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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시민 동원 논리로 악용된다면, 주민에 의한 민주주의 실현 아닌 권력에 의한 민주주의 찬탈 주민투표를 서울시가 관장하는 것은 ‘누구도 자신의 사건에 대하여 판관이 될 수 없다’는 자연적 정의를 거스르는 일
서울시는 끝내 주민투표를 강행할 모양이다. 교육복지에 대하여 국민의 뜻을 묻자는 근본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주민투표는 너무나 문제가 많다.
첫째, 이번 주민투표를 서울시가 관장하는 것은 이상하다. 이번 주민투표는 주민들의 청구라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실질은 시장에 의한 선거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시의회는 이미 무상급식에 대한 조례를 제정하였고, 시장은 그 공포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즉 시장이 시의회와의 대립 상황에서 주민들에게 직접 호소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언뜻 보아서 이는 당연하며 또 민주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법은 그러한 주민투표는 상정하고 있지 않다.
먼저, 지방자치법 107조에 따라 시의회의 조례 의결에 대하여 시장이 반대할 경우 시의회는 절대다수결로서 재차 의결할 수 있고, 그것으로 조례 제정은 확정된다. 만약 그 의결이 법령에 위반된다고 판단할 경우 시장은 대법원에 소를 제기할 수 있다. 여기에 그 외의 다른 수단, 즉 주민투표는 해당사항이 없다. 실제로 서울시는 그렇게 대법원에 소를 제기해 놓은 상태이고, 이제 결과를 기다리면 된다. 주민투표법 7조에서도 재판중인 사항은 주민투표에 부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다음으로 주민 청구에 의한 주민투표의 관리 주체는 시장으로 되어 있다. 시장은 법 12조에 따라 청구인서명부의 심사 및 확인 업무를 관장하고, 법 4조에 따라 공보·일간신문·인터넷 등을 통해 각종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법 13조에 따라 주민투표의 발의자가 된다. 이와 같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장의 역할은 시장과 의회의 대립을 해소하는 주민투표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주민투표가 법의 취지와 맞지 않게, 시장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시민 동원의 논리로 악용된다면, 이는 주민에 의한 민주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권력에 의한 민주주의의 찬탈에 불과할 것이다.
둘째, 청구인 서명 과정의 절차적 하자가 중대하고 명백하다. 주민투표 청구인 대표자인 ‘복지포퓰리즘추방국민운동본부’는 청구요건인 41만8000명의 두 배인 80여만명의 서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청구인서명부는 불법과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 시민단체들은 청구인 서명부의 75%를 열람한 결과 대리서명, 동일필체, 허위서명 등 13만4000여건의 ‘불법’ 사례를 발견하였다.
또한 서울시 주민투표청구심의회의 확인절차에서도 30만명 이상의 서명이 무효로 판정되었다. 이는 단지 전산 조회만에 의한 것이고, 육안 검사는 이의신청이 제기된 서명 중 9만5000건 정도에 불과했다.
불법·무효 서명이 자그마치 40%에 육박하는 이 엄청난 규모의 부정은 주민들의 자발적 청구라는 주민투표의 취지를 무색케 한다. 이는 주민들의 진정한 민주적 의사를 오히려 훼손하고 왜곡하는 것으로서, 주민투표의 민주주의적 본질에 반한다. 유효서명의 총수가 청구요건을 채웠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가? 만약 100만명의 서명 가운데 50만명의 서명이 불법·무효라면 그것을 적법하다고 할 수 있을까? 150만명 가운데 100만명의 서명이 불법·무효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아가 만약 80만명이 넘는 서명 숫자를 작출해 낸 것이 서명명부의 전수조사를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는 적법한 서명 확인 절차를 방해하기 위한 악의가 있는 것이며, 거의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라는 범죄적 수준이다.
이러한 절차적 불법 및 부당성에도 주민투표가 관철된다면, 이는 민의의 확인이 아니라 민의의 조작이며, 민주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타락에 불과할 것이다.
셋째, 주민투표의 청구 취지가 문제이다. 서울시 주민투표청구심의회에서 최종 인정한 투표 청구 취지는 “소득 하위 50%의 학생을 대상으로 2014년까지 단계적으로 무상급식을 실시하거나, 소득 구분 없이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초등학교(2011년), 중학교(2012년)에서 전면적으로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것” 중에서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두 선택지가 결국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도 문제일뿐더러, 시장이 원하는 앞의 선택지는 도무지 주민투표로 성립하기 어렵다.
