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진

부산박물관 야외전시물 사진 (2008. 2. 10)

道雨 2008. 2. 11. 11:00

 

 

 

                                    부산박물관 야외전시물 사진 (2008. 2. 10)

 

 

* 만덕터널 지나 오른편에 있는 만덕사터에서 옮겨온 고려시대의 만덕사지 삼층석탑.

  만덕사는 고려말 공민왕 때 왕위계승을 둘러싼 다툼의 희생양이 되었던 왕실사찰로 전해진다. 만덕사지에는 인위적으로 파괴된 대좌나 초석 등 흔적들이 남아 있다. 

 

 

* 조선시대의 석조 부도 

 

 

*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입상.

  신체의 크기에 비해 머리 부분의 길이가 길고, 돌의 재질도 달라 보여 본래의 제짝인지 의심스럽다.  

 

 

*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이는 석조여래입상 

 

 

 

* 합천의 삼가면에 있는 영암사터의 쌍사자석등 복제품이다. 

  영암사터는 절의 축대와 금당터, 탑과 건물의 초석, 귀부 등 많은 유물이 남아있는 폐사지로서, 훌륭한 답사처이다.  

 

 

 

* 동래부사를 지낸 유심의 선정비인데, 비석의 받침(귀부)이 해학적인 모습을 보인다. 비석을 세운 사람의 실명도 새겨져 있다. 

 

 

* 다리를 웅크리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거북의 얼굴 모습이 이채롭다. 

 

 

* 비석을 세운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놓고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얼굴 모습. 눈, 콧구멍, 입 등이 해학적인 모습이다. 

 

 

 

* 동래성 남문비. 많이 훼손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지만, 그 내용은 전해져와 옆에 새로이 복제품 비석을 만들어 세워놓았다. 

 

 

* 남문비의 이수 부분. 

 

 

* 구한 말 대원군 때 세운 척화비. 

 

 

* 약조제찰비.

**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석은, 1683년에 동래부사 윤지완과 쓰시마섬주가 왜관의 운영을 위한 금제조항 다섯가지를 제정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비석의 높이는 140cm, 폭은 68cm이며, 머리는 반달모양이고 재료는 화강석으로, 원래 초량왜관()이 있던 용두산공원 동쪽에 있던 것을 1978년 5월에 부산시립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1607년(선조 40) 수정도 부근의 두모포에 왜관이 설치되고 양국간에 국교가 정상화되자 왜관에는 쓰시마섬 관인과, 상주 왜인이 거주하게 되고 일본 상인들의 출입도 빈번해지면서 두 나라 상인의 접촉도 많아졌다. 이에 따라 밀무역, 잡상행위 등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났고, 정부에서는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여러 차례의 약조를 맺어 위반자를 엄히 단속하였다. 그러나 두모포에서 초량(용두산 일대)으로 왜관을 옮긴 후 왜관의 규모가 커지고 면적도 넓어져 왜인들의 범법행위가 심해졌다.

  이에 1683년에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윤지완이 돌아올 때 쓰시마섬에서 섬주와 함께 전문 5개조에 달하는 약조를 체결하였는데, 같은 해 8월에 양측은 약조를 각각 한문과 일본어로 명문화하고 비석에 새겨서 조선측은 수문 안에 세우고 일본측에서는 왜관의 경계선에 세워서 널리 알리게 하였다. 이때 조선측에서 세운 비가 지금 남아 있는 비석이다.

  비문의 내용은 ‘출입을 금한 경계 밖으로 넘어나온 자는 크고작은 일을 논할 것 없이 사형으로 다스린다. 노부세()를 주고받은 것이 발각되면 준 자와 받은 자를 모두 사형으로 다스린다. 개시()하였을 때 각 방에 몰래 들어가 암거래를 하는 자는 피차 사형으로 다스린다. 4·5일마다 여러 가지 물건을 공급할 때 아전()·창고지기·통역 등은 일본인을 붙들어 끌어내어 때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피차 범죄인은 왜관 문 밖에서 함께 형을 집행한다. 왜관에 있는 여러 사람은 만약 용무가 있으면 왜관 사직()의 통행증을 가지고 훈도와 별차가 있는 곳에 왕래할 수 있다.’ 등이다.

