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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금관·토기…행방 알 수 없는 문화재

道雨 2009. 3. 12. 14:59

 

 금관·토기…행방 알 수 없는 문화재

 

"금관(金冠)은 어디로 갔을까?"

 

 

가야시대 부족장 무덤으로 추정되는 팔장군묘.

잡목을 제거하고 봉분에 잔디를 심는 정비작업이 한창이다.

 

 

비슬산 인근에서는 아직도 '사라진 금관'에 대한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 와우산성이나 인근 고분군, 팔장군묘 주변 등에서 화려한 금관과 문화재가 대거 출토됐지만 지금은 행방을 찾을 길 없다.

 

주민들의 얘기를 모아보면 일제시대에 규모가 큰 무덤들은 대부분 도굴당했고, 1960년대 초반에 또다시 일대 고분군들이 도굴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당시에는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없고 법과 제도가 제대로 정비돼 있지 않아 공공연히 도굴이 자행됐다.

 

40여년전 한 재력가가 100만원의 거금을 들여 인근 마을 주민들을 동원, 고분들을 파헤쳐 유물을 가져갔다는 게 주민들의 증언이다.

도굴에 참여했던 주민 일부가 생존해있다. 이때 실려나간 유물이 4t 트럭 2대 분량이나 됐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고 주민들은 전했다.

당시 팔장군 무덤에서는 가야시대 금관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굴됐고 금동제 말안장, 기러기 모양의 토기, 금·은 장신구, 큰 칼 등 귀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도굴이 자행된 뒤 마을 청년들이 파헤쳐진 석실에 들어가 금·은 세공품을 주웠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유가면 직원 정경연씨는 "어릴때 동네 아이들과 함께 (고분군에서 나온) 구슬 모양의 장신구로 구슬치기 놀이를 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이 일대는 가히 문화재의 보고였던 셈이다.

 

채수목 전 달성문화원장은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출토된 금관은 신라 금관보다 더 화려하고 뛰어난 걸작품"이라며 "재벌가의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말과 타 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고된 금관이 실제로는 팔장군묘에서 도굴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원희 유가면 노인회장은 "당시에 서둘러 조치를 했으면 가치있는 문화재를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도굴된 문화재를 찾는 일에 후인들이 나서야 한다"고 뼈 있는 말을 했다. 몇 년 전에도 인근 고분이 파헤쳐지는 등 도굴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주민들은 당국의 무관심을 질책했다.

 

 

**********************************<매일신문/박용우기자 2009.1.13>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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