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진

삼랑진 작원관지 답사 사진 (2013. 3. 16)

道雨 2013. 3. 21. 17:33

 

 

 

               삼랑진 작원관지 답사 사진 (2013. 3. 16)

 

 

산이 높아 날짐승만 넘나들 수 있다 하여 까치 '작'()자를 취하였고, 여행하던 관원들이 쉬어 가는 역원이라 하여 '원'()자를 취했으며, 그리고 나루터와 관문의 기능을 갖춘 곳이라 하여 '작원관'(鵲院關)으로 이름 하였다.

이곳고려시대부터 요새를 두었던 곳으로, 문경 새재 조령관과 더불어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제일 관문이었다.

 

이 곳에서 열린 작원관 전투는 1592년 임진왜란 초,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한 소서행장의 정예 18,700여명을, 밀양부사 박진이 300여 명의 병졸과 지역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이곳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결사항전해, 왜적의 진군을 늦춘 성공적인 전투로 평가된다.

1939년에 경부선 부설 때 작원관 한남문이 있었던 자리에 작원관문기지비(鵲院關門基址)를 세웠고, 1995년에는 작원관을 복원하였다. 복원된 작원관은 성문 한남문과 문루 공운루로 되어 있다.

원래의 작원관은 이곳에서 700~800m 아래쪽 천태산 노적봉 아래 조금 못 가서 있었다고 한다.

 

 

* 작원관터에 복원된 관문과 문루.

  문루의 현판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관문의 홍예에 새겨진 글씨는 좌측에서 우측으로 되어있어서 어색하다. 

 

 

 

* 한남문은 남쪽을 지키는 관문이라는 뜻이다. 낙동강을 끼고 남쪽으로부터 올라오는 적을 방어하겠다는 뜻이다. 

 

 

* 한남문 위에 있는 문루이며, 공운루라고 씌어있다. 구름에 둘러싸인 누각이라는 뜻인가? 낙동강에 피어오르는 안개를 구름에 비유한 듯...

 

 

 

 

* 위쪽에 보이는 것은 작원관 위령탑.

 

 

* 작원관 위령탑.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이들을 위한 위령탑이다. 

 

 

 

 

 

* 작원관 안쪽에서 이령탑 쪽으로 올려다 본 모습. 오른의 건물이 한남문 공운루.

 

 

 

 

 

* 작원관지에 남아있는 비석 3기.

 

비각 내에는 3개의 비가 있습니다. 작원대교비, 작원진석교비, 그리고 작원관문기지비입니다.

 
한편

 

* 작원진석교비(鵲院津石橋碑)는 자줏빛 사암으로 만들어져 붉은 색깔을 띠고 있습니다. 조선 숙종 16년(1690년)에 세웠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리는 대로에 접하므로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다. 옛날부터 나무로 만들었더니 보수하거나 허물어질 때마다 사람들이 노역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안태에 사는 동지(同知) 오인발(吳仁發)이 분개하며 한탄하더니 스스로 화주가 되어 몇 년 만에 드디어 석교가 완성됐다. 재물이 소모된 것이나 인력이 투입된 것은 세세히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는 다만 한 시대 한 고을 거주민들을 무사하게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온 세상 길손들이 지나는 곳이 됐으니 영원히 칭송할 바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한다.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뒤에 같이 그 일을 주동한 사람은 오홍건(吳弘健)과 □병□ 그 사람이다. 안태리 200호가 2월에 노역을 시작하여 8월에 이르러 7달 만에 끝났다. 숙종 16년(1690년)인 강희(康熙) 29년 경오 9월에 세웠다.

 

 

 

* 작원관원문기지비. 작원관의 원문(관문)의 기초가 있던 곳이라는 뜻이겠죠.