 

 

 

* 효암리 월경 전복채취 금령 불망비.

  정조 23년(1799)에 기장군 장안읍 효암리에 세워진 비석인데, 당시 경상좌병영(울산)에서 군사들이 지역 경계를 넘어와 진상품이었던 전복을 마구 채취하는 것을 금지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자연석에 글씨를 새겨 넣었다.

 

 

 

* 동래성에 있던 인생문 돌현판.

  인생문은 동래읍성에 있었던 6개 문 중의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이 문을 통해 피난 간 사람은 모두 살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으며, 왜군의 집중적인 공략 대상이 된 문이기도 하다.

  1995년, 동래구 칠산동에 인생문을 복원하여 놓았다. 

 

 

 

 

* 유원각선생 매안 감고비와 비각.

  돌로 된 비각이 이채롭다. 내가 이제껏 본 수많은 비각 중에서 돌로 만든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    유원각선생매안감고비라는 비석은, 조선후기 대일외교의 실무관청이었던 유원각과 관련된 유일한 금석문 자료로서, 아주 희귀한 비석이다.

  특히 이 비석이 주목받는 이유는, 비석을 보호하는 건물이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며, 비각의 형태나 결구 방식이 전통적인 양식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비석은 대일외교 창구 역할을 했던 부산의 지정학적 위치를 잘 드러내는 비석인 것이다.

 

 

 * 비석 상세부

  그런데 이 비를 세운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 설 명절기간이라 민속놀이용품을 갖다 놓았다.  투호

 

 

 * 윷놀이판과 윷

 

 

 

 

 

 

 

***  임진왜란의 발발과 부산 전투

 

            -  1592.4.14 부산진에서 임진왜란 시작

 

일본의 조선 공략 첫 번째 관문은 부산 방어의 최전선인 부산진이었다.
부산진의 지휘관은 첨사 정발로 당시 조선에는 종3품에 해당하는 절도사 밑에 첨절제사가 있었던 곳은 안동, 상주, 선산, 성주, 동래, 김해, 진주 등 7개 지역이었고, 수군첨절제사가 있었던 곳은 부산포진, 다대포진, 가덕진, 미조항진 등 4개 진이 있었다.
일본군의 내침 사실을 알게 된 부산진 첨사 정발은 경상좌수영의 박홍에게 보고를 하였고 박홍은 다시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보고를 하여 경상좌도 일대는 비상사태에 돌입하였다.
당시 부산포와 동래 일대의 병력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한 추정이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조선 초기의 기록을 참고하면 부산포에는 병선(兵船) 33척, 수군 1천7백79명. 그 휘하에 지금의 부산지역에 있었던 만호영(萬戶營)인 해운포진에는 병선 7척에 수군이 5백89명이고, 다대포진에는 병선 9척에 수군 7백23명이 있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기록에는 당시 부산진성의 조선군의 전력은 부산첨사 정발과 부사맹 이정헌 이하 약 1천 남짓이라고 나오는데 그 병력 전체를 관군으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 듯 하다. 그 이유는 우선 법제상으로 부산포의 병력은 약 500명이었으며, 일본군측의 기록에도 약 600여 명의 병사와 일반 백성들이 섞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산진성의 방어 준비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을 참조하였을 때 비교적 양호하였던 것 같다. 일본군을 따라 왔던 포르투칼 신부인 프로이스가 남긴 종군기에 의하면  성 앞에는 보병의 접근을 막기 위해 마름쇠가 많이 깔려 있었고 조선군은 철모와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여러문의 대포와 총통류의 개인화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개전 초기 조총에 대한 공포는 그리 크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니시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 1번대는 1592년 4월13일 전진 기지였던 쓰시마의 이즈하라항을 출발하여 그 날 오후 부산에 도착하였다. 날이 저물어서인지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인지 일단 바로 상륙을 시도하지는 않고 휘하 병력 일부만이 상륙하여 부산진성을 정찰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첫째 날은 지나갔다.
일본군의 상륙은 침입 둘째날인 1592년 4월 14일 새벽 6시경 우암동 방면에서부터 상륙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바닷길로는 부산진 앞바다를 통해 바로 상륙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굳이 우암동 방면으로 상륙하여 도보로 부산진까지 이동한 것은 상륙을 시도할 때 있을지도 모르는 조선군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개전 이전에도 전쟁을 막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했던 고니시는 정발에게 '길을 빌려' 주기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정발은 선조의 명령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사실상 거절하였다.
회담은 결렬되었고 고니시로서도 후속 부대인 제 2번대와 3번대가 상륙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전투를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부산진성 주위의 마을을 모두 소각시킨 후 성을 포위하였다. 전쟁 전 히데요시는 조선 백성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할 것을 명령하였지만 이런 명령은 개전 첫 전투부터 실종되었다.
전투는 약 세 시간가량 진행되었다고 하는데, 압도적인 병력상의 차이를 비롯해서 여러모로 부족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군이 의외로 분전하여 꽤 강력하게 저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이 함락되면서 정발 이하 조선군은 거의 전원이 전사하였고 성 안에서는 살육이 벌어졌다. 일본측의 기록에 의해도 '성이 함락된 다음 남자, 여자, 개, 고양이 할 것 없이 모두 살해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살육의 정도가 짐작된다. 일본군으로서도 첫 전투에서 오는 심리적 부담감이 컸을 것이기 때문에 파괴 행위 역시 과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동래 좌수영의 박홍은 모든 전투함을 자침시키고 군량창고에 불을 지른 후 수영을 버리고 퇴각하다가 멀리서 부산진성에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 이날 아침에 조정에 [부산진성이 함락됐다]고 장계를 올렸다.
이 후 박홍은 언양을 거쳐 경주로 도주(!) 했다.
 
