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희망의 버스’는 다시 달린다

道雨 2011. 6. 25. 12:40

 

 

       ‘희망의 버스’는 다시 달린다 
 희망의 버스 최초 제안자 중 한 명이 말하는 ‘하루에 한 대씩 늘어난 희망’… 머잖아 제2차 희망의 버스 185대가 출발한다
 

 

 

지난 4월27일 콜트·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와 함께하는 수요문화제에 참가하려고 서울 홍익대 쪽으로 나갔다. 한국 재벌 순위 120위인 박영호 콜트·콜텍 사장은 인도네시아와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한 뒤 하루아침에 문자로 해고 통지를 보내고 위장폐업을 했다. 4년 전이다. 마침 쌍용자동차 해고 투쟁으로 거리에서 자주 만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한 명이 근처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송경동 시인 등과 만났다.

 

 

 

먼저 ‘희망의 봉고’가 있었다

 

우리는 매주 화요일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위로하는 문화제를 두어 달째 진행하고 있었다. 해고노동자 14명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부모의 자살로 고아가 돼버린 남매의 이야기는 세상을 울렸다. 죄지은 바 없이 거리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 마음도 함께 무너져가는 절망을 느꼈다.

 

»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와 오늘을 상징하는 이들이 지난 6월11일 ‘희망의 버스’에서 내려 김진숙을 향해 가고 있다. 팔순의 백기완 선생도, 칠순의 박창수 열사의 아버지 황지익 선생도 85호 크레인을 향해 가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는 단지 한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씨는 부산 영도의 85호 크레인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거제도에서는 전류가 흐르는 철탑 위에서 강병재씨가 목숨을 내걸고 있었다.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는 서울시청에서, 발레오공조코리아 노동자는 서울 충정로에서, 현대차 비정규직은 울산과 서울 양재동에서, 콜트·콜텍은 인천 부평에서 촛불문화제를 하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개별적인 고통으로 남기지 않고 함께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자연스레 우리는 구조적 절망을 넘어 어떻게 희망을 만들 것인지를 얘기하게 되었다.

 

마침 한진중공업 김진숙씨의 고공농성 129일째 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2003년 당시 정리해고에 반대해 김진숙씨가 고공농성 중인 85호 크레인에 올랐다가 129일째 되는 날 해고의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주익 열사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85호 크레인은 모든 노동자와 민중의 절망의 상징이 되고 있었다.

 

송경동 시인은 그 129일이 주는 압박감에 힘겨워할 김진숙씨를 위해 희망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모두 함께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야기는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앉은 자리에서 철도 예약은 가능한지, 누구에게 가자고 할지 등으로 이어지며 어떤 열망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절망을 넘어 즐거운 희망을 꿈꾸는 것은 어린아이들만의 특권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느새 밝아져 있었다. 아, 희망을 꿈꾼다는 것은 이렇게 신나는 일이구나.

 

그러나 며칠 뒤 우리는 ‘희망’을 잠시 접어야 했다. 쌍용자동차 농성 현장에 또 다른 희망의 프로그램이 잡혀버린 거다. 하지만 나는 그날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내가 활동가로 일하는 문화연대는 또 다른 희망으로 다른 하나를 접는 방식보다는 작게 시작해서 점점 커질 수 있게 꼬물꼬물 희망을 만들고 싶었다. 문화연대의 장기를 살려 미디어팀과 미술팀을 모아 작지만 즐거운 현장 작업을 하기로 하고, ‘희망의 봉고’ 한 대를 끌고 외로운 85호 크레인을 찾았다.

 

 

 

 

저절로 만들어진 밥과 프로그램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에서는 2012년 말까지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100만 행진’과 ‘사회협약 제정’ 운동에 나서자고 결의하고 그 첫 사업으로 도심 촛불문화제를 5월18일 재능교육 비정규직 농성장에서 진행했다. 이때 다시 2차 도원결의가 이루어졌다. 몇 명의 꿈이지만 벅찬 것이었다.

 

희망의 열차 아이디어는 희망의 버스로 진전됐다.

누구나 탈 수 있고, 무엇보다 해고노동자가 또 다른 해고노동자와 연대하고, 우리가 우리와 연대하는 버스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절망을 넘어 희망을 만들어가는 버스로 운행하자고 결의하고 바로 역할을 나누었다.