 

 

작원대교비(鵲院大橋碑)는 조선 인조 20년(1642년)에 작원포에 다리를 놓은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웠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어산(萬魚山)에서 흘러온 물이 낙강(洛江, 낙동강)에 드는 곳이 작원포(鵲院浦)인데, 서울에서 동래로 가는 자는 모두 이리로 간다. 옛날부터 나무로 시렁을 만들어 (다녔는데) 쉽게 무너지니 율동(栗洞 , 삼랑진읍 율동리) 청룡(靑龍, 삼랑진읍 용전리?) 두 동네 사람들이 노역을 도맡아 했다. (…)
이에 사람들을 모집하여 돌을 깎아 이어서 다리를 만들었는데, 율동과 청룡 두 마을 사람들이 각각 3년 동안 나와서 일했다. (1640년) 초 1월에 시작하여 (1642년) 4월에 끝이 났다. 공사에 든 돈과 노역을 충당하였으니 진실로 아름답지 아니한가. (…) 그때 노역한 사람들과 공인 덕분에 일이 무사히 마쳤으니 그 일을 기록하여 돌에 새겨 후세 사람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함이다. 이후에 길을 가는 사람들은 그 내용을 읽어 보면 착한 마음에 유연히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이에 새기노라.

 

* 위령탑에서 남쪽 방향으로 경부선 철길의 터널 쪽을 바라본 모습.

 

 

* 터널 위쪽 암봉의 모습.

 

 

*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왜군을 맞아 전투를 치루다 순절한 군사들의 위령탑이다. 작원관 전투. 

 

 

* 작원관은 임진란  때에 밀양부사 박진이 왜군을 맞아 항전하던 곳으로, 왜군이 한양으로 진군하는 시기를 늦추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 '작원관 임란 순절용사 위령비'.

 

 

* 작원관이라고 새겨진 현무암에 강 건너편의 모습이 석양의 햇빛과 더불어  반사되고 있다.

 

 

 

* 위령탑에서 내려다 본 낙동강의 일몰 풍경.

 

 

* 강 건너편(김해시 생림면)의 모습.

 

 

* 낙동강의 아래쪽 풍경.

바로 아래에  경부선 철길이 지나고 있는데, 이곳 위치가 삼랑진역과 원동역 사이에 해당한다.

 

 

* 강물이 휘어져 돌아가는 곳에 위치하여, 풍광이 매우 좋다.

 

 

 

 

* 경부선 열차가 지나가고 있다.

 

 

 

 

 

 

*** 항복한 왜장 김충선과 박진, 그리고 녹동서원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585번지에  녹동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녹동서원은  慕夏堂  金忠善(1571- 1642)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여  춘추로  제향한다.

 

김충선은  원래  일본인  沙可也이고  加藤淸正의  좌선봉장이었다.

평소  인륜을  중시하였고  조선의  문물과  인륜중시사상을  흠모하던  중  전쟁에  참가하게  되자

곧  이어  경상도  좌병사이던  朴晉(전  밀양부사)에게  투항하였다.

장군은  이어  조선군에게  조총  제작  기술을  전수하고  경주, 울산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우고,  선조로부터  성(賜姓  김해  김씨)과  이름을  하사받았다.

장군은  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에도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삼란공신으로  불렸다.

노후에  우록으로  낙향하여  가훈과  향약을  지어  주민들을  가르치다가  인조  20년에  사망하였다.

 

1789년(정조  13년)  지방  유림에  의하여  창건되었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85년에  재건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71년  국고지원으로  다시  세워졌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무자비한  살륙을  보고,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조선군에  투항하였다.

전쟁  초반의  열세를  만회하게  된  것은  장군의  조총제작술과  적전  내부비밀에  힘입은  바

크다.

일본  입장에서는  배신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애초부터  침입이  명분없는  전쟁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장군의  행동은  더  높은  인류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에  밀양부사로  있다가  작원관  전투에서  일시적이나마  小西行長의  진격을  막았던

박진에게  투항한  것도  밀양과  관련하여  흥미있는  대목이다.

해마다  일본에  있는  장군의  후손들과  일본인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