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진

수영 사적공원 사진 (2008. 5. 25)

道雨 2008. 5. 28. 12:25

 

 

 

             수영사적공원 사진 (2008. 5. 25)

 

 

 

 

 

 

 

* 언제든지 잠시 짬을 내면 다녀올 수 있는 곳, 우리가 사는 해운대에서 가까운 곳, 수영로타리에서 가까운 곳에 수영사적공원이 있습니다. 팔도시장 뒷쪽으로 좁은 골목길을 들어가야 하는데, 비교적 넓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어서 주차에는 용이한 편입니다. 

 

  망미동에서 토곡방향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 있는 '옥미아구찜' 에서 점심으로, 큰 아들 공진이가 첫 월급 탔다고 사주는 아구찜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수영사적공원에 들렀습니다.

 

  수영사적공원은 비교적 작은 공원이지만, 임진왜란을 비롯한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2점을 포함한 나무와 숲이 있고, 독도 문제와 관련이 많은 안용복 장군(?)의 사당과 기념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옛 수영성의 모습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수영야류를 비롯한 여러 민속놀이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기념관도 지어져 있습니다.

 

 

* 안내판 뒤로 보이는 숲이 수영사적공원 영역에 속한다.

 

 

 

 

* 부분적으로만 남아있는 수영성 성벽 모습.

 

 

* 25의용사 사당의 외부 모습.   문이 잠겨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다.

 

**  임진왜란 때 수영성을 지키며 왜적과 장렬히 싸우다 순절한 25명의 의로운 충절을 기리고 있는 제단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수사로 있던 박홍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때 수병(守兵)과 성민(城民) 25인이 성문 밖의 선서바위에 모여 피로써 맹세한 후, 바다와 육지에서 적을 상대로 7년간 대항하였다. 이러한 사연은 광해군 원년(1609) 지방민들의 청원으로 알려지게 되어, 동래부사 이안눌이 이 때의 일들을 모아『정방록』을 만들고, 이들의 집 문에 ‘의용(義勇)’이라는 두 글자를 써붙여 그 뜻을 기리도록 하였다. 순조 때에는 동래부사 오한원이 이들의 후손들에게 역(役)의 의무를 면제시키고 글을 지어 포상하였다.
  철종 4년(1853) 경상좌수사 장인식이 비를 세우고, ‘의용단’이라 이름하였으며, 제실·의용단을 설치하여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제사는 원래 좌수사가 주관하였으나, 고종 31년(1894) 관제개혁으로 좌수영이 폐지되면서 수영면의 면장이 이를 맡아하였고, 최근에는 수영기노회에서 제사를 주관하여 모시고 있다.

 

* 25의용사 건립비. 

 

 

* 예술관 안에 있는 안용복 장군에 관한 그림과 역사적 내용.

 
**  안용복 : 조선 후기의 어부.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일본에 확인시켰다.
  동래부 출신으로 동래수군에 들어가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했으며, 왜관(倭館)에 자주 드나들며 일본말을 익혔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일본어민이 울릉도에 침입하자, 이를 막다가 부하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때 에도 바쿠후[江戶幕府]에게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주장하여, 바쿠후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書啓)를 받았으나, 귀국 도중 나가사키[長崎]에서 쓰시마도주[對馬島主]에게 서계를 빼앗겼다.
  같은 해 9월 쓰시마도주는 예조(禮曹)에 서계를 보내 울릉도(일본명은 다케시마[竹島])에서 조선어민의 고기잡이를 금지시킬 것을 요청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히고, 외딴 섬에 왕래를 금지하는 공도정책(空島政策)에 일본도 협조할 것을 요청한 예조복서(禮曹覆書)를 보냈다.
  1696년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다시 일본어선을 발견하고 마쓰시마[松島]까지 추격하여 영토 침입을 꾸짖었으며, 스스로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이라 칭하고, 하쿠슈[伯州] 태수로부터 영토침입에 대한 사과를 받고 귀국했다.
  귀국 후 사사로이 국제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할 위험에 처했으나,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의 도움으로 귀양을 가는 데 그쳤다.
  1697년 대마도주가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보냄으로써 조선과 일본 간의 울릉도를 둘러싼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 수영야류에 쓰이는 탈들.