버스 대여를 알아보고, 시각 이미지를 만들 사람을 알아보고, 즐겁게 연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고민하며 이야기는 순식간에 여러 단계를 거쳐 확대되었고, 사흘 뒤인 5월21일 ‘희망 버스를 타러 가요’라는 제안문이 공개되었다. 20여 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뒤 어떻게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갔는지 알 수 없다.

 

모든 게 즐겁고 벅찼다.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야 했다.

무슨 돈으로 차를 빌리지? 참가비를 받자. 버스 빌리는 데 얼마지? 밥은 어쩌지? 참가자 각자가 알아서 먹는 걸로 하자. 잠은 어디에서 자나? 노숙해야지, 뭐.

마음으로 동의가 되는 사람들이 오겠지 했는데 진짜 그랬다. 웹에 만들어놓은 카페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이 들어와 신청했고, 좋은 기획 고맙다는 격려 의견도 달아주었다.

 

희망의 버스 2대가 3대로, 3대가 4대로 하루에 한 대씩 늘어나는 것을 보며 신기해할 즈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문정현 신부가 아침밥을 만들어준다고 하고, 갈비연대에서는 수백 명이 먹을 고기를 보내준다고 하고, 파견미술팀은 이미지를 만들어 온다고 하고, 음악하는 사람은 공연을 자청한다. 문인들은 언론에 기고글을 쓰고 책을 후원한다고 하고, 미디어활동가들은 영상 제작 후원을 하고, 사진작가들은 사진을 찍어준다고 한다.

 

광장을 스스로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밥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프로그램을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스스로가 프로그램이 되고 밥이 되고 희망이 되었다. 일하면서 이렇게 즐겁기는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아니, 일한다는 느낌보다는 즐거운 소풍을 준비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준비하는 모두의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6월11일, 출발하기 전날 한진중공업에서 들려온 소식은 침통했다. 회사 쪽에서 출입문을 컨테이너로 봉쇄하고 용역 수백 명을 공장 안팎에 배치시켜 희망의 버스 방문을 차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희망 버스를 지켜야 한다’던 해고노동자가 다시 병원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우리의 희망 버스가 한진 해고노동자에게 오히려 짐이 되는 것은 아닌지,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우리의 희망을 짓누르려는 회사 쪽과 경찰의 행태에 피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185대 희망의 버스를 향하여

 

 

드디어 희망 버스 탑승일. 사람들이 안 오면 어쩌지, 버스가 남으면 어쩌지, 불안했다. 그러나 기우였다. 6월11일 저녁 6시30분, 서울시청 광장 옆에 있는 재능교육 농성장에는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한 무리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늦게 오는 사람이 꼭 있으니 마지막 차 한 대는 조금 늦게 출발하자고 했는데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일찍 도착해서 삼삼오오 즐거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맑고 밝고 즐거운 얼굴들이었다. 이 해맑음과 선함이, 소박함이 희망이었고, 희망 버스였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절망의 벽 하나를 넘었다. 한진은, 김진숙은 이제 물러설 수 없는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그러곤 6월15일 오전 10시, 우리는 다시 결의했다. 저 외로운 여성 노동자에게 향하는 2차 희망의 버스를 타자고. 이 절망의 벽을 잠깐 타고 넘을 것이 아니라 아예 무너뜨려버리자고 결의했다. 이번엔 185대다. 우리는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희망이다. 희망의 버스다.

 

< 신유아 문화연대 활동가 >

 


 

 

          애타게 진숙씨를 찾아서 
 시민과 한진중 노동자를 잇는 오작교가 된 김진숙, 그리고 그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오작교가 되겠다는 시민의 만남
 
» 김진숙씨는 지난 6월11일 찾아온 이들에게 “제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비틀거릴 때마다 천수보살의 손으로 제 등을 받쳐주신 여러분, 꼭 이기겠습니다. 157일이 아니라 1570일을 견뎌서라도 반드시 이기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한겨레21 김경호

 

 

이 글을 읽지 않아도 좋다. 글을 읽고 동영상을 볼 시간이 없다면 먼저 영상을 보시길 권한다. 포털 사이트나 유튜브에 들어가 ‘김진숙’을 입력해보시길.

지난 6월11일, 1천여 명이 희망의 버스를 타고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을 찾아간 날,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씨가 35m 상공에서 애끓는 목소리로 했던 두 번의 투쟁사 동영상이 나온다.

