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KBS, 머리만 굴속에 집어넣다

道雨 2011. 7. 29. 12:44

 

 

 

          KBS, 머리만 굴속에 집어넣다 

 

KBS 도청 의혹 사건은 동업자인 기자사회 안에서 더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 김종구 논설위원
기자들 사이에 편법 취재 경험이 자랑스러운 무용담으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관원을 사칭한 취재, 사무실 문 따고 들어가기, 책상 밑에 숨어서 회의 내용 엿듣기, 중요 문건 들고 나오기….

이런 공세적인 취재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치열한 기자정신의 상징으로 추앙되고 칭송받았다.

 

1992년 12월 대선을 눈앞에 둔 시점, <한겨레> 기자들이 불법 선거운동을 벌이던 부산지역 한 단체 사무실에 밤에 몰래 들어가 취재를 한 적이 있다.

불법 선거운동을 입증할 문서 등을 챙겨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만 순찰중인 경찰과 마주쳐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이런 경우 빨리 현장을 뜨는 것이 상책인데 다음날 기자들이 관할 경찰서장에게 사과 인사차 들르는 바람에 붙잡히는 신세가 됐다.

 

구속 위기 직전까지 몰렸던 이들은 다행히 ‘부산지역 기관장 대책회의’ 사건(초원복집 사건)이 터지면서 풀려났고 뒤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당시 팀장으로서 아직도 그 후배 기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는 사건이다.

 

 

예전에 기자들 사이에 이런 공세적인 취재가 별로 죄의식 없이 받아들여진 것은 시대적 환경과도 무관치 않았다. 권위주의 정권의 각종 불법(不法)에 맞서 진실을 알리기 위한 언론의 비법(非法)은 어느 정도 용인된다고 여긴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낭만이고 열정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런 취재방식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한국방송의 도청 의혹은 편법 취재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향수에 비춰 봐도 너무나 엉뚱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동업자인 기자사회 안에서 오히려 더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많은 기자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취재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편법쯤이야’ 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기자들이 한국방송에 냉담한 것은 애초의 도청 의도 자체가 보도 목적과는 동떨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는 “몸뚱이는 다 밖으로 내놓고 머리만을 굴속에 처박은 형국으로 천하를 외면하고 삶을 훔치려 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지금 한국방송의 모습을 그처럼 적절히 묘사할 수가 없다. 휴대전화와 노트북 분실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이 모두 ‘머리만 굴속에 처박은’ 꼴이다.

 

언론이 가진 탁월한 능력의 하나는 사물을 객관화시키는 것인데 한국방송은 이런 능력을 철저히 상실했다. 흔히 언론인들 사이에서는 ‘기자들이 똑똑한 것 같지만 막상 자기 일이 닥치면 어수룩하기 짝이 없다’는 자조 섞인 농담도 오가지만 한국방송의 어리석음은 실로 하늘을 찌른다.

 

한국방송의 대응 전략이 고작해야 비리 혐의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의 뻔뻔한 행태를 그대로 본받은 점도 마찬가지다.

“기사를 쓰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나, 증거가 드러나도 “그런 일 없다”고 끝까지 잡아떼는 것이 똑같다.

그동안 각종 비리 사건을 취재하면서 터득한 학습효과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방송>이 언론으로서 비웃고 비판해온 행태를 그대로 따라 하니 참으로 창피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사건에 ‘한국방송 대 경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누가 봐도 뻔한 사건인데도 한국방송이 계속 발뺌하는 밑바탕에는 “경찰이 우리를 감히”라는 인식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여겨져서다.

 

검찰을 결코 높게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검찰이 수사를 맡았어도 한국방송이 저렇게 억지를 부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경찰 수사를 보면 나름대로 평가해줄 대목도 없지 않으나 썩 기대에 미치는 것은 아니다.

경찰이 시일을 끌지 말고 이런 의구심에 해답을 내놓을 시점이다.

 

< 김종구, 한겨레 논설위원 kjg@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