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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과 융건릉, 그리고 용주사 (2012. 5. 19 - 20)

道雨 2012. 6. 1. 18:22

 

 

        수원 화성과 융건릉, 용주사 (2012. 5. 19-20)

 

* 수원에서 있었던 조카 석진이 결혼식(2012. 5. 19) 참석차 토요일 하루 휴진하고, 일요일을 끼어 수원 화성과 융건릉, 용주사를 다녀왔다.

 

수원 화성은 조선 정조 때 신기술로 축조되어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성곽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융건릉은 융릉과 건릉을 합하여 부르는 것인데, 융릉은 사도세자(장조)의 능이고, 건릉은 그의 아들인 정조의 능묘이다.

 

용주사는 융건릉에 인접한 곳에 있는 사도세자의 원찰 및 능침사찰로서, 현재 조계종 제2교구의 본사이다.

 

 

 

 

* 방화수류정은 화성에 남아있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세련된 아름다움을 가진 건물이며, 전시에는 장대로 활용되기도 한 정자이다.

방화수류정이라는 이름은 꽃과 늘어진 버드나무를 탐방, 감상한다는 뜻이다.

이 정자의 바깥에는 인공으로 조성한 연못이 있으며, 인근의 화홍문 수구를 통해서 성 밖의 개울물이 성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 방화수류정 가까이에 있는 암문(暗門 : 성 안팎을 몰래 드나드는 문)

 

 

* 이 암문에서 서의 바깥 쪽을 본 모습. 이렇게 훤히 노출된다면 암문으로서의 가치가 없을 듯... 뭔가 복원이 잘못된 듯 하다.

 

 

* 물이 통하는 홍예가 7개나 설치된  화홍문.

이 수구를 통해서 성 밖으로부터 성 안으로 물이 흘러들어 온다.

 

 

* 화홍문 밖의 물길 모습. 사진 촬영을 나온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 화홍문에서 성 안쪽으로 물이 흐르는 모습. 물가 양 옆으로 늘어진 버드나무가 보인다.

 

 

* 화홍문 바깥 쪽에서 본 방화수류정.

 

 

* 성 밖에서 본 화홍문의 모습.

 

 

* 화포가  설치된 포루의 모습.

 

 

* 포루의 바닥에 나 있는 구멍이 궁금하다.

 

 

* 바닥에 나 있는  구멍인데 바깥과 통해있고,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크고 길다. 

무슨 용도일까?

배수로?

아니면 포루를 기어오르는 적군을 공격(뜨거운 물이나 기름을 붓는 등)하기 위한 것일까? 

 

 

* 수원 화성의 북쪽 정문인 장안문의 모습이다. 이 장안문은 우리나라 성곽 문루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서울의 숭례문(남대문) 보다 크다는 말이다.

성문 앞에는 성문을 쉽게 공격하지 못하도록 옹성(甕城)이 둘러져 있다.

 

 

* 서북공심돈과 화서문.

수원화성에는 우리나라의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의 건물이 있는데, 바로 공심돈(空心墩)이다. 

공심돈은 안이 비어 있는 돈대(초소)라는 뜻으로, 먼 거리를 보기 위해 높이 쌓은 망루라고 보면 된다.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 특이하며, 현재 화성에는 이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이 있다.

 

 

 

* 가까이에서 본 서북공심돈.

 

 

 

* 서북공심돈의 출입구 쪽인데, 자물쇠로 잠겨있어 안에 들어가 볼 수 없었다.

 

 

* 어두워진 후 성 밖에서 본 화성의 포루 모습.

 

 

 

* '화성장대'란 현판을 달고 있는 서장대.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전투 및 훈련을 총 지휘하던 곳이다.

정조 임금이 이곳 서장대에서 군사들의 훈련을 직접 지휘하였다고 한다.

 

 

 

* 자연 암반 위에 그대로 기초석을 더한 모습.

 

 

* 서장대 옆에 있는 서노대.

서노대는 깃발을 흔들던 곳으로, 깃발의 색깔에 따라 적의 방향을 구분하여 알려주었다고 한다.

 

 

* 서장대 근처에 있는 암문.

이 암문은 성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그 역할을 제대로 했을 듯 싶다.

 

 

 

* 붉은 빛을 띤 성벽의 모습.

획일적으로 다듬어 쌓지 않고, 돌의 모양을 살린 그렝이 공법으로 쌓아 더욱 튼실하게 보인다.

 

 

수원 화성 안에는 정조 임금이 화성 행차시에 머물던 행궁과 화령전이 복원되어 있는데, 화령전에는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있다고 한다.

 

 

 

* 사도세자(장조)의 능묘인 융릉.

 

 

 

* 융릉 가는 길 중간에는 자연스럽게 쉴 수 있는 나무 그늘이 많아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즐길 수 있다.

비운의 세자였지만, 후세에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장소가 되었으니 다행이다.

 

 

융릉과 가까운 곳에는 정조의 능묘인 건릉이 있어 함께 돌아볼 수 있지만, 내가 무릎 부상으로 걷기가 힘들어 집사람이 대표로 보고 오도록 하였다.

융릉과 건릉을 합쳐 융건릉으로 통칭되는데, 휴일에는 주차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융건릉의 매표소를 지나 왼편에 있는 전시관에서는 몇 가지 전시물도 있지만, 조선왕릉의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비디오를 보여주는데, 그 방법이 정말 기발하고 감탄할 정도이다.

 

 

융건릉과 기까운 곳에 용주사가 있는데, 이 절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 및 능침사찰로 지어진 절이다. 갈양사라는 절이 이미 폐사된 곳인데, 정조가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다시 지은 절이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 용주사(龍珠寺)라고 하였다고 한다.

 

용주사는 그 규모는 작지만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의 위치를 점할 정도로 격이 높은 절이며, 김홍도의 부모은중경 그림과 목판, 최초로 서양화의 음영기법을 도입한 대웅전의 후불탱화 등이 전하며, 신라종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고려 초기의 범종(국보 제120호)이 있다.

 

대웅보전의 오른편에는 호성전(護聖殿)이라는특이한 이름의 전각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으로, 6.25 때 불탄 것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밀양의 표충사(表忠寺) 절 안에 사명대사의 사당인 표충사(表忠祠)를 둔 것과  흡사하다고 할 것이다.

 

용주사가 일반 절 건축에 비해 폐쇄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신도들의 출입 보다 사도세자의 사당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기에 그리 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 얼마 전에 작고한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49재도 이 절에서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