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 발견

道雨 2009. 3. 17. 10:45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 발견

고궁박물관 "조선왕조 유일한 국새"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금까지 단 1점도 실물이 남아있지 않다고 보고된 조선왕조 임금의 실무용 도장인 국새(國璽)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은 17일 오전 이건무 문화재청장이 참석한 가운데 박물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해 12월 고종황제가 친서에 사용한 현존하는 유일한 대한제국시대 국새이자 조선왕조의 유일한 국새를 구입했다고 발표했다.

박물관은 이 국새를 구입한 직후 지금까지 약 3개월에 걸쳐 관련 기록을 검토하고 분석한 결과, 이 유물이 바로 식민지시대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전해지던 사라진 고종황제의 국새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국새는 외함은 분실되고 보통(寶筒)이라 일컫는 내함과 함께 입수됐다. 국새는 전체 높이 4.8cm에 무게는 794g이었다.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며 비단실로 짠 끈이 달렸다. 정사각형 인장면(도장을 찍는 면)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글자를 양각(陽刻.돋을새김)했다.

내함은 황동(黃銅)으로 3단으로 만들어 하단에는 인주(印朱)를 넣을 수 있게 했으며, 그 윗단에 국새를 넣었다. 나아가 뚜껑은 네 면을 경사지게 꺾어 마무리했다.

하단과 뚜껑 내부는 붉은 비단을 직접 접착해 마무리했으나 국새가 들어가는 상단은 두께 0.5cm의 소나무로 내곽을 만든 뒤 붉은 천을 붙여 마감했다.

고궁박물관이 국새 성분을 분석한 결과 은(銀)과 금(金) 비율이 거북형 손잡이는 81:18인 반면, 몸체는 57:41로 나타나 손잡이와 몸체를 따로 제작해 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박물관 측은 "고종이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황제에게 보낸 10여 통의 편지에서 사용한 황제어새로는 두 종류가 확인됐지만 이에 사용한 도장 실물은 사라진 것으로 간주됐으며, 그 중 1점이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남아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었다"면서 "이 국새가 바로 유리원판 사진으로 남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확인한 국새는 "그 제작기록이 보이진 않지만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광무 5년 11월 16일)의 기록 등으로 미뤄 1901-1903년 무렵에 제작됐으며, 1903년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500년간 지속된 조선왕조에는 모두 27명에 이르는 임금이 있었으며 이들 임금은 모두 국새라는 실무용 도장을 무수히 제작해 공문서나 친서 등에 사용했지만, 그 실물은 단 1점도 남아있지 않았다.

고궁박물관을 비롯한 국내외 일부 기관이나 개인이 소장한 '임금님 도장'은 모두 어보(御寶)라 해서, 그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에 안치하기 위해 제작한 '의례용'일 뿐이며, 왕이 생전에 실제로 사용한 국새는 아니다.

이런 중요성을 고려해 고궁박물관은 이 국새에 대한 국보 지정절차를 밟기로 했으며, 그와 동시에 일반공개도 하겠다고 말했다.

 

 

 

 

***  관련 뉴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던 고종 황제의 국새(國璽)를 100년 만에 되찾았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은 17일 "고종이 1903년 이후 러시아·이탈리아 황제 등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보낸 친서(親書)에 사용한 '황제어새(皇帝御璽)'를 지난해 12월 재미교포로부터 구입했다"며 공개했다.

고종의 국새는 외함(보록)은 분실됐고 내함(보통·寶筒)만 남아 있으며, 높이 4.8㎝, 무게는 794g이다. 손잡이(보뉴·寶紐)는 거북이 모양이고, 붉은 비단실로 짜인 끈(보수·寶綬)이 달려 있다. 한 변이 5.3㎝인 정사각형 인장면(印章面)에는 '皇帝御璽(황제어새)'라고 돋을새김(양각)돼 있다.

조선왕조 500여년간 수많은 국새를 사용했지만 실제 사용한 국새를 찾은 것은 처음이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이 17일 공개한 '황제어새(皇帝御璽)'는 조선왕조의 임금 혹은 황제가 친서에 사용한 것이 확인된 유일한 국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제고지보(制誥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칙명지보(勅命之寶)' 등 고종의 다른 국새 3개가 소장돼 있지만, 이들이 실제 사용된 문건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에 확인된 고종의 국새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남아 있었으며, 박물관은 작년 12월 유물을 구입한 이후 3개월간 조사한 끝에 사진 속 국새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러·이(伊)에 도움 요청하는 친서에 찍어
고종황제 국새 '황제어새' 발견
1901~1903년 제작된 듯 국새 13개중 3개만 찾아



1901~1903년 사이에 제작

"가까운 시일 내에 극동 만주지역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나려는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나라는 휘말리게 됩니다. 우리 국력은 이에 못 미치므로, 이 전쟁을 예방할 수 없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전적으로 중립에 설 것입니다. 폐하께 이 사실을 낱낱이 적으니 서로 상조하여 깊은 배려를 해 줄 것을 바랍니다. 광무 7년 11월. 폐하의 좋은 형제."

