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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령산 봉수대

道雨 2008. 11. 29. 15:08

 

 

 

                                                황령산 봉수대

 

 

 

* 지난 일요일, 동기생 남형우의 아들 결혼식이 벡스코에서 있었다.

  오전에 시간에 여유가 있어 시립미술관에 들렀는데, 비엔날레 행사가 끝나고 난 직후라 전시가 없어서, 황령산 봉수대를 가보기로 하였다. 

 

다리가 불편하여 걱정이 되긴 했으나, 차로 가면 많이 걷는 거리는 아닌듯 하여 올라가 보았다.

 

 

 

 

 

 

 

 

봉수대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글과 황령산 봉수대에 대해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황령산 봉수대


•소재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동 50-1번지


봉수는 횃불을 뜻하는 봉(烽)과 연기를 뜻하는 수(燧)를 말하는데, 대략 수십 리의 간격으로 바라보고 살피기 좋은 산꼭대기 요지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 중앙 또는 변경 기지에 급보를 알리던 군사통신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이미 봉수를 나타내는 기록이 보이는데, 특히 수로왕이 다스리던 가락국에서 A.D.48년(수로왕7년) 7월 27일에 허 왕후가 타고 오는 배를 보고 횃불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三國遺事 卷 第二 駕洛國記)


봉수대의 종류로는 경봉수(京烽燧)와 연변봉수(沿邊烽燧) 그리고 내지봉수(內地烽燧)의 3가지가 있는데, 경봉수는 서울의 목멱산(남산)에 설치된 것으로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되는 중앙 봉수를 말하는 것으로 다섯 개의 화덕이 있었다고 한다.


연변봉수는 국경선이나 바닷가 근처에 설치한 봉수로 최일선에 배치된 봉수를 말하며, 내지봉수는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로 직선봉수(직봉)와 간선봉수(간봉)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봉수대는 갑오경장을 계기로 1898년(고종 35년) 그 기능을 상실할 때까지 고려시대부터 사용 되어온 군사적 목적의 중요한 통신시설이었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황령산 봉수대는 1425년경(세종 7년)에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산포를 지키는 해안초소역할을 했던 황령산 봉수대는 간비오산 봉수대와 함께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연변(沿邊) 봉수대이다. 낮에는 짐승 똥을 사용하여 연기(燧)로, 밤에는 불(烽)을 밝혀 신호하되 평시에는 1봉, 적이 나타나면 2봉, 국경에 근접하면 3봉, 국경을 침범하면 4봉, 접전하면 5봉을 올려 동쪽으로는 해운대의 간비오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초량의 구봉 봉수대, 북쪽으로는 범어사 동북의 계명산 봉수대와 연결되어 최종적으로 서울 목멱산(지금의 남산)의 경(京) 봉수대까지 그때그때 상황을 전하는 부산 봉수망의 중심이었다. 각 봉수대에는 도별장(都別將) 1명을 두고 그 밑에 별장(別將), 감고(監考), 봉군(烽軍)을 두었는데, 황령산 봉수대는 동래부(東萊府)에서 맡아 관리하였고, 별장 10명, 감고 1명, 봉군 100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 조상들이 외적의 침략 때마다 불을 지폈던 이곳 봉수대를 우리민족의 항토수호의식과 국토방위정신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1976년 10월에 복원하였으며, 2000년 6월 훼손된 기능을 회복시키고 주변 정화사업을 실시하여 현재에 이른다.

 

 

 

 

 

* 황령산 봉수대.  굴뚝은 5개 모두 중앙에 일렬로 설치되어 있고, 불을 때는 화구는 중앙에 3 개가 설치되어 있고, 좌우측 돌출부에 하나씩 있다. 전체적으로는 'ㄷ' 자 모양이다.  

  사진 중앙 약간 우측에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해운대에 있는 장산이다.

 

 

 

*  황령산 봉수대에서 해운대 쪽을 바라본 것인데, 산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고층건물들은 수영만에 있는 것들이다.

** 내가 사는 해운대의 동네 뒷산에 간비오산 봉수대가 있는데, 이곳 황령산에서 올려진 봉수가 간비오산 봉수대를 거쳐 기장 쪽으로 연결된다고 하였는데, 간비오산 봉수대가 너무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간비오산 봉수대가 해안을 지근거리에서 감시하는 역할을 했을지 몰라도, 황령산에서 기장 쪽으로 전달하기에는 장산 정상을 거치는 것이 훨씬 나을 듯 한데, 장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없었는지....  

 

 

 

 

* 황령산 봉수대의 안내문. 

  검은 돌에 글씨를 새기고 흰 칠을 해놓았는데, 흰 칠이 고르지 않아 보기에 좋지 않다.

 

** 원래 글씨를 새길 때,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일일이 정으로 쪼아 새기면, 흰 칠을 하지 않아도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기계를 사용하여 글자를 새기기 때문에 흰 칠을 하지 않으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흰 칠을 자주 하여야만 하는 관리상의 번거로움과, 흰 칠이 군데군데 벗겨지고, 진하고 옅은 차이가 있어서 글씨를 읽기도 불편하고, 지저분한 느낌을 주게 된다.  

기계를 사용하여 글씨를 새기는 것이 비용상으로는 저렴하게 들지만, 오랫동안 관리하는 비용(덧칠 등)을 생각하면 꼭 절약되는 것도 아니다. 

 

*** 조각을 하는 미술학도들이 이렇게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글씨를 새기는 것을 배우면, 나중에 부업(?)으로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한다.  

 

 

 

 

* 봉수대까지 올라온 등산객들이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 

 

 

 

* 황령산 봉수대에 올라온 기념으로 사진 한 컷 김여사. 

