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진

울산 동헌, 울산 향교, 울산 왜성 답사 사진(2008. 11. 16)

道雨 2008. 11. 19. 18:07

 

 

       울산 동헌, 향교, 왜성 답사 사진(2008. 11. 16)

 

 

 

 

 

 지도를 보면서 찾아가면 오래동안 기억에 남고, 주변 사정까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데,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여 찾아가보니 목적지에 가긴 가는데, 찾아가기까지의 과정이나 주변에 대해 도통 모르겠다.

노래방 기계가 나오면서 노래 가사를 외우지 못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몇 년 전에 울산 동헌을 다녀온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에 가 보니 주변 환경이 뭔가 달라진 듯 하면서, 느낌이 달랐다. 예전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면서, 과연 내가 여기에 왔었던가 하는 의문이 든다. 예전에 찍은 사진이 없었기에 더 그러한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 동헌으로 들어가는 쪽문.  정문격인 삼문의 왼편에 있다. 동헌에 드나들 때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운치가 있다. 

 

 

* 관아의 주건물인 동헌. 수령이 집무를 보는 곳이다.

 

 

 

 

* 이런 안내문 보다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세요'가 더 낫지 않을까요?  문도 열어두면 좋을 듯... 

 

 

* 동헌의 오른편에 있는 내아.  수령의 거처(관사에 해당)로서 보통 집무실(동헌)의 서쪽에 있어 서헌이라고도 한다.

 

 

* 동헌의 뒤쪽에 관내의 비석9선정비)들을 모아두었으며, 작은 정자를 두어 휴식할 수 있도록 하였다. 

 

 

* 비석군 

 

 

* 조선 초기(세종 때) 효자로 소문난 송도 선생의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홍살문과 정려비. 

 

** 송도(宋滔)는 연안송씨로, 조선 초기 울산에 살았던 효자이다. 선생은 울산지역 최초의 생원(生員)으로, 병든 부모를 10여 년 동안이나 정성껏 간호했다.

일례로 눈먼 어머니가 생선회를 먹고 싶어했으나 구할 수 없자 물가에 나가 얼음을 두드리며 울었더니 붕어가 뛰어올랐고, 제사에 쓸 제물이 없어 근심하자 꿩이 날아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1년 사이에 부모가 잇달아 돌아가시자, 몸소 흙과 돌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 6년간 유교식 예법에 따라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시고 새벽마다 배알하고, 때에 맞추어 제사지내는 시묘살이를 하였다. 당시까지 불교식 장례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송도의 효행은 매우 두드러진 것이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세종 10년(1428) 효자로 정려되고 표창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선생의 효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명(明)나라 신종(神宗)으로부터 어제시(御題詩)와 홍문(紅門)을 하사받았는데, 효문동(孝門洞)이라는 마을 이름도 그러한 사실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연안송씨 족보에는 정려비가 본래 효문동에 있었으나, 임진왜란때 파손되었기에 영조 13년(1737)에 울산도호부 서쪽 연못 인근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정려비 앞면은 ‘효자성균생원 송도지려(孝子成均生員宋滔之閭)’라 적었으며, 뒷면에는 송도의 효행을 기록하였다. 정려비 왼쪽의 깨어진 비석은 ‘강희임진(康熙壬辰) 팔월(八月)’이란 구절로 보아, 숙종 38년(1712)에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중구 우정동에 있던 비석과 비각을 2006년 동헌 및 내아로 옮겨왔다.

 

* 비각 기둥의 아랫 부분을 돌로 만든 것이 이채롭다.

 

 

 

* 울산 출신의 가수 고복수의 노래비네요. '타향살이'가 새겨져 있군요.

  고복수의 유명한 노래로 '짝사랑'도 있죠.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니......"

울산에서는 해마다 '고복수 가요제'가 열린답니다. 

 

 

* 울산 향교의 입구에 있는 누각입니다. 문을 잠가놓아 들어가 볼 수가 없어서 유감이네요. 

 

 

 

* 예전에 '학성'이라고 했던, 울산 왜성 안내도입니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울산 읍성의 돌을 가져다 쌓은 작은 산성입니다. 성의 일대가 학성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 울산 왜성

학성공원 입구에 울산 왜성 옛 지도가 있다.

이 지도는 조선 순조 32년(1872)에 간행한 영남읍지(嶺南邑誌) 중 울산부읍지(蔚山府邑誌)에 실려있다.

