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감상문, 관람후기

이회영과 젊은 그들

道雨 2010. 3. 10. 11:48

 

 

                                          이회영과 젊은 그들

                                                                    -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최근 며칠 동안 책을 한 권 읽었는데,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 명문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다.

 

지은이는 요즘 한국의 역사계에서 뚜렷한 관점으로써 역사서 서술에 있어서 질적 변화를 일으켜, 역사의 대중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덕일이다.

마치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우리의 답사여행 문화를 변화시킨 것에 비견할 수가 있겠다.

그가 쓴 책 중에서 <조선왕 독살사건>과 <여인열전>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특히 <여인열전> 중에서 소현세자빈 강씨에 관한 글에서 감명을 받은 바가 컸었다.

소현세자빈 강씨의 무덤(공식적인 명칭으로는 '영회원'이라고 하는데, 주변에서는 '애기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이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데, 내가 어렸을 때 살 던 곳에서 가까운 곳이며, 몇 번 가보기도 한 곳이라 더욱 마음에 와 닿은 것이기도 하겠다.

그 외에도 그의 글을 많이 접해왔기에, 나에게는 '이덕일이라면 읽어볼만 하다'는 인식이 서있는 참이었다.

 

작년(2009년) 3.1절을 기념하여 SBS에서 방송된 <우당 이회영, 애국의 길을 묻다>를 본 시청자가 올린 다음 아고라의 글을 스크랩하여 이 블로그에 옮겨두고 몇 번 읽어보기도 했으며, 그의 삶에 대해 경외를 품어왔던 터였는데, 얼마 전에 한겨레에서 신간 책소개로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올린 것을 보게 되었고, 반가운 마음에 즉시 주문 구입하여 읽기를 시작하였는데, 방금 전에야 막 읽기를 마친 것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왕조의 마지막 두 풍경'을 기술하고 있는데, 하나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의 밀사 이인직('혈의 누'를 쓴 소설가 이인직과 동일 인물이다)에 대한 얘기이고, 다른 하나는 나라를 빼앗긴 것에 분개하여 자결한 매천 황현에 대한 서술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이인직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인 '혈의 누'의 작자이며, 막연히 친일행각이 있었던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한일합방 당시 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의 비서이자 합병에 관한 밀사로서 한일합방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매천 황현에 대해서도 을사조약에 비분강개하여 자결하였다는 막연한 사항만 들어왔던 터였으나, 이 책에서 당시의 황현의 행적과 그가 쓴 글들을 소개해 놓은 것을 읽어보면서 좀 더 가깝게 느껴졌으며, 한편 예전에 내가 구례 화엄사와 천은사를 답사여행(곡성, 구례 지역 답사기 참조) 할 때 매천사당을 답사계획에 포함시켰으면서도 표지판을 보지 못하고 무심결에 지나쳐서 아쉬웠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기도 하였다.

 

"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5백년에 국가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이는 매천이 그의 음독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생과 자식들에게 남긴 말이다. 한일합방이 되기 직전인 1910년 8월 6일이었다.

 

 

 

이회영은 세칭 삼한갑족(三韓甲族 :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이라고 하는 명문대가 출신으로서, 조선 선조 때의 명 재상으로 오성대감이라고도 불리웠던 백사 이항복의 10세손이다.

이회영의 부친(이유승)은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이회영의 당숙인 이유원은 고종 때 영의정을 역임하였는데, 후손이 없어 사촌동생 이유승의 둘째 아들인 석영(이회영의 둘째 형)을 양자로 들였다.

이회영은 여섯 형제 중의 네번째였는데, 위로 이건영, 이석영(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감), 이철영이 있었고, 아래로 이시영과 이호영이 있었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비밀리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 자격으로 파견했는데, 바로 이 '헤이그 밀사사건'의 기획자가 바로 우당 이회영이었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사건을 통해 외국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독립운동 방안에 회의를 느낀 이회영은, 이후부터 독립운동 방식을 달리하였는데, 바로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과 군사를 길러 무장투쟁을 하는 두 가지 방식이었으며, 이 두 가지 방식은 이회영이 여순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실천한 이념이 되었다.

 

한편 이회영은 첫 부인이었던 달성 서씨와 사별한 후, 1908년에 이은숙씨와 재혼을 하였는데, 재혼한 장소는 교회(상동교회인데, 이곳은 구한말 개화파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고 한다)였다. 이는 이회영이 불평등한 봉건적 인습과 계급적 구속을 타파해야 한다는 사고를 가진 때문으로 생각되는데, 실제로 집안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었으며, 남의 집 종들에게도 경어를 썼다고 한다.

 

이회영의 여섯 형제는 모두가 한 마음으로 결의하고, 모두 가산을 정리하여 40만원(지금 돈으로 치면 600억원 이상의 거금인데, 급하게 팔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들의 총 재산이 지금 돈으로 1천억원 이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의 자금을 마련하였으며, 여섯 형제들 모두가 일가족 40여 명을 거느리고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이후 모든 가족들이 독립투쟁에 매진하였다.

이회영의 일가를 따라온 열세 명의 종들도 독립군으로 받아들이고 상하와 귀천, 나으리와 종의 구별도 없앴다고 한다.

그 많은 재산을 팔아 마련한 자금도 모두 독립투쟁을 위한 학교설립과 인재 양성, 그리고 무장투쟁에 사용하면서 본인들은 정작 굼주림과 헐벗음으로 고생이 막심하였다.

