 백마를 잡아 제를 올린 뒤 군사를 휘몰아 반란군을 공격했다. 반란군은 패하고 비담은 사로잡혔다. 김유신은 비담 등 반란 주모자의 9족을 멸하는 극형을 내렸다.

  이 비담의 난은 외형상 선덕왕의 폐위를 목적으로 하였지만 내적으로는 신라 지배권력 내의 치열한 정치투쟁이었다. 반란의 주모자 비담은 권력의 중추기관인 화백회의의 의장이었다. 그는 왕위계승자가 없으면 제1순위로 신라왕에 오를 수 있는 위치였다. 당시 신라의 왕가에는 성골 출신의 남자가 없었고, 게다가 당태종이 여왕을 폐위하고 남자왕을 옹립하라는 충고가 있은 후 알게 모르게 그러한 말이 화백회의 내에서 번져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급해진 것은 선덕여왕보다도 새로이 권력층에 편입된 김춘추와 가야출신이라는 태생적 결함을 지닌 김유신이었다. 실제로 비담 등이 주도한 화백회의가 열려 선덕여왕의 폐위를 결의한 직후 반란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반란군은 비담측이 아닌 선덕여왕측으로 뒤바뀐다.

  이것은 전혀 근거 없는 추리는 아니다. 당태종이 신라조정에 선덕여왕 폐위를 충고한 시기가 643년이었다. 당나라의 의견을 놓고 신라조정은 암투를 벌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645년 11월 비담이 상대등에 오름으로써 일단 여왕폐위파가 대세를 장악했다. 비담파는 여세를 몰아 화백회의를 통한 합법적인 여왕폐위를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정치. 외교와 군사면에서 실력자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극렬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두 세력의 충돌이 비담의 난으로 나타났다. 이 내란의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갑자기 사망하고,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해 선덕여왕의 사촌여동생인 승만이 진덕여왕으로 즉위했다. 선덕에 이어 진덕이란 여성이 신라왕으로 옹립된 것은 김춘추와 김유신이, 그들의 정적을 비롯하여 그 정적을 부추기는 당나라에 대한 강력한 대응의지의 천명이었다. 이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여 삼국통일의 쌍두마차가 된다.

 

 

 

 

 

* 서남산의 용장골로 들어가 주차시키고 올라갔다. 약 10여대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 용장골 계곡에 설치된 현수교. 설잠교라 이름하였는데, 설잠(雪岑)은 김시습의 법명이라고 한다.

  시간도 늦었고, 폰카메라 밧테리도 얼마남지 않아 ,계곡의 중간 중간 경치 좋은 곳이 많았는데도 사진을 찍지 못했다. 문화재 답사가 아니더라도 계곡의 경치와 맑은 물 만으로도 매우 훌륭한 등산코스가 되겠다.

  산이라 늦어지면 어두워질 것이 염려되어 쉬임없이 걸어올라갔다. 다른 사람들은 내려올 시간인데...

  다행히 날씨가 추운 탓에 땀도 나지 않고, 힘도 별로 들지 않았다.

 

 

 

 

* 용장사터.

  매우 작은 터이다. 암자 건물 한 채만이 들어설 만한 공간이다. 절터에는 두 개의 무덤만이 암자를 대신하고 있다.

  집사람의 머리 위로 조그맣게 석탑이 보인다. 

 

 

 

 

 

* 암자터에 자리잡은 두 개의 무덤.

 

 

 

* 탑이 있는 곳에까지 가려면 이런 줄을 타고 오르는 곳이 세군데나 된다. 오랜만에 유격훈련하는 기분 좀 냈다. 

 

 

 

                                      

 

* 용장사터의 삼륜대좌를 갖춘 석불좌상.

  특이한 대좌를 갖고 있다. 머리가 없어 안타깝다.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내내 혹시나 방치된 유물이 없나 찾아보게 되는 곳이 남산이다.   

 

 

 

 

* 삼륜대좌의 석불 옆 바위에 새겨진 마애석불 좌상.

  왼쪽 어깨 부근에 명문이있다고 해서 찾아보았는데, 알아볼 수가 없었다. 

 

 

 

 

 

 

 

 

 

 

 

* 석불이 있는 곳에서 바라본 남산. 

 

 

 

 

* 남산의 절벽을 기단으로 삼은 듯한 자태의 용장사터 삼층석탑. 

 

 

 

* 용장사터 삼층석탑에서 본 남산.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밧테리가 떨어져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했다.

 

** 용장사터는 암자가 제일 밑에 있고, 그 위로 절벽 위에 불상이 있고, 또 그 위로 절벽 위에 석탑이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중간에 석등의 받침이었을 듯한 석재도 보이고, 뭔가 인공이 가해진 듯한 돌들도 눈에 띄지만, 확실히 알 수 없다.

 

*** 용장골에서 삼층석탑까지만 갔다가 올라간 길로 다시 내려왔는데, 두 시간 정도 걸렸다.

 

*** 충남 부여의 무량사에는 김시습의 영정과 부도가 있다. 무량사는 김시습이 머물면서 만년을 보내다입적한 곳이다.

 

 

 

 

  

***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21세 때에 수양대군(후의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불교에 입문하여 만년을 무량사에서 보내다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김시습 부도는 일제시대 때 폭풍우로 나무가 쓰러지면서 함께 넘어졌는데, 그 때 밑에서 사리 1점이 나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