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지역 답사 사진 1 (2011. 6. 5)
- 거창박물관, 거창사건 추모공원
* 최근 유홍준씨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6권을 냈다.
5권(다시 금강을 예찬하다) 까지 낸 이래 약 10년 만에 답사기를 출간했다고 하니, 작가 스스로 서문에 언급했듯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시즌-2'격인 셈이다.
답사기 제6권은 부제가 '인생도처유상수'라고 되어 있는데, 나야 부산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책의 서문과 차례를 읽어본 뒤에, 앞부분(경복궁, 선암사)은 건너뛰고, '도동서원'과 '거창'편을 먼저 읽어보았다.
그리고 이번에 주말을 이용한 가족답사로 거창을 택하고, 토요일 진료를 마친 후, 오후 5시 경에 집사람과 둘이서 거창을 향해 출발하였다.
거창은 행정구역상 경상남도에 속하는데, 지도상에서 보면 경남의 서북쪽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경상남도의 시군 중에서, 내가 살고 있는 부산에서는 가장 먼 곳이다. 지리적으로도 그렇고, 시간적으로는 더욱 더 그러하다.
부산 해운대에서 거창읍내까지 가는 시간상 거리는, 경북 영주, 대전광역시, 전남 담양, 전북 남원 까지 가는 시간에 상당하는 꽤 먼 거리이다. 이는 편도 1차선 고속도로인 '88올림픽고속도로'를 지나는 탓에 더욱 체감하게 된다.
보통은 남해고속도로에서 대진고속도로를 타다가 88로가는 것이 시간적으로 빠를 것인데, 3일 연휴의 시작인 토요일 저녁이라 남해고속도로가 매우 막히는지라, 중간에 구마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개칭된 듯)로 빠져, 현풍분기점을 지나고, 고령분기점에서 다시 88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는 코스를 선택하였다.
평소 차가 밀리지 않고 쉬는 시간도 줄이면 보통 3시간 정도면 갈 수 있을 만한 곳이라는데, 출발부터 차가 막히고, 중간에 칠서휴게소에 들러 저녁을 먹고, 쉬엄쉬엄 가다보니, 거창 읍내에 도착하기 까지는 총 5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첫날은 숙소를 잡고 쉬는 것으로 일정을 끝내고, 일요일 아침부터 거창 지역 답사에 들어갔다.
* 답사코스 :
거창박물관 - 건계정 - 수승대(요수정, 거북바위, 구연서원) - 임훈선생 종택 -농산리 석불 - 동계고택
- 상림리 석불 - 양평리 석불 - 거창사건 추모공원
답사코스는 위와 같은데, 블로그에 사진 올리는데 따른 제한이 있어서, 고택과 정자, 불상을 묶고, 수승대 일원을 따로 뽑아서 '거창 지역 답사 사진 2', '거창 지역 답사 사진 3'로 구분하여 올리고자 한다.
첫 코스는 거창박물관.
어떤 고장을 답사할 때,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상 등을 전반적으로 파악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바로 박물관이라고 생각되어, 우리는 늘 답사의 첫머리에 가능하면 박물관을 선택하곤 하였다. 비교적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해도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곳이라 박물관이야말로 그 고장의 얼굴 역할을 하는 곳이라 여겨진다.
이곳 거창박물관도 비록 규모는 크지 않고, 전시 유물도 많지 않지만, 나름대로 지역의 특성을 살려 관심을 끄는 바가 있다.
박물관 뜰에는 여러 석조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출토지와 내력 등을 돌에 새겨놓았다.
* 박물관 옆 뜰에 비석들을 모아두었는데, 비석 받침의 조각에 해학적인 것들이 다수 있다.
* 앞뜰에 따로 서있는 비석이다.
비는 철제로 되었는데, 비를 둘러싼 석조물이 더 커서 균형이 맞지 않아 보인다.
* 박물관 로비의 바닥 타일에 옛 거창의 지도를 넣어, 말 그대로 거창 땅을 밟는다는 느낌을 준다.
* 박물관 로비 천장의 모습.
거창 지역에 있는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의 모습이라 한다.
* 예전에 왔을 때는 가섭암터에 올라가 위의 마애불을 살펴봤었는데, 오늘은 박물관에 탁본해 놓은 것만 보고 현지 답사는 생략.
* 박물관의 1층은 주로 지역 내의 민속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분위기에 맞게 우리 전통의 평상을 갖다 놓았다.
* 소설 동의보감에서 허준의 스승으로 나온 유의태(실제 이름은 유이태)는 이곳 거창군 위천면 출생이라고 한다.
