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정책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 |
겨울산은 고요하고 쓸쓸하다. 건너편 골짜기에선 잎 다 떨어진 나무들이 회색빛 열병식을 벌이고 있다. 단풍 따라 산길을 오르던 인적도 다 끊겼다. 눈이 살짝 뿌린 바위 위에 누군가 글귀를 썼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그 옆에 나도 몇 글자 보탠다.‘공즉시색’. 이 세상 만물의 본모습은 비어 있다. 없다는 게 아니고 있으되 서로서로 기대어 있다. 저 나무는 다른 것에 독립되어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꽃가루가 암술과 결합해 씨앗이 되고 흙과 물과 봄날의 햇살이 합쳐 싹이 되고 나무가 되었다가 다시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
저만치 노인들이 앞서간다. 그저 조용히 눈 덮인 산봉우리며 나무들이나 보며 가면 좋으련만 큰 소리로 욕을 해댄다. ‘맨날 싸움질이나 하는 국회의사당에 폭탄이나 떨어져라. 연평도에 포 쏘아대는 빨갱이들 편드는 것들, 다 잡아다 없애버려야 돼.’ 칠순 안팎으로 보이는데 아직도 저렇게 남을 욕하고 미워할 혈기가 남아 있다. 무섭다. ‘육십이면 귀가 순해진다던데 나이가 들었으면 너그러워져야지 어찌 저리 살기가 서 있을까’ 화를 내는 나더러 뒤따르던 후배가 이런다. ‘형도 남 욕하기는 마찬가지네.’
시절이 하수상하여 황석영의 소설 <손님>을 다시 꺼내 읽었다. “너두 먹구 물러가라 총맞고 칼맞구 몽둥이맞구 가던 귀신. 비행기 폭격을 맞구 가던 귀신. 불에 타서 일그러지구 재가 된 귀신…인정받구 노자받구 좋은 데루 천도를 허소사.” 몇해 전, 소설의 무대가 된 황해도 신천에 갔다. 그곳에는 6·25 때 총 맞구 칼 맞구 몽둥이 맞구 곡괭이 맞아 죽은 신천 사람들의 유품이며 머리카락, 학살 도구들이나 사진 등을 모아놓은 ‘학살기념박물관’이 있다. 세번째 방문인데도 매번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나서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당시 신천군민 사분지일인 삼만오천명이 끔찍하게 죽어갔다. 만궁리는 인구 대부분이, 용당리는 절반이, 양장리에선 남자 전원이 죽었단다. 북의 공식 입장은 이 끔찍한 만행을 미군이 저질렀다 한다. 하지만 소설 <손님>에서는 인공치하에 재산 빼앗기고 종교적 탄압을 받게 된 황해도 일대 개신교도들이 인민군이 후퇴하자 반격에 나서서 참극이 벌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작가는 실제 취재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후기에 썼다. 그 반대로 6·25 당시 좌익들에 의해 우익들과 무고한 이들도 무수히 그리고 무참하게 죽어갔다.
지난달 23일, 아무리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남쪽은 왜 긴장이 팽배해 있는 연평도 앞바다를 향해 포를 쏘아댔을까. 북쪽은 또 왜 훈련 상황을 향해 실전의 포를 쏘아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죽게 만들고 삶의 터전을 떠나게 한 걸까. 새로 된 국방장관은 북이 다시 도발해 오면 전투기로 폭격을 하겠다 한다. 그럼 저쪽은 팔짱 끼고 가만히 있을까. 아무리 정밀방어무기체계를 갖추었다 해도 북의 전투기 한 대라도 이를 뚫고 서울 상공에 나타난다면 남북 모두에게 대재앙이 될 게 뻔하다.
노무현 정권 때 비서관 박선원의 증언이 놀랍다. 북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대하면서 핵을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영변 냉각탑을 폭파하고 핵무기 2~3개를 만들 수 있는 핵연료봉 수천개를 모두 남쪽에 팔기로 했었단다. 그런데 현 정권은 제시 가격 몇백억원이 국제시세의 두배라며 이를 거절했다 한다. 그 뒤 사실상 북한의 붕괴만을 기다리는 것으로 비치자 북은 아예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시작해 지금 몇 개의 핵폭탄을 만들었다는 거다. 재래식 무기로는 도저히 남쪽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잘 아는 북쪽에게 마지막 선택지는 핵무기일 수밖에 없다.
이번 연평도 사태를 통해 한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햇볕정책은 남쪽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임을, 주식이며 부동산 많이 가진 기득권층도 분명히 알게 되었지 싶다.
소설 <손님>에서 서로 죽이고 죽는 지주 요한과 소작인 순남은 고향에서 원혼으로 만나 화해하고 이승을 뜬다.
색즉시공이라, 만물이 공하여 서로 기대어 있으니 남과 북이, 좌와 우가, 너와 내가 서로 기대어 있다.
<김형태 변호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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