4월15일 동래부성 전투동래는 당시 동래도호부로써 부산지역을 관할하는 행정의 중심지였다. 당시 동래부사에는 송상현이 임명되어 있었는데, 그는 정발과는 달리 문인 출신이었다. 원래 조선이 문민우의의 군사정책을 지키고 있던 나라였기 때문에 군사적 거점 역할이 강한 부산진에는 무인인 정발을 임명하고, 행정과 군사를 겸하는 동래부사에는 문관인 송상현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송상현이 동래부사에 임명된 것은 전쟁 발발 1년 전이었는데, 송상현 역시 정발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침입에 어느정도 대비한다는 뜻에서의 인사였다.
(그러나 송상현의 동래부사 임명에는 순수한 의도에서 출발한 것은 아닌 듯 하다. 송상현은 평소 바른 인품으로 당파에 휘둘리지 않아 미움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뭐, 어쨌든...)
송상현 역시 일본의 침입을 어느정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던 모양으로 부임한 뒤부터 방어력을 개선하는 데 노력하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경상좌도 지역은 비상 상태로 돌입하였고 이에 따라 울산 병영(蔚山兵營)에 있던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이 군사를 이끌고 입성하였다. 그 외 주변의 백성들 역시 모두 성 안으로 들어왔고, 양산과 울산의 군수도 각기 동래성에 입성하여 수비군에 합류하였다.
그런데, 일본군의 침입과 부산진성이 함락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이틀밖에 안되는데 양산과 울산에서 병력을 이동하여 동래성으로 들어오는데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데, 군의 소집과 이동이 하루만에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가능하다면 조선의 병력동원 시스템 자체는 그 당시에도 그다지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었다는 말이 아닐까... 초기 붕괴되었다고 여겨졌던 경상좌수사 박홍 역시 개전 소식을 듣고 휘하 병력을 긴급 호출하였고 이 병력 중 일부는 실제 소집에 응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어쨌든....
동래성의 지휘관들을 살펴보면  부사 송상현 이하 조방장 홍윤관 외에 좌병사 이각과, 양산군사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성등이었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일본군의 접근 보고를 받은 후 양산군수 조영규에게 군사 수 백명을 이끌고 중간에서 적을 막으라고 지시했는데, 조영규는 성 남쪽 4Km 까지 진출하였다가 "적의 군사가 수 만명이어서 도저히 싸울 수가 없다"며 후퇴하여 돌아왔다.
그러자 이각은 송상현에게는 성을 지키라고 하면서 자신은 밖에서 지원하겠다며 성을 빠져 나갔다. 송상현은 이각을 붙잡으며 함께 싸우자고 했으나 이각은 "나는 내 진영이 따로 있으니 이곳은 나의 관할 구역이긴 하나, 이 성을 지키는 것은 그대의 책임이다"라며 끝내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럴거라면 애시당초 왜 찾아왔는지 모를 일이다.
송상현은 그를 붙잡기를 포기한 채 홀로 성을 지킬 각오를 하였다.
고니시는 부산진을 함락시킨 14일 선발대를 보내어 동래성 주위를 정찰한 후 다음날인 15일 새벽 주력군을 이끌고 부산진을 떠나 오전 10시경에 동래성에 도착하여 부대를 3개로 나누어 일대(一隊)는 황령산 기슭에, 다른 일대는 동래성 서편의 대로에, 마지막 일대는 취병장으로부터 남문을 향하도록 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고니시는 무익한 전투를 피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조선군과의 협상을 모색하여, 송상현이 있는 남문 밖에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패목을 세우게 했고, 송상현은 곧 거기에 [싸우다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회답하였다.(유명한 일화죠...)
고니시는 송상현이 항복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 공격을 시작하였다.
송상현은 부산진 전투 상황을 보고 받았는지 두꺼운 통나무로 방어책을 만들었으나, 방패가 얇아 조총을 막아주지 못하였다. 조선군이 통나무를 이용한 방어물을 준비했듯이 일본군 역시 성의 공략을 위해 허수아비를 장수처럼 변장시켜 장대 끝에 꽂아 수비군을 유인하였다. 이것은 조선군의 주무기인 활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동래성 안에서는 백성들까지 수비에 가담하여 저항하여 한동안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듯 하였으나, 일본군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한 인생문(人生門)을 집중공격함으로써 방어선을 뚫는데 성공하였다.
일본군이 성 안에 들어오자, 부사 송상현은 조복(朝服)으로 갈아 입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다음, 가지고 있던 부채에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유시 한 수를 남겼다.
 
