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일본
하토야마 총리가 사임했다.
무능을 다 드러낸 끝에 단행한 치욕스런 사임이다. 죄 많은 사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여름 총선 때 오키나와 후텐마 미 해병대 기지를 “일본 나라바깥이나, 적어도 오키나와현 바깥으로 옮기겠다” 고 공약해 당선됐으면서, 공약을 파기하고 종래의 자민당 정권과 다름없이 오키나와현 나고시로 이전하겠다는 역주행을 했다. 게다가 그것을 미국과의 공동성명을 통해 국제적으로 약속한 뒤에 사임한 것이다.
오키나와현 주민들이 ‘배신’이라며 격노한 것은 당연하다. 어차피 사임할 거라면 적어도 미국에 대해 그런 약속을 하기 전에 사임했어야 했다.
하토야마는 공약 철회 이유로 “총리가 된 뒤, 공부하면 할수록 미 해병대의 억지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따라서 하토야마로서는 자신의 역주행을 호도하고, 기지의 오키나와현 내 이전 방침을 정당화하기 위한 뭔가의 재료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건 물론 미국이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그때 떠오른 것이 초계함 ‘천안’의 침몰사건이라는 재료였다.
5월31일치 <아사히신문>은 제주도에서 열린 한·중·일 3국 정상회담에 관해, “침몰사건 후텐마 논의에 이용”, “일본, 당돌한 적극성”이라는 제목을 단 기사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했다.
“‘예상 이상의 지원인데, 무슨 이유라도 있는가?’
한국 정부 관계자는 한국에 대한 하토야마 총리의 강력한 지지를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다. ...(중략) ...
실은 하토야마 정권은 애초 이 사건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북조선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중략)...
하지만 북조선 소행임이 분명해지자 후텐마 비행장 이전 문제와 관련해, 억지력으로서 주일미군의 존재의미를 강조하는 재료로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 ...(중략)...
위기감이 높아지면, 반대 여론이 강한 오키나와현 나고시 헤노코로의 이전을 이해해주는 쪽으로 여론이 바뀌지 않겠느냐는 계산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하토야마는 이명박 정권조차 당혹스러워할 만큼 적극성을 보였다고 한다. 현충원에서 희생자 추도 행사를 제안한 것은 한국 정부가 아니라 하토야마였다.
정상회담에서는 “만약 일본이 그와 같은 공격을 당했다면 한국처럼 냉정하고 침착한 자세를 견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냉정해지기 어렵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이 총리로 앉아 있는 나라가 얼마나 위험할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권력은 진실을 날조해 ‘무리’를 감행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일러준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 하토야마는 한국 정부가 당혹스러워할 만큼 적극성을 보였다. 거기에는 실정을 은폐하려는 얄팍한 계산은 물론, 헌법을 개악해 교전권을 부활하려는 우파의 계산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냉정한 이성이다.
나처럼 일본에 살고 있어도 한국의 언론 보도들을 조금이라도 접하고 있다면, 천안함 침몰사건이 의문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현시점에서 한국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위험하다는 게 분명해 보인다.
일본이 만주침략의 구실로 삼은 ‘류탸오후(유조구) 사건’은 애초 항일세력이 남만주철도를 폭파한 사건으로 발표됐으나, 전쟁이 끝난 뒤 일본군이 꾸민 모략극이었음이 판명됐다.
미국이 북베트남에 대한 전략폭격의 구실로 삼았던 통킹만 사건은, 공해상의 자국 함정이 북베트남 해군의 공격을 받은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확전을 위한 날조라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또 아주 최근에도 미국 부시 정권이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은닉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라크를 침공했는데, 이라크라는 국가가 철저히 파괴당하고 수십만명이 희생당한 뒤에야 그 주장이 거짓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일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국 정부의 천안함 침몰사건 발표에 관한 여러 의문들은 전혀 보도되지 않고 있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하토야마 정권의 대응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기사는 전체적으로 보면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그런 기사조차 북의 관여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걸 전제로 깔고 얘기를 전개한다.
같은 지면에 ‘북에게 우습게 보여선 안 된다’는 공격적인 제목의 사설을 싣고, 대북 제재를 위해 ‘국제적 제휴’를 강화하라고 주장하면서, 일본 정부는 중국과 러시아한테도 협조하도록 강력히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
일본 정부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 정부 이상으로 대북 제재에 적극적이며 호전적이기조차 하다.
거기에는 단기적으로는 이 사건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실정을 은폐하려는 얄팍한 계산이 깔려 있다.
더욱 위험한 것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헌법을 개악하고 교전권을 부활시키려는 우파의 계산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파괴되는 것은 한반도이며, 다치고 목숨을 잃는 것도 남북을 불문하고 한반도 사람들이다.
따라서 당사자인 한국 사람들이 지방선거에서 이명박 정권의 강경자세를 견제하는 민의를 표출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일이며 매우 건전한 감각의 발로였다.
하지만 당사자 의식이 없는 일본에서는 정부도 매스컴도 무책임하게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일본 국민 대다수는 ‘북조선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뿌리 깊은 편견과 반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건전한 견제세력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동아시아의 평화에 일본이야말로 위험요소인 것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기지 문제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약사항 대부분을 실현하지 못한 채 사임했다.
뒤를 이은 간 나오토 정권이 어떤 방향을 택할지 함부로 예단할 순 없지만 큰 방향전환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좀더 젊은 세대의 개헌론자들, 신국가주의자들이 더 큰 발언권을 갖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
'시사,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밥통’ (0) | 2010.06.14 |
---|---|
핀란드 교육개혁 부럽냐? 40년 걸렸다 (0) | 2010.06.12 |
조기 레임덕 (0) | 2010.06.12 |
지구온난화, 고래 ‘똥’으로 막을 수 있다 (0) | 2010.06.11 |
국민건강보험료를 올려라 (0) | 2010.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