**  수영야류(水營野遊) 

  야류(들놀음)는 경상남도 내륙지방에서 행해지던 오광대가 바닷길을 따라 수영·동래·부산진 등에 전래된 것으로, 야류란 이름은 넓은 들판같은 곳에서 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오광대가 전문연예인에 의해 행해진 도시가면극이라면, 야류는 비직업적인 연희자들, 즉 마을 사람들에 의해 토착화된 놀이이다.
  수영야류는 정월 대보름에 산신령과 샘물, 그리고 최영 장군 묘에 제사를 지낸 후, 달이 뜨기를 기다려 행해진다. 약 200년전 좌수영 수사의 직책을 맡았던 관리가 초계 밤마리(현재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의 대광대패들을 불러다가 놀게 하였는데 부하들이 이를 보고 배운데서 시작된 것이라 전해진다.

  놀이는 양반춤·영노춤·할미와 영감춤·사자춤의 4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놀이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장소까지 행렬하는 길놀이를 한다.

   놀이가 끝나면 가면을 한 곳에 모아 제사를 지내고 불태우면서 행운을 빈다.

  등장인물은 수양반·둘째양반·셋째양반·넷째양반·종가도령·말뚝이·영노·할미·제대각시·사자·호랑이의 11명으로 다른 지방에 비해 적다.

  양반에 대한 풍자와 처·첩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민중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다른 야류하고는 달리 문둥이춤이 없는 대신 사자춤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수영야류는 약 200년의 역사를 가진 탈놀음으로, 제례의식적인 성격과 함께 사회성 및 예술성이 높은 귀중한 무형문화재이다. 

 

 

* 수영고당(水營姑堂) : 두 개의 신당을 합쳐놓은 곳.

* 옆에 고목(곰솔)이 있어 당산 신당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 하다. 

* 보통의 것과 달리 두 칸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한데, 오른쪽은 성주신당, 왼쪽은 독신묘라고 한다.  

  성주신당은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상징하는 토지의 신을 위한 것이고, 독신묘는 국태민안을 위해 군기(軍旗)의 신을 모시는 곳이라고 한다. 

  수영성이 군사적인 곳이다 보니, 두 신을 함께 모겨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수영성에 있는 두 그루의 고목(곰솔, 푸조나무)도 각각의 신(토지신, 독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 수영고당에 대한 안내판.

 

 

 

 

* 고당 옆에 있는 곰솔. 천연기념물 제270호이다. 

 

 

* 수영성 남문. 홍예 뒤로 보이는 큰 나무가 천연기념물인 곰솔이다.

 

 

* 수영성 남문 양 옆에 있는 동물상. 개로 보이는데, 크기가 작아 앙증맞게 보인다. 

 

 

* 역시 수영사적공원 안에 있는데, 500년 이상된 푸조나무로서, 천연기념물 제311호이다.

 

 

* 성 안에 있는 비석들.  

 

 

* 주로 수사(水使: 수군절도사)를 지낸 사람들의 공적비이다.

 

 

* 안용복 장군의 사당이다.

 

 

 

* 사당 오른편에 있는 안용복 장군의 기념탑.

 

* 안용복 장군의 동상. 사당 왼편에 있다. 

 

 

* 보통 사당은 개방하지 않는 곳도 더러 있긴 하지만, 이렇게 기념물(동상, 기념탑)에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 25의용단의 정문인 존성문(存誠門) 앞에서 기념사진 한 컷. 

 

 

***  수영사적공원은 우리 삶의 터전에서 가까운 곳이고, 수영야류나 어방놀이, 농청놀이 등, 우리네 삶의 모습이 살아있는 곳이다. 또한 역사의 자랑과 함께 아픈 흔적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곰솔과 푸조나무 등의 고목과 함께 숲이 우거져 주민들의 쉼터로도 인기가 좋다.

  돌아보는데 1시간도 채 안될 만큼 작은 구역이지만, 그래도 다양한 삶의 모습과 흔적을 볼 수 있어 반가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