발언이나 연설이란 상투적 단어에 의미를 다 담을 수 없는 그 말에 잠시 귀기울여보시길.

왜 52살의 여성이 자신이 해고자 명단에 오른 것도 아닌데, 겨울·봄·여름 160일을 넘게 저기서 저러고 있는지 아는 데 10분, 아니 5분이면 충분하다. 혹시 영상에 나오지 않는 얘기도 궁금한 당신을 위해 그녀의 연설에 그날의 풍경을 더해 전한다.

 

 

“김주익이 한 달 넘게 봉쇄된 공장이 마침내 뚫려 사람들이 이 85호 크레인 밑에 모이던 날, 그 소 같은 사람이 울었습니다. 그랬던 사람을 우리는 끝내 못 지켰습니다. 어제 용역들에게 공장 문들이 차례차례 무너지는 걸 보면서 볼트를 한 가마니 올렸습니다.”

 

 

돌아오고 나서야 알았다. 왜 6월11일인지를.

폭우가 내린 8년 전 이날엔 한 사내가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명예퇴직에 반대하는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김주익 위원장이었다. ‘불법 해고·손배가압류 철회’를 외치던 김 위원장은 고공농성 129일째 되던 날, 크레인 난간에 목을 매 생을 마감했다.

서울에서 6시간을 버스로 달려 도착한 85호 크레인 앞의 플래카드는 한진중공업의 역사를 말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김주익 열사가 땅에서는 곽재규 열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배달호 열사 정신계승사업위원회’.

그렇다면 땅의 곽재규는 누구인가. 김 위원장의 죽음을 온전히 자신의 탓이라 여겼던 순박한 ‘늙은 노동자’ 곽재규 조합원은 아끼는 후배가 숨진 지 보름 만에 4호 독에서 몸을 던졌다. 85호 크레인 뒤쪽 4호 독 앞, 곽재규의 마지막 자리에서 김주익의 마지막 자리에서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제가 오작교가 되어 등어리가 다 벗겨지더라도 우리 조합원들과 여러분들, 꼭 만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깨진 어항에서 흘러나온 금붕어처럼 숨을 헐떡거리는 저 사람들에게 우리가 외롭지 않음을, 우리의 싸움이 정당한 것임을 다시 확인시켜주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조합원들 한번 봐주십시오. 평생 일한 직장에서 아무 잘못 없이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박창수·김주익·곽재규가 목숨을 던져 지켜낸 그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나를 버린다 해도 나는 저들을 버릴 수 없는 이유가 100가지도 넘는 사람들입니다.”

 


 

 

벌써 20년이 흘렀다. 1991년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은 안양병원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경찰이 자살로 몰아간 그 죽음의 진실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가리지 못했다.

그리고 2011년 6월12일, 고 박창수 위원장을 키운 아버지 황지익 선생이 크레인 아래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황 선생은 “진숙이가 우리 창수랑 (입사) 동기잖어”라고 말문을 열었다. 백발의 노인은 “아까 진숙이와 통화했는데, 절대 딴마음 먹지 말라고 했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일흔다섯의 노인이 1월에도, 5월에도 이곳에 왔었단다.

김진숙씨가 내려오면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고생했다. 너 같은 사람 없다. 네가 대한민국 노동자 모두 살렸다.”

 

 

“저는 우리 조합원들이 혁명적 의지로 불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키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6개월 전까지 살아왔던 그 삶을 지켜주고 싶은 것뿐입니다. 저녁이면 땀냄새 풍기며 집에 돌아가 새끼들 끼고 저녁 먹고, 여러분들이 오늘까지 누려왔던 그 소박한 일상들을 지켜내고 싶은 것뿐입니다.”

 

 

희망의 버스에 탄 진용주씨는 김진숙씨를 “가슴이 아니라 머리를 울리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2003년 10월 김주익 열사 장례식과 11월 노동자대회에서 김진숙씨가 했던 추도사를 들어보면 그 의미가, 전율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희망의 버스는 김진숙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하늘의 김진숙만 쳐다보는 이들에게 하늘의 김진숙이 말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85호 크레인을 생각하셨다면, 이제부터는 우리 조합원들을 기억해주십시오. 2003년 그 모질었던 장례투쟁의 와중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현서·다림이의 아비 고지훈·김갑열을 기억해주십시오. 잘린 동생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최성철을 기억해주십시오. 말기암으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아버지보다는 동료를 지키기 위해 농성장을 지키는 박태준을 기억해주십시오. 비해고자임에도 이 크레인을 지키고 있는 한상철·안형백을 기억해주십시오.”