孤成月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大鎭不救   진을 구할 길이 없사옵니다                 
 君臣義重  
군신간의 의가 중하여 여기서 죽게 되니
             父子恩輕  
부모님의 은혜를 소홀히 하는 불효를 용서하소서
 
평소 송상현의 인품을 알고 있었던 대마도의 노리마쓰가 송상현에게 피신을 권했지만, 송상현은 이들을 꾸짖은 다음 일본군의 칼에 전사하였다. 일설에는 이 때 송상현의 첩이었던 김섬이라는 여인이 마지막까지 시중을 들다가 함께 살해당했다고 한다.(다른 일설에는 첩이 아니라 정실 부인이라고도 한다) 송상현의 소실 이양녀는 포로가 되어 일본까지 잡혀 갔다가 강화 회담 중에 송환되었다.
송상현의 의로운 죽음에 감복한 일본군은 그의 시신을 성 밖 북쪽에 안장하며 『朝鮮忠臣宋公象賢之墓』라는 모표를 세워주었다.
응원차 달려와 끝까지 함께 싸운 양산 군수 조영규, 송부사, 김희수, 대송백등도 함께 전사(그래도 이 분은 도망간 사람들과 달리 의리가 있다고 볼 수 있죠)하였고, 울산군수 이언성은 포로가 되었다. 이언성은 이후 고니시가 이덕형에게 자신의 편지(아마 평화협상을 위한 편지였을 듯)를 전해줘라며 석방시켜 주었으나, 포로가 되었던 것이 탄로날까봐 편지를 버리고 사실을 숨겼으나 훗날 강화회담 과정에서 이 일이 들통났다.
일본군의 종군승으로 따라왔던 덴게이가 남긴 [서정록]에 이날 동래성의 참상을 [목을 벤 게 3천여, 포로가 5 백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산진과 동래성 전투에서 일본군이 입은 피해는 전사 100여명에 부상자 400여명이라고 한다.
한편, 경상감사 김수는 진주에서 동래로 향하다가 도중에서 동래성이 실함되고, 일본군이 근접하였다는 보고를 받자, 각 지방에 격문을 돌려 백성을 피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 출처 : 임진전쟁 그 7년의 역사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