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작은 마누라(논개)

道雨 2008. 11. 5. 11:06

 

 

 

작은 마누라(논개)


논개의 남편, 최경회


저는 임진왜란 때 경상우병사를 지낸 최경회(崔慶會)라 하며, 작은 부인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주논개(朱論介, 1574~1593)입니다.

지금 논개도 제 곁에 있어요.

왜란이 일어나기 전, 저는 전라도 장수 현감을 지냈는데, 본부인 전씨는 해수병을 않아 누어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에 논개 모녀가 송사에 휘말려 동헌으로 끌려 온 사건이 있었고, 진상을 파악해 보니 잘못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작은 아버지가 꾸민 계략에 놀아난 겁니다.

갈 곳이 없던 모녀가 불쌍했습니다. 그러자 본부인은 자기의 병 간호와 집안 일을 위해 두 모녀를 동헌에서 살게했습니다.

매사에 빈틈이 없던 논개였고, 어느 새 저의 부실이 되었지요. 당시 논개의 나이 겨우 18살이고 저는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그래도 우리는 잉꼬처럼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아니, 도둑놈이라고요. 쓸데없는 소리 마세요.

1992년 1월 19일, 원로 서양화가 김흥수씨가 제자 장수현씨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당시 두 사람은 각각 73세와 30세라는 나이 때문에 세간의 화제였고, 주례를 맡은 정치인 김종필씨는 "만년 청년과 절세 가인의 결합은 의욕과 사랑으로 또 하나의 예술을 창조했다"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나이 차이를 극복한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김 화백은 "그걸 물을 게 아니라 건강의 차이를 어떻게 조화시킬지를 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맞받아쳤습니다.

그런데 신혼의 달콤함도 가시기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진안․무안을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집해 곳곳에서 왜적을 무찔렀습니다.

정규 훈련도 받지 않은 의병으로 왜군을 섬멸하자, 조정에서는 저의 용맹을 인정하여 경상우병사로 삼아 진주성을 지키라는 어명을 내렸어요.

바로 그겁니다. ‘용장 밑에 졸병은 없다.’고 했습니다. 당시 진주성은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는데,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는 왜군에 밀려 그만 죽고 말았어요. 그래서 저와 김천일이 응원군으로 파견되었고, 왜군들이 몇 겹으로 성을 포위하였어요.

제가 진주로 떠나자 논개는 남장을 하고는 험준한 육십령 고개를 넘어 진주성을 찾아 왔어요. 깜짝 놀랐지요.

“도중에 왜놈을 만났는데 색에 굶주린 놈들이 저를 성폭행하려고 덤벼들었어요. 저는 자살을 결심하고 은장도를 꺼냈는데, 그 찰나 황진 장군이 달려들어 구해 주었어요. 하마터면 당신도 못 보고 먼저 세상을 떠날 뻔했어요.”

진주성만 함락하면 영남 일대가 저절로 들어오기 때문에, 적장 게다니무라는 1593년 6월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일시에 공격해 왔어요.

그러자 조선군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놈들을 돌과 바위로 시정없이 까 버려 대승을 거두었어요. 그러자 풍신수길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왜군들을 모두 진주성에 집결시킨 후 겹겹으로 성을 포위한 채 우리의 군량과 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어요.

우리의 전세가 약해진 틈을 타 왜군이 기습을 해 오자, 최후까지 싸우던 저와 김천일은 북쪽을 향해 두 번이나 절하고는 남강에 투신했어요.

원통하고 분한 일이지만 그런데 분명히 본 것이 있어요. 물로 뛰어드는 순간 제 눈에는 일본이 망하는 모습이 보인 겁니다. 불쌍한 것은 아내지요.

“그래요. 그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낭군을 잃고 살 땅마저 빼앗긴 지금 내가 할 일 무엇인가.”

그래서 논개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원수를 갚을 기회만 찾고 있었어요.

마침내 기회가 왔는데, 6월 29일 진주성을 함락한 왜군은 7월 7일 승전을 축하하는 잔치를 성대하게 촉석루에서 열었어요.

그러자 술 자리를 위해 기생들을 모집했고, 논개도 스스로 기생이라 속이고 술 좌석에 참석한 겁니다.

미모에 빠져 술에 취하자, 논개는 게다니무라를 촉석루 아래에 있는 의암(義岩)으로 유인햇으며, 그 놈을 부둥켜안고 강물로 뛰어 든 겁니다.

“여보, 그 때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바로 당신의 명복을 빌고 또 인생의 덧없음을 생각했어요.”

“그랬어요. 그러고 보니까 옛 시 한 수가 생각나는구먼.”

생은 어디에서 오며 죽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생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짐이라
뜬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나고 죽고 가고 오는 것 역시 이와 같으니라

논개의 싸늘한 시체는 남강 기슭으로 떠내려갔어요. 그러자 충절을 기린 조선군이 한 여름에 3백리 길이 넘는 행렬을 낮에는 왜병을 피하고 밤에는 이슬 속을 걸어 함안의 방지 마을로 운구해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어요. 저의 무덤 바로 앞 쪽에 말이어요.

“그래 여보, 우리는 죽어서도 함께야. 그런데 나는 당신의 무덤만 보면 그만 기가 죽어 버려. 왜 내 무덤 보다 두 배나 더 큰 거야.”

“어머, 참 당신도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후손들이 저의 충절을 생각해 한 일인 걸요. 질투하지 마세요. 무덤이 작고 큰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어험, 그리고 왜 당신의 사당은 진주와 장수 두 곳이나 있는 거야. 내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거야. 내 참. 잘 난 마누라 때문에 어디 오금이 저려 살 수가 있나.”

 “여보, 미안해요. 물론 여자로서 사당을 가진 사람은 춘향이 하고 저 밖에는 없는 줄 알아요. 춘향이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니까 실존 인물로는 제가 유일한 여자지요.”
"그래 나는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그리고 우리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 다시 환생하자구.”

“알겠어요, 여보.”

쪽!

 

 

* 윗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