 

 

크레인 아래를 눈물바다로 만든 85호 여인의 연설이 끝나고 한진중공업 노동자와 얘기를 나누었다. “모두들 85호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 비고해자이면서도 현장을 지키는 그의 첫마디였다. 스무 살에 한진에 들어와 18년을 일했다는 그는 회사가 컨테이너로 공장 출입을 봉쇄한 것을 두고 “(노동자가) 옥쇄를 한 것이 아니라 옥쇄를 당했다”면서도 “잘 끝나겠죠”라고 낙관했다. 그의 말을 듣자, 정말로 정리해고가 철회될까, 멀리서 비관했던 ‘모르는 자’의 불안이 ‘내부자의 따뜻한 확신’에 녹았다.

 

그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몸뻬 바지를 입은 ‘날라리 외부세력’이 부르는 ‘뽕짝 메들리’가 들렸다. “내가 내가 못 잊을 사람아 진숙아~ 진숙아 내가 정말 사랑한 진숙아~ 내 어깨 위에 날개가 없어 널 찾아 못 간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지상의 승객은 하늘의 진숙씨와 함께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아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은하수 건너 오작교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우리는 만나야 한다~”를 목놓아 불렀다.

아침이 밝았고, 오후가 되었다. ‘승객들’을 보내는 ‘크레인’의 인사가 있었다.

 

 

“이 자리에 강병재 동지가 계십니다. 기억나십니까. 15만4천 볼트 송전탑에서 홀로 88일을 견뎠던 분입니다. …그 강병재 동지가 마침내 살아서 땅을 딛고 여기를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 날라리들과 어울려 춤을 추던 강병재 동지를 봤습니다. 그 앞에서 함께 어울려 춤추던 한진지회 박성호 동지도 또한 봤습니다. 박창수 위원장 시절 상집간부를 했고 해고됐고 징역 세 번 갔고, 김주익·곽재규의 목숨값으로 15년 만에 복직됐다 이번에 다시 해고됐습니다. 그 두 사람이 날라리들과 어울려 춤추는 모습을 보며 저는 벅찼습니다. 손뼉을 치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제가 꿈꾸는 세상의 모습을 봤습니다. …살아 내려가 현장에서 꼭 다시 뵙겠습니다. 웃으면서 끝까지 투쟁~.”

 

 

김진숙씨는 크레인에 오르기 직전에 남긴 글에서 소원이 있다고 했다.

“주익씨가 못해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한진중공업을 떠나면서 희망의 버스 승객들은 “지상으로 내려오는 한 계단 한 계단을 한 사람씩 책임지자”고 서로에게 약속했다. 그리하여 “158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계단 내려가는 연습을 해온 대로 제 발로 저 계단을 내려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너무나 애달프고 너무나 그리워서 차마 보고 싶단 말도 쉽게 못했던 사람들을 얼싸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며 끝내 목이 메는 52살 여성 노동자를 지상으로 내려보내는 오작교가 되자고 다짐했다.

 

어느 희망의 버스 승객이 썼다.

"희망을 주러 갔다가 얻고 갑니다.”

다음날 ‘진숙씨’의 트위터에는 “버스는 갔지만 내려놓고 간 희망이 자라고 있습니다”라는 응답이 올라왔다.

 

미안하지만, 희망의 버스는 멈추지 않는다. 한진중공업 가족대책위의 고사리손들이 울며 떠나는 이들의 손에 건넨 양말을 신고 다시 애타게 진숙씨를 찾아서, 아니 성호씨·지훈씨·갑열씨·성철씨·상철씨·형백씨를 찾아서 버스에 오를 것이다.

 

< 부산=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이명박 정부 들어서 2008년 실시한 부자감세 조처로, 이 대통령 재임 5년간 총 96조원, 그리고 그 뒤에도 매년 25조원(이상 2008년 불변가격)의 감세 혜택이 부유층에게는 계속되고 있다.

 

*** 4대강 사업 시작 전에는 4대강 하천관리비용으로 매년 약 250억원이 들어갔는데, 총 22조원의 예산을 투입한 4대강 사업 이후로는 관리비용(이자비용 4천억원 포함)이 이전의 40배인 약 1조원(최소 7천억원)이 매년 소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