* 동계고택의 사랑채에 걸려있던 현판인데,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동계 정온은 제주도의 대정으로 귀양가서는 10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훗날 역시 대정에서 9년간 귀양살이를 했던 추사 김정희는 정온 선생의 충절과 신의를 높이 평가했는데,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가서는 일부러 동계고택을 찾아가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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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답사에서 맨 마지막으로 찾아본 곳은 '거창사건 추모공원'이다.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이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거창군 신원면에서 우리 국군에 의해 집단적으로 희생당한 양민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추모공원이 조성되었다.
이곳은 거창읍으로 부터 많이 떨어진 심심산골의 외진 곳에 있다. 거창군, 합천군, 산청군의 경계선 근처에 있어서, 다른 지역의 답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렀는데, 시간이 늦어 문이 닫혀있는 관계로 안에는 들어가 보질 못하고, 근처의 박산합동묘지를 둘러보고, 멀리서 추모공원의 전경사진을 찍었다.
* 멀리서 본 추모공원 전경.
왼쪽의 큰 건물(역사교육관)과 오른쪽 끝의 큰 기와지붕 건물이 있는 곳까지 모두 공원 영역으로, 매우 넓은 공간(총 부지 면적이 15만 3천㎡라고 한다)을 차지하고 있다.
* 흰색의 큰 구조물이 위령탑이고, 위령탑의 왼쪽 윗편이 희생자들의 묘역이다.
* 거창사건추모공원의 역사교육관.
* 위패봉안각
한편 추모공원의 길 건너편에는 박산합동묘소가 있다.
박산합동묘소는 양민학살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을 묻어둔 곳으로, 신원을 확인할 길이 없어서,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 등, 세 부류로 분류하여 무덤을 조성한 곳이다.
* 박산합동묘역의 석물들.
쓰러진 위령비와 부서지고 흩어진 석물들이 그 동안의 시련을 암시하는 듯 하다.
* 정면에 보이는 무덤이 '여자합동지묘'(183구)이고, 왼쪽 뒤에 보이는 무덤이 '남자합동지묘'(109구)이다.
아이들 유골(235구)은 봉분 없이 '소아합동지지'라고 표시만 해두었다고 하는데, 미처 확인하질 못했다.
* '男子合同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 근래에 새로 세운 위령비.
** 거창양민학살사건에 대해 진상이 가려지고, 희생자들의 명예는 회복되었지만, 유족들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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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의 글은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거창양민학살사건
거창양민학살의 시말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자 인민군은 급히 퇴각했다. 이때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해 있던 인민군 중에는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병력이 많았다. 이들은 전쟁 발발 전인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이후 지리산 일대에 숨어들었던 빨치산과 합세해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국군은 빨치산 토벌을 전담하는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을 창설해 남원에 사령부를 두었다.
그러나 빨치산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1950년 11월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빨치산의 게릴라전은 더욱 적극성을 띠었다.
12월 5일에는 약 50명의 빨치산이 신원면 경찰지서를 습격해 경찰과 청년의용대 40여명이 죽었고 신원면 일대는 빨치산의 세력권에 들어가버렸다.
그러자 1951년 2월 국군은 대대적인 빨치산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이 작전의 이름은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 했다.
이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전술로 '성을 견고히 지키기 위해서는 적이 이용할 수 있는 물적, 인적 자원을 말끔히 없앤다'는 뜻이다.
이때 내려진 작전명령 부록에는 "작전지역 안의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 "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는 지침이 있었다고 한다.
거창에 있던 11사단 9연대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는 신원면 일대의 빨치산을 토벌하고 산청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2월 8일 출동했다.
그런데 3대대는 이 지역을 별 저항 없이 쉽게 수복했다. 빨치산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일단 철수했던 것이다.
신원면에 별다른 적의 동태가 보이지 않자 대대장은 신원면 소재지인 과정리에 경찰병력 1개 중대만 남기고 산청 방면으로 진군했다.
이틈에 빨치산은 과정리를 기습공격해 경찰병력에 막대한 타격을 가하고는 또 산으로 도망갔다.
산청에 가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된 3대대장은 연대장에게 심한 질책을 받고 다시 신원면으로 돌아왔다.
바로 이날(2월 9일) 밤 빨치산이 또 쳐들어와 새벽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쌍방 모두 수십명씩 사상자를 냈다.
이에 대대장은 견벽청야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게 되었다.
날이 밝자 통비분자를 색출한다며 과정리, 중유리, 와룡리, 대현리 주민을 한명도 빠짐없이 과정리 신원초등학교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와룡리 주민 100여명을 집결지로 데려오는 도중 탄량골에 몰아넣고 집단사살했다. 덕산리 청연마을에서도 70여명을 학살했다.
학교에 모인 사람들은 교실 네개와 복도에 꽉 차 있었다고 한다.
이튿날 날이 밝자 군인, 경찰, 공무원 가족만 가려낸 다음 모두 박산골로 끌고가 무차별 사격하고 죽은 시체 위에 솔가지를 덮고 휘발유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
동시에 마을 집도 모두 불살라버렸다.
