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어느 빵점 남편의 변명

道雨 2008. 10. 2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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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빵점 남편의 변명

 

 

 

오늘 아침, TV ‘아침마당’ 프로그램을 보고,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적어 본다.


아내가 아이를 출산할 때, 남편이 현장에 없었다는 것에 대하여, 아내들이 매우 서운하게 느끼는 감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한 패널이 사례를 들어 얘기하는데, 큰 아이 때는 진통이 너무 길어져, 식사를 못했기에 잠시 짜장면 먹으러 나간 사이에 출산을 했다고 하며, 둘째 때는 병원 인근에 방을 잡아놓고 대기하던 중, 따뜻한 방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린 사이에 출산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고두고 남편을 원망하는 ‘꺼리’가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웃자고 하는 얘기이겠지만, 나도 이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경우였기에, 내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보려 한다.



우리에게는 두 명의 자식이 있다. 둘 다 아들이며 , 두 살 터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집사람이 아이를 출산할 때, 나도 두 번 모두 옆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도 빵점 남편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집사람이 첫째를 출산한 것은 1983년이고, 둘째를 출산한 것이 1985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치면 25년도 넘게 지난 일이다. 그러나 나의 아내는 지금까지, 아이들 출산할 때 내가 옆에 없었다고 불평을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물론 속으로야 서운한 맘은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인식했던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나도 속으로 미안한 마음은 있어도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방송 때문에 옛 생각도 나고 해서, 당시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변명아닌 변명을 늘어놓고자 하는 것이다.

 

 

 



집사람과 나는 1982년 봄에 결혼을 했다. 당시 신분이 현역군인(육군 대위)이었던 나는 광주 포병학교에서 고등군사반 교육을 받던 중이었다. 고등군사반 교육을 마치고 배치 받은 곳이 조치원이었다.

조치원에서 근무하는 3년 동안, 우리는 군청에 근무하시는 분의 집(조치원 읍내에 있었다) 방 한 칸을 빌려서 생활하였다.

우리가 사는 집 가까운 곳에 커다란 고목나무들이 많이 있던 대동초등학교가 있어서, 집사람은 임신기간 중에 학교로, 논둑길로 산책을 많이 다녔다. 아이는 작게 낳아서 크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첫째 아이를 낳을 당시, 아이의 몸무게가 3kg에 훨씬 미달되었으며 순산이었다.


첫째(공진)를 낳을 당시, 나는 포병대대에 군수과장으로 재직하면서 예비군 동원훈련 중이었는데, 1주일 동안의 훈련기간 동안은 집에 갈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토요일(예비군들 퇴소하는 날이었다) 오전에, 집사람이 아이를 낳았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예비군들 퇴소시키고 장비도 반환해야 하는 내 직책상, 바로 집사람에게 갈 수는 없었다. 

오후 3시가 넘어서서야 장비, 물자 등의 반납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었다.


퇴근하면서 집으로 가지 않고, 곧장 조치원 읍내의 산부인과 의원으로 갔는데, 의원에 집사람(물론 아기도)이 없었다. 직원 말로는 오전에 아기를 낳고 오후에 바로 퇴원하였다고 한다.

황당하였다. 의료 상식도 없었고, 남자인 나였지만, 출산 후 며칠쯤은 병원에 입원해있는 것이 상식으로 생각되는데, 오늘 아이를 낳은 사람이 벌써 퇴원하였다니...

황망히 집으로 오니 집사람이 아이와 함께 누워 있다가 맞이한다. 집사람 말로는 몸에 별 무리가 없는 듯해서 그냥 퇴원했다고 한다.

참,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미 퇴원한 상태라 다시 병원에 가기도 그렇고, 조금 있으면 어머니가 오실 것이라고 해서 그냥 두었다.


당시에 나의 어머니는 청주의 큰 누나 집에 머무르고 계셨었는데, 집사람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날 저녁 때 바로 오셨다.

나중에 들었는데, 이 날(음력으로 2월 26일)이 청주의 큰 누나 생일이었다고 한다. 공진이로 봐서는 큰 고모와 생일이 같은 것이다. 

장모님도 오셨는데, 어머니가 계시면서 산모 뒷바라지를 해준다고 해서, 하루만 머물고 전주 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께서는 삼칠일(3주)을 며느리 산후 뒷바라지 해주시고는 서울 집으로 돌아가셨다.


집사람은 산후 후유증으로 얼굴과 몸이 많이 부어서 빠지지 않았는데, 아버지께서 늙은 호박을 가져오셔서, 속을 파고 꿀을 넣어 달여 먹고 난 뒤 붓기가 싹 빠졌다고 신기해하였으며, 요즘에도 산후 부종 얘기가 나오면 그 얘기를 하곤 한다.


어쨌든 이렇게 첫째가 태어날 때, 나는 집사람과 함께 있지를 못했다. 더욱이 집사람은 아이를 낳은 당일에 바로 집으로 왔으니, 요즘 사람이 들으면 참으로 무모하고 어리석다 생각할 것이다.

집사람이라고 어찌 병원에서 쉬고 싶지 않았겠는가? 다 넉넉지 못한 주머니 사정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려니...그것이 미안한 마음을 들게 하였다.