병영성과  서생포성이 크게 표시되어 있고,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학성과 증성이 있는데, 이 증성이 바로 울산왜성이다.

울산왜성의 본래 이름은 도산성(島山城), 또는 증성이다. 정유재란 당시 왜장 가토오기요마사가 뾰족하던 산을 50m 정도 높이로 갂고 울산읍성을 허물어 석재를 옮겨 쌓았다. 증성은 성 모양이 시루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 본성을 두고, 북쪽 아래에 제2성과 제3성을 차례로 두었다. 세 성벽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1,300m, 성벽높이는 10 - 15m 였다.

지형을 따라 깍아지른 듯 성벽을 쌓고, 그 위, 아래에 구멍을 내어 총을 쏠 수 있게 설계하였다. 왜병 16,000여명을 동원하여 40여일만에 완성하였다.

 

당시 왜군은 북상하다가 직산(稷山)에서 패배한 뒤 남해안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생포에 성을 쌓은 뒤, 지성으로 이 성을 쌓고 농성하였다.

성울 축조한 3일만인 선조 30년(1597) 12월 23일 조선*명 연합군이 성을 포위하여 열흘간에 걸쳐 왜군을 공격하였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어 양쪽 모두 수많은 사상자를 냈었다. 조선군 사망 1,000여명 부상 3,000여명, 명군 사망 4,800여명 부상자 6,000여명이었다. 왜군은 약 6,0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 학성공원

 옛날에는 바닷물이 학성공원밑에까지 들어왔다하는데, 학성(鶴城)은 신라의 계변성(戒邊城)이라 하던 성에 정유재란 때 왜장 가또 기요마사에 의해 새로 축성되었고, 후에 도산성(島山城)이라 불러왔다.

이 성을 학성이라함은, 신라말에 천신(天神)이 학을 타고 이 신두산에 내려와 고을 사람들의 수록(壽綠)을 주장하였다 하여 신학성(神鶴城)이라 하다가, 뒤에 학성(鶴城)이라 한데서 유래하였다.

학성공원은 1913년 추전 김홍조가 이 곳의 개인 소유지 23,141㎡을 사들여 흑송,벚나무.매화나

무 등을 심으며 공원으로 만들어, 이것을 개인소유로 하지 않고, 당시 울산면에 기증하면서 오늘날의 학성공원이 되었다한다. 공원내에는 봄편지 노래비, 충혼비와 시 문화재자료 제 7호인 울산왜성, 보물 제441호 태화사지 십이지상부도가 있다.

 

 

 

 * 울산 왜성의 정상부에 있는 '태화사터 십이지상부도'입니다. 보물 제441호.

 

 

**  태화사터 부도에 대하여

 

태화사터에 묻혀 있던 것을 1962년에 발굴하여 일시적으로 부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울산의 학성공원으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태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고려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시기에 없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남아있는 유물로는 이 부도가 유일하다.

일반적인 부도들과는 달리 널따란 바닥돌 위에 종 모양의 몸돌이 놓인 간단한 구조로, 바닥돌에는 앞면과 옆면에 가느다란 안상(眼象)이 움푹하게 새겨져 있다.
종 모양을 하고 있는 몸돌은 윗부분에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 입구를 만들고, 그 안쪽으로 깊숙이 파놓아 사리를 모셔 두도록 하였다.
감실 입구 아래로는 12지신상을 돌려가며 도드라지게 새겨놓았는데, 머리는 짐승이고 몸은 사람의 모습으로 거의 나체에 가깝다. 12지신은 띠를 나타내는 12동물로,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능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로 조각되어 세워지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에서 처럼 부도에 새겨지는 것은 보기 드문 예이다. 부도를 하나의 묘로 보아 이들을 새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종모양의 부도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지니며, 수법이나 조각들의 기법들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부도는 통일신라(統一新羅)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1962년 태화동 반탕골 산비탈에서 발굴된 것을 이곳에 옮겨 세운 것이다.

 

 

 


* 사진 정면의 조각은 원숭이, 왼쪽은 닭, 오른쪽은 양이다.

 

 

 

* 사진에서 감실 바로 아래가 말, 오른쪽이 뱀, 뱀의 오른쪽이 용이다. 말의 왼쪽은 양이다.  

 

 

* 네모난 지대석에 안상을 새긴 것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