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진

거창 지역 답사 사진 3 (고택과 불상들) (2011. 6. 5)

道雨 2011. 6. 13. 18:29

 

 

 

        거창 지역 답사 사진 3 (2011. 6. 5)

            - 고택(동계고택, 갈천종택)과  불교 유물

 

 

 

 

거창읍의 인구가 약 4만명이라는데, 읍내에만 6개의 인문계고등학교가 있으며, 높은 교육 성과를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는 거창의 높은 인문정신을 대변하는 것이라 했다. 

 

앞서 거창에 은거한 주요 인물로 요수 신권, 갈천 임훈, 동계 정온을 이야기한 바 있다.

거창의 고택 탐방도 이들 세 유학자들의 가문과 관련지어 있다고 보아 무방하다. 

 

유홍준씨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임시, 2006년 6월 9일에 전국의 종갓집 맏며느리(종부, 차종부) 초청 간담회를 열었다고 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종갓집만을 대상으로 하니 총 38개 종가였는데, 그 중에 거창 지역에서는 갈천 임훈 종택과 동계 정온 종택 등 두 집안이 포함되었으며, 특히 동계 정온 집안의 차종부가 대표로 인사말을 하였다고 한다.

 

 

수승대 주차장 길건너편에는 거창 신씨 집성촌이 있으며, 마을 중심부에 원학고가(猿鶴古家)라고 불리는 '황산리 신씨 고가'(경남 민속자료 제17호)가 있는데, 마을 전체가 민박을 하는 듯, 뭔지 모르게 분주하고 복잡해보여 들어가보질 못하고 그냥 차를 돌려 돌아나왔다.  

 

 

 

수승대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가면 갈계리에 닿는다.

이곳은 은진 임씨 세거지로서 임훈 종택과 갈천서당 등 여러 고택이 있다.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잠시 들여다 보았다.

늘상 그렇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집안을 둘러본다는 것은 조심스럽다.

현재 살고 계신 분들에게 너무 마음에 부담을 주는 듯하기도 하고, 공연히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문 밖과 사랑채 마당에서 간략히 사진만 몇 장 찍고 발길을 돌렸다. 

 

 

* 갈천 임훈의 종택 정려문 앞에서.

  머리 위로 정려가 보이고, 정려문의 나무 기둥을 받치고 있는 한 쌍의 돌받침 조각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 명종 임금이 효자 임훈에게 내린 정려. 현판 위쪽에는 태극 문양의 장식이 있다.

* 현판의 내용

[孝子行典牲署參奉 林薰之門 明廟甲子命旌 後積仕至掌隸院判決事 贈 吏曹判書 諡 孝簡公]

 {전생서참봉 벼슬을 지낸 효자 임훈의 집. 명종 갑자년(1564)에 효성이 지극하다 하여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으며, 후에 여러번 벼슬하여 그 벼슬이 장예원판결사에 이르렀다. 죽은 후 나라에서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렸으며, 효간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 갈천은 퇴계와 동갑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다가, 부모 봉양을 위해 낙향하여 효행으로 정려문을 하사받고, 나중에는 광주 목사까지 지낸 분으로, 학식과 덕망이 높은 거창의 명사였다.

 

 

* 정려문 기둥을 받치고 있는 용머리 형상의 돌거북이 인상적이다.

 

 

 

* 오른쪽 돌거북

 

* 사랑채에 걸린 현판. 자이당(自怡堂)은 갈천 선생의 (당)호로서, 스스로 기뻐한다는 뜻이다.

사무사(思無邪)는 생각함에 있어 삿된(사특한) 바가 없도록 한다는 뜻이다. 이 두개의 현판 내용을 합한다면, '생각함에 있어 삿된 바가 없으니 스스로 즐겁다'고 할 수 있겠다.

 

갈천 임훈의 종택 바로 곁에는 임훈의 동생인 첨모당 임운(瞻慕堂 林芸)의 고택이 붙어 있다.