 

 

 

 


조치원에서 3년간 근무하고 난 뒤, 나는 부산으로 발령을 받았다. 부산 근무지에는 우리가 살 집이 없어서 집을 마련할 동안 이사를 미루어야만 하였다. 집사람과 아이는 조치원에 그대로 둔 채, 나만 혼자 내려와 근무하면서, 여기저기 집(방)을 구하러 돌아다녔으나,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사도 하지 못한 채, 한 달(4주)간 서울 근교로 교육을 받으러 갔다. 새로 전입해온 사람들을 위한 기초교육이었는데, 밖으로 나올 수는 없고, 부대 안에서 한 달을 꼬박 생활하여야만 하였다.

교육을 받던 중 나에게 집에서 연락이 왔었다고 한다. 집으로 연락을 해달라고 했다는데, 나는 긴급히 연락할 일이 없을 듯해서, 그냥 교육을 마칠 때 까지 연락을 하지 않았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고, 오지에서 생활하느라 전화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


4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서울 큰집으로 가니, 집사람이 둘째(범진)를 낳았다고 했다. 나는 10여 일 동안을 둘째를 낳은 지도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내가 교육을 받던 기간 중에 아버지 생신이 있어서, 집사람이 아버지 생신 치르려고 큰집에 왔는데, 아버지 생신날, 아침상 물리고 난 뒤 진통을 느껴서, 용산의 어느 조산원에 가서 출산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몸이 좋지 않아 조산원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교육을 받던 중에 연락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둘째의 출산이었던 것이다. 곧바로 형수님과 함께 조산원으로 갔다. 조산원에 가니 집사람이 힘겨운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집사람의 말로는 출산 시 하혈이 많아서, 몸이 좋지 않아 퇴원하지 못하고 요양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조산원에서 주는 식사가 좋다고도 하고, 미역국도 많이 먹는다고 하였다.


집사람과 둘째 아이(범진)를 보고난 후, 집사람은 좀 더 요양을 하도록 형수님께 부탁하고, 나는 근무처인 부산으로 내려왔다.

한 달 동안 교육 받느라 부대를 비웠기 때문에, 휴가를 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곧바로 부대 근무를 하면서, 퇴근 후나 휴일에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서 겨우 광안리에 방을 구하고는, 얼마 후 이사를 하였다.

당시 내 근무지는 송도였는데, 방을 구하려고 많이도 돌아다녔다. 송도는 물론, 감천, 영도, 괴정 까지도 다녔고, 결국은 광안리에서 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광안리에서는 두 달 동안만 생활을 하고, 다시 근무지가 가까운 송도로 이사하였다. 이후 제대할 때 까지 약 3년간 송도에서 생활하였다.

광안리에서는 장마철을 포함하여 두 달밖에 살지 않았는데, 여건이 너무나 좋지 않아 지금도 그 때 생각을 하면 끔찍스런 느낌이 들곤 한다고, 집사람은 몸서리를 친다. 그러나 송도에서 생활할 때는 눈앞에 보이는 경관이 너무 좋아, 집사람과 나는 지금도 자주 입에 올리곤 한다. 

영도와 송도 사이의 바다(남항)에 떠 있는 큰 배들, 야간에 불을 밝힌 배들을 보면 너무나 아름다워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감천 쪽에서 송도로 넘어오면서 보이는 남항 앞바다와 그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배들을 보면, 시원하고 가슴이 훤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하였다.  

지금은 영도와 송도 사이에 남항대교가 건설되어, 남항대교 위에서 배들을 바라보는 맛도 괜찮을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나는 집사람이 두 아들을 낳을 동안 옆에서 지켜주지를 못하였다. 아내의 출산 고통을 함께 느껴보지 못했다는 점도 인정한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살림에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빵점 남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당시의 여건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나는 원래 자상한 성격이 아니라서, 집사람이나 아이들에 대해 잘 대해주지도 못한다. 그래도 아이들은 모두 잘 커서, 지금은 둘 모두 20대의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생일이 웃어른과 같으면 좋다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우연히도 큰 아들 공진이는 나의 큰 누님(아이에게는 큰고모가 된다)과 생일이 같고, 작은 아들 범진이는 나의 아버님(아이에게는 할아버지)과 생일이 같다.

비록 내가 부족하고 여건이 좋지 않아 출산부터 지금까지 아들들에게 제대로 해준 것은 턱 없이 부족하지만, 생일이 같은 할아버지나 큰고모의 마음과 정성을 포함해서, 주변의 모든 분들이 아껴주시는 덕에 모두들 큰 어려움 없이 잘 자라준 것 같다.


아이들 임신 중에, 또 출산 후에 그렇게도 고기가 먹고 싶었는데도, 주머니 사정이 열악하여 먹지 못했다는(당시에 월급에서 바로 떼는 저축이 많았던 때문) 아내의 뒤늦은 푸념을 지금도 간간이 듣기는 하지만, 출산할 때 옆에 없어서 서러웠다는 소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나의 아내이다.

요즈음의 신세대 아내들은, 출산 때 남편이 꼭 옆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데, 남편의 여건도 헤아려주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여자들이여! 

출산할 때 남편이 곁에 없다고 서러워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남편의 육신이 아니라, 그의 마음인 것을...






***  세종대왕 때는 궁궐(관청)의 여종이 출산을 할 때, 그의 남편에게도 휴가를 주어 출산한 아내를 보살피게 하도록 지시하였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살던 조선시대보다도 요즘 같은 핵가족 시대에 더욱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된다.

출산 자체야 어차피 의료진들의 손을 필요로 하지만, 산후조리에는 남편의 손길이 그 무엇보다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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