총 814가구의 1,583채가 불에 탔고 719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 노약자와 부녀자였다.
1951년 2월 11일 신원면의 하루는 그렇게 무참하게 지나갔다.
양민학살 그후
군인들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외부 왕래를 모두 끊었다.
그러나 하늘 아래 비밀은 없었다.
탄량골 학살 때 문홍한씨는 군경가족이라고 속이고 탈주하는 도중 만삭인 아내가 산통을 시작해 신음하는 아내를 돌보고 있었는데, 이 딱한 사정을 본 충청도 말씨의 앳된 군인의 눈짓으로 교장 사택으로 옮겨 그 와중에 아들을 낳고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그때 태어난 아들이 훗날 진상규명위원회 일을 맡아본 문명주씨다).
신원면 양민학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결국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씨가 국회에서 폭로했고, 국회와 정부의 합동조사단이 꾸려졌다.
진상조사단은 4월 7일 현지조사를 나가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당시 경상남도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이던 김종원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를 빨치산으로 가장하여 신원면 입구에 매복시켜두고 총을 쏘게 하여, 조사단은 현지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위장총격마저 들통나면서 정부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4일 거창사건에 대한 담화문을 직접 발표하며 '공비와 협력한 187명을 군법회의에 넘겨 처형한 사건'이라고 거짓 해명했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외국 언론들이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면서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는 사건 발생 5개월 만에 진상조사를 다시 실시하고 학살혐의자를 군법회의에 부쳐 연대장 오익경에게 무기징역, 대대장 한동석에게 징역 10년, 경남 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이로써 사건은 종결됐다.
그러나 이들은 1년 뒤 모두 특사로 풀려나 현역으로 복귀했고, 경찰간부로 기용됐다.
학살 피해자나 유가족에게는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신원면 주민은 박산골에 방치돼 있던 학살현장의 유골을 수습했다.
이미 누구의 유골인지 구별할 수 없어 어른 남자, 어른 여자, 아이로만 구분해 뒷산에 묻어두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하에서 거창학살사건은 공비와 내통한 불온분자들을 숙청한 사건으로 인식돼 유가족조차 이 사건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었다.
1960년 5월 11일, 박산 합동묘역 석물 운반 작업중에는, 참았던 분노가 폭발한 주민들이 면장을 살해하는 또다른 비극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4.19혁명이 일어나자, 민주화의 열풍 속에서 유족은 비로소 원혼에 대한 위령제를 지낼 수 있었다.
1960년 11월 18일, 박산 뒤 야산에는 남자합동지묘(109구), 여자합동지묘(183구) 두개의 봉분을 만들고, 아이들 유골(235구)은 봉분 없이 소아합동지지(小兒合同之地)라고 표지해두었다.
나라에서 40만환을 지원해 묘소 앞에는 노산 이은상이 쓴 위령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3일 만인 5월 18일, 유족회는 반국가단체로 지목돼, 간부 17명이 투옥됐다. 그리고 박산합동묘소의 개장 명령이 내려지고, 묘역에 세운 위령비는 글자 한자 한자를 정으로 쪼아서 뭉갠 다음 땅에 파묻어버렸다.
그리고 또 2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987년 민주화 열풍이 일어나자, 유족회는 땅속에 묻혀 있던 파괴된 위령비를 꺼내 비석 받침대 위에 걸쳐놓았다.
그리고 정부를 향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이 위령비를 다시 똑바로 세워놓으라고 요구했다.
포클레인 한 대면 10분도 안 걸려 세울 수 있는 일이건만, 비석은 언제나 그렇게 누워 있었다.
묘소 옆에 있는 허름한 게시판을 세우고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각종 자료를 대자보식으로 붙여놓았다.
그리고 명예회복을 호소하는 플래카드를 2004년 추모공원이 생길 때까지 길가에 걸어놓으며 피눈물로 호소했다.
명예회복과 추모공원
거창학살사건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을 위한 법안이 1988년부터 국회에 여러 차례 제출됐으나 번번이 보류되다가 마침내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됐다.
이로써 사건 발생 45년 만에 희생자들은 공비와 내통한 자가 아니라 선량한 국민으로 억울하게 희생됐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박산의 학살현장 건너편 산에는 1998년에 거대한 추모공원이 착공돼 2004년에 완공됐다.
약 5만평(16만㎡)의 거대하다 못해 으리으리한 규모의 일주문, 위패봉안각, 위령탑, 부조벽, 위령묘지, 역사교육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추모공원은 규모, 건물, 조각, 교육관 모두가 거창학살사건의 진실과 아픔을 담아내는 진정성과 너무도 거리가 멀다.
이처럼 방대하고 화려한 추모공원을 세움으로써 희생자 가족이 얼마나 위안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기대한 것은 절대로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시대에 아주 잘못 지은 유적으로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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