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야채가게 주인은 아침마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라는 구호가 적힌 종이쪽지를 진열장에 붙여놓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상 아무 의미도 없는 구호를 붙여놓는 까닭은 다른 모든 가게들처럼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처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스스로 전혀 믿지도, 현실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구호를 습관처럼 붙여놓는 행위로써 야채가게 주인은 자신의 평온한 일상이 보장된다고 안심한다.
이것은 예외적인 얘기가 아니다. 공산 치하에서 거의 모든 주민들이 이런 식으로 삶의 안전을 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거기에 인간다운 위엄있는 삶이 존재할 수는 없다. 노예의 삶, 움직이는 시체들의 삶이 있을 뿐이다.
정치사상가로서 하벨의 진정성은 공산주의 체제의 문제를 거창한 차원이 아니라 소시민들의 비근한 일상생활 속에서 주목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도그마화한 이데올로기의 지배 밑에서 보통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오염되고, 뒤틀리고, 타락하는가를 증언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공산주의 권력만이 이런 게 아니다.
모든 권력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자발성에 대하여 적대적이다. 권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개인 혹은 개인들의 연합에 의한 자립성의 구축이다.
따라서 국가든 재벌이든 모든 권력은 사람들이 자주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발휘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권력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순종적인 신민들, 즉 얼간이들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권력의 논리에 순응하는 한, 자유인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좋은 사회란 무엇보다 권력의 전횡을 최대한 저지하고, 자유로운 정신들이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발언할 수 있는 토대가 확보된 사회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우리들 대부분에게 자유의 가치는 부차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대체로 물질적 안락과 일상의 평온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다.
보통사람들만 이런 게 아니다. 가장 독립적인 사고력을 발휘해야 할 과학자, 전문가들이 권력 앞에서는 더 허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가령, 4대강 프로젝트나 천안함 사건에 대한 합동조사단의 결론에 관한 대다수 해당 연구자들의 자세는 결코 과학적인 것도,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4대강 프로젝트나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에 대해 정부나 극우파 언론이 뭐라고 하건 정말 과학자라면 자주적인 판단력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이 방면의 전문가와 과학자들은 정부나 극우파 언론의 견해에 적극 동조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대부분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결국 그들은 스스로 자유인의 삶을 방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 정신의 대적(大敵)인 몽매주의의 확산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비록 극소수지만 이 땅에 과학자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소중한 이들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유사 이래 최대의 국토파괴 행위임이 분명한 ‘4대강 사업’이란 게 결국 운하건설을 은폐하는 거짓이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 것은 과학자적 양심에 따라 오랫동안 진상규명에 헌신해온 소수 연구자들 덕분이었다.
또한,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어뢰공격에 의한 것이라며 제시된 ‘결정적 증거’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끈질기게 제기해온 예외적인 몇몇 과학자 덕분에 우리는 ‘진실 속의 삶’의 가능성을 완전히 잃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천안함 문제와 관련해서 용기있는 발언을 계속해온 이들이 모두 해외 거주 과학자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진실 속의 삶’과 과학적 양심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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