그리고 여섯 형제 중 다섯째인 이시영만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으며, 나머지 다섯은 모두 타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지금 우리가 일제시대 만주나 중국에서의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익히 들어 알고있는 무장독립투쟁에 있어서 이회영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이회영은 수많은 단체들을 설립하고 지도하였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양성, 배출하여 무장 투쟁의 선봉에 서게 하였으며, 이들은 김좌진 장군의 요청으로 북로군정서에 파견되어 김좌진 장군의 휘하에서 참모와 지휘관,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 암살, 폭파 등의 특수한 일을 수행했던 다물단, 남화연맹(남화한인청년연맹) 등도

이회영이 관여했던 무장 단체들이다.

 

이회영은 초기 임시정부의 출범에 관여하기도 했지만, 임시정부의 출범 보다는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을 더강조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임시정부를 떠나 다른 노선을 걷게 된다.

한동안 북경에서 거처한 이회영의 집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머물렀는데, 그들 중에는 민족주의자(신채호, 김창숙, 안창호, 조소앙 등)도 있고, 공산주의자(홍남표, 성주식 등)도 있으며, 아나키스트(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김종진 등)도 있으니, 온갖 성향의 독립운동가들이 이회영의 신세를 진 셈이 된다.

 

이회영은 보통 아나키스트로 분류된다.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되기 전에는 양명학에 심취한 것으로 보인다. 주자학(성리학)이 주류를 이룬 조선에서 양명학은 이단으로 몰렸다.

성리학이 사대부의 계급적 우월을 절대시하는 이념체계인 반면, 양명학은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으며, 사민(사농공상)이 평등하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양명학이 가지고 있는 사회개혁사상과 천하일가사상이 아나키즘과 유사한 점이 많아, 이회영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양명학자에서 아나키스트로 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나키즘은 기본적인 이념이 자유연합주의로서 느슨한 형태의 정부나 무정부주의를 표방한다고 볼 수있겠는데, 이회영은 만주와 중국, 그리고 국내에 자생적으로 생겨난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들을 그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협조와 연합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강력한 정부보다는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를 더 선호하면서, 자연히 아나키즘에 가깝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때 이회영은 고종의 해외망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의 왕족과 귀족들이 원해서 한일합방을 했다는 일제의 거짓 선전을 폭로하고, 해외로 망명한 고종으로 하여금 개전조칙을 내려 전국적으로 봉기가 일어나게하기 위함이었다.

고종의 망명에 대비하여 자금을 준비하고 북경에 행궁까지 준비되었지만, 고종이 급서하는 바람에 실행하지를 못했다.

고종의 급서는 망명계획이 누설되어 일본에 의해 독살된 것이라는 설이 많다.

 

 

극도의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독립투쟁에 전념하던 이회영은, 66세의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해를 떠나 만주로 향하던 중, 일경에 의해 체포되고, 여순감옥에서 극도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932년 11월 17일 마침내 사망하였다.

 

1910년 집단 망명했던 우당 이회영의 형제 중에 1945년 일제의 패망 때까지 생존했던 인물은 다섯째인 이시영뿐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고문사하거나 아사(餓死 : 굶어 죽음)했다.

이시영은 일제 패망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으나 임정 주석인 백범 김구와 함께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또한 미군정은 친일파에 적대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우호적으로 대하였으며, 경찰 등의 주요 요직을 차지한 친일세력들은 친일파 처벌에 조직적으로 반발하였다.

 

미 군정 당시 경찰은 친일파들의 소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 군정의 자료에 따르면, 미 군정 내의 친일 경찰 수는 가장 고위직인 총감 1명 중 1명(100%), 관구장 8명 중 5명(63%), 도경국장 10명 중 8명(80%), 총경 30명 중 25명(83%), 경감 139명 중 104명(75%), 경사 969명 중 806명(83%)이나 달했으니, 일제시대의 경찰이 그대로 복원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반민특위의 와해는 이 때 이미 예견된 셈이고, 결국 일제의 잔재 청산 및 친일파 처단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친일세력에 의한 인적 청산의 실패는 일제 식민사관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극복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출신들이 해방 후에도 계속 살아남아 역사학계의 주류의 지위를 차지했고, 식민사관은 대한민국에서도 버젓이 정설의 지위를 유지했다.

 

 

 

자신에게 보장된 안락한 삶을 버리고, 애국의 정신으로 자신과 가족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며, 고난의 길을 택한 우당 이회영의 일생은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불쌍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과정이고 그런 과정의 총합이 역사'라는 인식에서 본다면, 우당 이회영의 삶은 우리의 역사에서 영원히 살아있고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현재 우리 한국사회는 망국 직전과 비슷할 정도로 온갖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있으며, 지배층의 도덕심이 부족하고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있다.

IMF 위기, 국제금융위기 등을 거치며,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경제살리기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불법이나 부정, 언론 통제나 인권의 제한도 용인되는 등, 도저히 민주사회, 정의사회 구현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이러한 요즘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우당 이회영 일가의 삶은 우리사회에 꼭 필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한 번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 이회영의 바로 아래 동생인 이시영은 여섯 형제 중 유일하게 해방 될 때까지 살아남아 귀국한 사람이다. 그는 구한말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이기도 하다. 그는 귀국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 이종찬 전국정원장과 이종걸 국회의원(민주당)은 모두 우당 이회영의 친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