고종 황제는 1903년 친서를 작성한 후 국새를 찍어 이탈리아 황제 앞으로 보냈다. 이번에 확인된 '황제어새(皇帝御璽)'가 바로 여기에 찍혀있다. 국운이 기울어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주변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고종 황제의 절박한 심정이 묻어난다.
▲ 고종 황제가 외국 정상들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한 국새인‘황제어새’./문화재청 제공
▲ 광무 7년(1903)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의 말미에‘황제어새’가 찍혀 있는 모습이다./문화재청 제공
'황제어새'는 국새의 현황을 기록한 기존 문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국새다.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에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등 13개의 국새가 등장하지만, 이 중 '황제어새'는 들어 있지 않다.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의 기록(광무 5년 11월 16일)으로 미뤄볼 때 1901(광무 5년)~1903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주로 친서에 사용된 것으로 보아 비밀리에 제작돼 고종이 직접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고종의 친서에 사용된 '황제어새'는 두 종류다. 이번에 확인된 것은 제1형으로, 글자가 둥글고 부드러운 느낌이 특징이다. 1903년 이탈리아 황제와 1904~1905년 러시아 황제에 보낸 친서에 사용됐다. 글씨체가 각이 지고 반듯한 제2형은 1905~1906년에 독일 황제와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확인된다.

특이하게도 국새의 글씨 '황제어새' 중 '황(皇)'자는 '백(白)'자의 아래에 '왕(王)'자를 둔 것이 아니라 가로획이 하나 더 있는 '자(自)+왕(王)'으로 표기돼 있다. 이 청장은 "고종 친필의 비석이나 당시 제작된 각종 어보(御寶)나 의궤(儀軌)에도 '황'자가 모두 이렇게 표기돼 있다"고 말했다.

국새의 성분 분석 결과, 거북이 모양 손잡이는 은과 금의 비율이 81대 18, 몸체(보신·寶身)는 57대 41의 비율이어서 손잡이와 몸체가 따로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그 많던 국새는 다 어디로

조선왕조 500년 동안 27명의 임금 혹은 황제가 수많은 국새를 만들어 사용했는데도 대한제국 이전의 국새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여러 차례 왕궁의 화재로 소실된 데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관리 소홀을 틈타 빼앗기거나 분실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례의궤》에 전하는 고종의 국새들도 1910년 일제가 나라를 합병하면서 강탈해 갔던 것을 광복 후 돌려받았으나, 6·25 전란 통에 분실했다가 3개만 되찾았다.

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은 "고종의 손때가 묻은 국새를 100년 만에 되찾은 만큼 곧바로 국보 지정 절차를 밟겠다"며 "빠른 시일 내에 일반에 공개하고, 덕수궁 석조전의 대한제국실이 복원되면 전시에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국새는 국사(國事) 결재용… 어보는 종묘 안치 의례용

조선왕조 국왕의 도장은 국사(國事)에 직접 사용하는 국새(國璽)와 의례용인 어보(御寶)로 구분된다. 국새는 국가의 권리와 정통성의 징표로 사용됐다. 국새는 옥새(玉璽), 국인(國印), 새보(璽寶), 대보(大寶), 어새(御璽) 등으로 명칭이 다양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일반적으로 국새는 상서원(尙瑞院)에서 보관하지만, 이번에 확인된 '황제어새'는 고종이 직접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만큼 당시 정치적 상황이 급박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면 어보는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에 안치하기 위해 제작된 '의례용' 도장이다. 왕이나 왕비의 존호·시호·휘호 등을 새겼는데, 국새에 비해 크기가 크고 조각선의 정교함이 떨어진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320여개가 남아 있다.

 

 

 

 

 

 

'황제어새' 찍힌 원본 발견

고종의 비밀 국새인 '황제어새(皇帝御璽)'가 찍힌 문서 원본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는 19일 "고종이 1909년 1월 호머 헐버트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 국립고궁박물관이 지난 17일 발견해 공개한 황제어새가 찍혀 있다"고 밝혔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가 공개한 문서는 헐버트 박사의 외손녀인 주디 애덤스 여사가 2007년 기증한 것으로, 고종이 미국 YMCA에 연수를 간 조카 조남복을 잘 돌봐달라고 당부하는 내용의 편지다.

이 편지의 발견으로 고종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된 이후에도 국새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고종은 한자 편지에서는 스스스로를 '大韓國太皇帝(대한국태황제)', 영문편지 마지막에는 'Retired Emperor of Korea'(폐황제)라고 표현했다.

황제어새의 서체를 감정한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는 "고종이 퇴위 후에도 순종에게 국새를 물려주지 않고 계속 사용한 것은 양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폐황제'라 칭한 것은 의문이 남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측은 또 고종이 1906년 6월 헐버트 박사에게 수여한 헤이그밀사 특사증 사본에도 황제어새가 날인돼 있다고 밝혔다. 손 교수는 이에 대해서는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 확인이 어렵지만, 이번에 입수된 국새와는 다른 유형의 친서용 국새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김지원기자 eddi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