 

 

 * 햇볕이 너무 눈부셔서 눈을 뜨지 못하는 나.

  다리가 아파 지팡이를 짚고 오르기는 했지만, 차에서 내려 10분이면 되는 거리라 큰 부담은 없었음.

 

 

** 그런데 황령산 등산객들은 재미없는 아스팔트 길을 걷는 것인가 의문이 드네...

 

 

 

 

***   봉수제도에 관하여 좀 더 살펴보자.

 

                           봉수제(烽燧制)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변경의 신급한 정세를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써 신속하게 중앙에 전달하는 일종의 군사통신제도.

 봉수제의 유래는 중국에서는 후한 광무제때에 이미 상당히 정비된 봉수제도가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것으로 짐작되나 확실한 것은 고려 의종(毅宗) 이후부터이다. 즉 1149년(의종 3)에 서북병마사 조진약의 상주에 의하면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평상시에는 1번 올리고, 2급에는 2번, 3급에는 3번, 4급에는 4번씩 올리도록 하고 각 봉수대에는 방정 2명, 백정 30명을 배치하며, 그들에게 평전을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봉수제는 조선 세종때에 이르러 보다 발전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즉 세종은 집권 초기부터 봉수의 거수, 봉화군의 정원 등 여러 규정을 정비하고, 연변 봉수의 연대 축조, 봉수망의 획정 등 체제를 정비. 강화하였다.

조선의 봉수는 그 시설상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 봉수인 서울 목멱산의 경봉수, 해륙·변경의 제일선에 위치하여 연대라 호칭하던 연변봉수, 경봉수와 연변 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의 셋으로 구분되었는데, 연변봉수의 임무 수행이 가장 고되었으며, 내지봉수는 중간봉수로서 수적으로 가장 많았다.

 또 봉수는 직봉과 간봉으로 구분되는데, 직봉은 기간 선로상의 것이고, 간봉은 그 보조선이다. 봉수대에는 봉수군과 오장이 배치되어 기거하면서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봉수군은 주야로 후망하는 고역을 직접 담당하였고, 오장은 대상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봉수군을 통솔하고 봉수대의 이상유무를 수령에게 보고하였다.

 

봉수군은 초기에는 봉화간이라고도 하여 신량천역(身良賤役;양인과 천인의 중간)에 속하였으나 봉수의 역이 고달프고 갈수록 신분이 낮아져, 후기에는 이른바 칠반천역의 하나로 꼽혔다.

 

봉수대에서는 거수를 달리하여 정세의 완급을 달리했는데, 평상시에는 1거, 왜적이 해상에 나타나거나 적이 국경에 나타나면 2거, 왜적이 해안에 가까이 오거나 적이 가까이 오면 3거, 우리 병선과 접전하거나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왜적이 상륙하거나 국경에 침범한 적과 접전하면 5거씩 올리도록 하였다.

만약 적침이 있을때 안개·구름·비·바람 등으로 봉수가 불가능 할 때는 포성과 각성으로 주위의 주민과 수비군에게 급보를 알리고,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까지 도보로 알리기도 하였다.

 

서울 남산에 있는 5개의 봉수대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병조에 종합 보고하는 종점이었다. 병조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에 보고하여 임금에게 알리고, 변란이 있으면 밤중이라도 즉시 승정원에 보고하였다. 봉수는 동서남북의 어느 변경에 위치한 봉수대에서 올린 봉화이든지 약 12시간이면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봉수군의 태만, 봉수대의 관리 소홀로 불거·불통되거나 전달 소요 시간이 너무 지연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에 대한 여러 처벌 규정이 마련되었다.

 

조선시대 봉수망은 전국의 주요 간선로를 5로로 나누어 이를 직봉이라 하였는데, 이는 동북 두만강변의 우암, 동남 해안의 응봉, 서북 압록강변의 여둔대와 고정주, 서남 해변의 돌산포를 기점으로 하여 서울의 목멱산의 5개 봉대에 도달하였다.

즉 남산 봉수에 있는 5개소에서는 동쪽에서부터 제1거(~서울간 직봉)가 영안도(함경도)로부터 강원도를 거쳐 양주의 아차산에 이르는 봉수, 제2거(동래~서울간)는 경상도로부터 충청도를 거쳐 광주 천림산에 이르는 봉수, 제3거(강계~서울)는 평안도 강계로부터 내륙으로 황해도를 거쳐 한성 무악 동봉에 이르는 봉수, 제4거(의주~서울간)는 평안도 의주로부터 해안으로 황해도를 거쳐 한성 무악 서봉에 이르는 봉수, 제5거(순천~서울간)는 전라도로부터 충청도를 거쳐 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봉수이다.

봉수대간의 거리는 변방 제일선의 연대가 그 중요성에 비추어 10~15리 이하로 조밀하게 배치되었고, 내지봉수로 옮겨 갈수록 거리가 멀어지는데, 평상시 낮에 연기로 신호하는 서울에서 먼 주수지역은 20~30리 간격, 서울에 가까운 야화지역은 40~50리 정도가 기준이었다.

 

 

* 윗 글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봉수는 서울로 전달하기 위한 일방통행식(상향식)의 경보(또는 평상)전달체계인 듯 싶다.

 그리고 봉수가 시작된 곳이 5개 방면(두만강, 압록강2, 경상도 해변, 전라도 해변) 중의 어느 곳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는 알 수가 없으니, 이것에 대해서는 별도의 보고체제(사람이 직접 가서 전하는 문서보고나 구두 보고)를 가졌을 듯 하다.  

  그러므로 봉수는 경보(전투 혹은 전쟁)를 신속하게 전하는 보조수단으로서 운용하고, 상세한 내용은 사람이 직접 그 내용을 전하는 체제(역마를 이용하는 등)로 운영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