도대체 50%란 숫자가 도대체 어떻게 나온 것인가? 학교급식법 9조에서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급식 경비의 ‘전부’ 혹은 ‘일부’를 지원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 ‘일부’를 지원할 경우 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권자, 차상위계층, 한부모가족지원법에 의한 보호대상자, 도서벽지의 학생, 농어촌학교와 그에 준하는 지역의 학생, 교육감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학생 등 단계적 지원 기준도 명시되어 있다.
여기에 50%와 같은 임의적 숫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임의적인 기준 설정을 위한 주민투표가 합당하다면, 무상급식을 소득 하위 55% 이하의 학생들에게로 확대할 경우에 다시 주민투표를 해야 할까? 45%로 줄일 경우에도 또 주민투표를 할 것인가? 아예 서울시 예산안을 매년 주민투표에 부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주민투표법 7조 2항 3호에는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에 관한 사항은 주민투표에 부칠 수 없게 되어 있다.
아마도 그 50%의 수치는 학교 급식에 대한 재정지원을 ‘제한’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주민투표가 아니라 법률, 아니 헌법을 바꾸어야 할 사항이다. 이미 본 바와 같이 학교급식법에서는 국가 또는 지자체가 경비의 ‘전부 혹은 일부’를 지원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주민투표법 7조 2항 1호에서는 법률에 반하는 내용은 주민투표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나아가 헌법에 규정된 무상 의무교육의 범위에 관한 해석에서도 급식과 같은 학업필수비를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아가 주민투표 청구 취지의 두 선택지 모두 ‘무상급식’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 범위 혹은 우선순위에서 조금 다를 뿐이다. 이처럼 근본적인 차이가 없는 선택을 위하여 꼭 주민투표라는 궁극적 수단을 동원해야 할까? 그렇지 않아도 내년 봄에는 총선이 있고, 겨울에는 대선이 있다. 총선으로 새로 구성되는 의회, 그리고 대선에 의하여 교육복지의 큰 틀이 새롭게 짜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번 주민투표의 유효 기간은 단지 길어야 1년이다. 이런 주민투표의 실익이 도대체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이번 주민투표는 불공정하며, 불명예스러우며, 무익하다.
이번 주민투표를 서울시가 관장하는 것은 ‘누구도 자신의 사건에 대하여 판관이 될 수 없다’는 자연적 정의에 어긋나며, 의회가 법에 따라 확정한 조례를 거부하기 위하여 시장이 주민투표를 활용한다면, 이는 탈법적이며 정략적인 ‘플레비사이트’(Plebiscite)의 선례를 만들 것이다.
불법·무효 서명으로 얼룩진 이번 주민투표 청구를 인정하는 것은 주민들의 불법행위를 합법화하고, 민주적 절차의 악용과 타락을 고무하는 불법국가의 길을 예비할지도 모른다. 학교 급식에 대한 근본적 차이를 낳지 않는 주민투표, 법률 및 헌법적 사항에 대한 주민투표, 시장의 정치적 선명성을 과시하는 주민투표는 민주주의의 낭비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킬 따름이다.
학교 급식을 특정 수혜자에게 제한적으로 제공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아이들에게 원칙적으로 제공할 것인지는 그 나라 복지정책의 근본 철학에 관한 문제이다. 법률적·헌법적 차원에서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이다. 필자는 아이들 사이에 ‘선’을 긋는 일은 가능한 한 삼가야 한다고 본다. 누가 수혜자인지 아닌지 아이들이 구체적으로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의 공동생활에까지 사회적 계층구분의 잣대를 들이미는 제도 자체에 반대한다.
물론 이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 있다. 공정하게, 떳떳하게 그리고 사리에 맞게 국민들의 의사가 표출되고 확인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진행되는 주민투표 절차는 우리 민주적 기본질서, 국민들의 투표권에 대한 모독에 가깝다. 오세훈 시장의 주민투표 ‘사주’ 전략은 우리 민주주의 헌정사에서 하나의 수치로 기록될 것이다. |
< 정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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