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폐기물 ‘10만년 보관’의 의미 | |
디아스포라의 눈 /
원전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라고 한다. 후쿠시마 사태가 진행중임에도 여전히 많은 나라가 폐기물 처리에 대한 전망도 세우지 못한 채 가동한다. 젊은 세대들은 앞으로도 방사능에 대한 불안과 우울의 세월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은 아직 복구될 기미조차 없다. 아직도 폭발과 방사능 대량분출 위험이 사라지지 않았다.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필적하는 대형 사고다. 아니 사태는 아직 제어 불가능 상태로 진행중이므로 체르노빌을 능가하는 대재앙이 될 게 분명하다. 여진도 계속되고 있다. 진원지에서 200㎞ 이상 떨어진 도쿄에서도 시시때때로 건물이 삐걱댈 정도의 흔들림을 느낄 수 있다. 원자로와 건물에 결정적인 균열이 생기거나 또다시 해일(쓰나미)이 덮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가는 나날이다. 흡사 땅속에 숨어 있는 거대한 불의 용(火龍)이 무슨 명확한 의도를 갖고 집요하게 날뛰는 형국이다.
도쿄전력은 지난주 당면한 위기적 사태를 모면하기까지 6개월 내지 9개월이 걸린다는 ‘공정표’(工程表)를 발표했지만, 아마도 도쿄전력 자신이나 일본 정부까지 포함해서 이것을 액면 그대로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설령 이 공정표대로 일이 진행된다 해도 아직 원자로 폐지로 가는 긴 도정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뒤 다시 수십년이라는 불안한 세월을 우리는 누출되는 방사능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체르노빌은 사고 발생 뒤 25년이 지났으나 현장은 아직도 방사능 위험이 남아 있고 그 관리를 위해 막대한 돈과 노력을 투입하고 있다. 아무것도 산출하는 것이 없는, 그야말로 시니컬한 비용이다. 후쿠시마도 그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게 확실하다.
나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시대 뒤에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기에 한국의 군사독재정권도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평온한 나날이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마음 한편에 이대로 인생 마지막까지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으면 하는 소시민적인 바람이 있었던 걸 부인하지 않겠다. 지하에서 날뛰는 불의 용은 그런 내게 통렬한 경고다.
이번 사태로 사물의 척도가 크게 흔들렸다. 특히 시간 척도가. 지금 확실한 것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후쿠시마 사태가 해결되는 걸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60살이지만 내 학생들, 동료의 아이들과 같은 젊은 세대도 앞으로 계속 이 불안과 우울의 세월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생이라는 시간 척도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절전을 위해 조명을 낮춘 상점가를 걸어 작은 영화관에 도착하니 아직 상영시작 한 시간 전인데도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만큼 관심이 높은 것이다.
그 영화는 <10만년 뒤의 안전>(원제 ‘Into Eternity’)이라는 2009년 제작 다큐멘터리 영화다. 한국에서도 개봉됐을까? 부디 많은 분들이 한번 보시기를 권한다.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서쪽으로 약 240㎞ 떨어진 올킬루오토라는 섬에 거대한 지하시설이 건설되고 있다. 방사성 폐기물을 지하 500m에 있는 18억년 전의 안정된 지층에 저장해서 인체에 해가 없어지는 10만년 뒤까지 보관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온칼로(핀란드어로 숨겨진 장소라는 뜻) 프로젝트’라고 한다.
원전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라고들 한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특수한 유리로 고정해 스테인리스 용기에 밀폐해서 30년에서 50년에 걸쳐 식힌 뒤 지하 수백미터에 묻게 돼 있는데, 일본에서는 아직 최종처리장 건설 장소조차 정하지 못했다. 폐기물 처리에 대한 아무런 전망도 세우지 못한 채 가동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도 사정이 어슷비슷하다.
그러나 10만년이 도대체 어떤 시간인가. 지난 100년간에만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큰 재해와 기후변동의 영향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변화를 견뎌내고 10만년 동안 계속 보관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도대체 10만년 뒤 인류가 존재하기나 할까. 미래의 인간이 다시 파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위험해. 파지 마!”라는 경고 메시지를 어떻게 10만년 뒤의 인류에게 전할 수 있을까.
10만년 전이라면 네안데르탈인 시대다. 우리는 네안데르탈인은커녕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나스카의 거대한 지상그림 메시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그럼에도 이런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나 시니컬한 삶인가. 인간은 어찌 이토록 터무니없는 일에 손을 대고 만 것인가.
방사능은 맛도 냄새도 없어서 감지할 수도 없다. 따라서 방사능 공포는 “아프다”거나 “뜨겁다”는 직접적 감각이 아니라 알아챌 방도가 없다는 불안에서 비롯된다. 상상력의 산물인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상상력을 차단한다고 해서 방사능 위험이 소멸하는 건 아니다.
미카엘 마드센 감독의 영상은 처절하도록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뼈가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동반한다. 그것은 10만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사태가 진행중임에도, 미디어들 여론조사에서는 원전을 ‘폐지 또는 감축’하기보다 ‘증설 또는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여전히 다수를 차지했다. 지방선거에서도 원전 추진 또는 용인파 지사들이 잇따라 당선됐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정부와 전력회사의 선전에 세뇌당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것도 한 요인이겠으나 작가 다카무라 가오루의 다음과 같은 해석이 내 생각에 더 가깝다. “후쿠시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괴로워서 그런 게 아닐까. 겪어본 적 없고, 앞이 보이지 않는, 언제 끝날지 전망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애써 눈을 돌리려 하고 있다.”(<도쿄신문>)
인간은 약하고 어리석다. 상상만 해도 두려운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눈앞의 편의나 이익만을 보고 사고를 정지한다. 전쟁이나 학살의 역사적 교훈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우행과 만행을 반복한다.
인간은 스스로 이 약함과 어리석음을 이겨낼 수 있을까.
<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논설위원 >
|
'시사,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 70위로 추락한 한국 ‘언론자유’ (0) | 2011.05.11 |
---|---|
속보이는 KBS의 ‘이승만 특집’, 당장 중단해야 (0) | 2011.05.07 |
‘카터’ 둘러싼 주류 언론의 이상한 셈법 (0) | 2011.05.07 |
노인 자살 (0) | 2011.05.06 |
불행한 어린이, 더 불행해질 우리 사회 (0) | 2011.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