첨모당 임운도 형 임훈과 함께 효자 정려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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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선비 <갈천 임훈 1> 하늘이 내린 효자 
                                
거창 수승대(搜勝臺)를 지나 서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북상면(北上面) 갈계리(葛溪里)라는 마을이 나온다.
마을을 들어서기 전 길가에 세운 [葛川洞門]이라는 표지석이 눈에 띈다. 갈천(葛川)선생 유풍(儒風)이 깃들은 마을임을 알리는 글귀다.
마을에 들어서자 한가운데 [孝子旌閭碑閣]이 마을의 내력을 말해주듯 방문객을 맞이한다. 갈천 선생, 아우인 첨모당(瞻慕堂)을 비롯한 후손들의 효행을 기려 나라에서 표창한 내용을 적은 비석들이다. 온 마을이 갈천선생이 남긴 유풍에 흠뻑 젖어 있는 듯했다.  

선생의 종택(宗宅)을 들어서니 [孝子行典牲署參奉 林薰之門 明廟甲子命旌 後積仕至掌隸院判決事 贈 吏曹判書 諡 孝簡公]이란 현판이 이채로웠다.

내용은 {전생서참봉 벼슬을 지낸 효자 임훈의 집. 명종 갑자년(1564)에 효성이 지극하다 하여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으며, 후에 여러번 벼슬하여  그 벼슬이 장예원판결사에 이르렀다. 죽은 후 나라에서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렸으며, 효간이란 시호를 받았다}이다.

자이당(自怡堂)에 오르니 선생의 글읽는 소리가 들려 오는 듯 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생전에 정려(旌閭)를 받고, 400여년이 넘도록 선비의 사표(師表)로 여겨온 갈천(葛川) 임훈(林薰)선생.

선생은 1500년(연산 6년) 7월 15일 진사(進士) 석천공(石泉公·得蕃)과 진양 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중성(仲成)이며 스스로 자이당(自怡堂)이라 호를 지었는데 사람들은 갈천선생이라고 불렀다.

선생은 삼형제 중 맏이로 도계(道溪) 영(英), 첨모당(瞻慕堂) 운(芸)이 아우이다. 도계공은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첨모당은 갈천과 생전에 정려를 받을 만큼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덕행 또한 출중하였다.
갈계리 은진(恩津) 임씨(林氏)들은 갈천의 증조부인 의령현감(宜寧縣監)을 지낸 千年(천년)공이 처음 들어왔다 한다.

지금 이 곳에는 삼형제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마을 전체 140가구중 100가구 정도 된다고 한다.  

선생이 18세때 당시 경상감사로 온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만나 보고 크게 성공할 인재라고 칭찬하였다. 모재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당시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시문에 능했으며,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인물이다.

갈천은 27세때 모친상을 당하자 아우들과 삼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41세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었다.

54세때 성균관의 추천으로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어, 2년동안 집경전(集慶殿) 제용감(濟用監) 전생서(典牲署) 참봉 등을 두루 지냈다. 참봉은 종9품 미관말직으로 당시 선생의 나이나 인품으로 보아 어울리지 않은 벼슬자리였다.

하지만 신하된 도리로서 임금의 명을 어길 수 없었고, 어버이의 권장도 있었기에 바로 직무에 나아가 정성으로 맡은 바 임무를 다하였다. 선생의 지극한 충효정신의 일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때 부친의 연세 이미 팔순이 되어 벼슬자리에 더 머물 수 가 없었다. 부친 봉양을 위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아우인 첨모당과 부친을 모시면서 봉양에 한치의 어긋남이 없도록 했다.

선생의 문인이자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부친인 진사(進士) 정유명(鄭惟明)은 행장에 이르기를, {아우인 참봉공과 좌우에서 모시면서 봉양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기분을 화평하게 하고 뜻을 즐겁게 하였으며 부드러운 소리로 귀를 즐겁게 하였으며 용모를 온순하게 하여 눈을 즐겁게 하였으며 부드러운 마음으로 기쁘게 해드리며 효성으로 받들어 어김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효성으로 마을과 나라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때 선생의 나이 60세였다.

2년 후 부친이 돌아가시자 예를 극진히 하여 3년상을 마쳤다. 복이 끝날 즈음, 현감이 선생 형제분의 효행을 나라에 알리려 하자 사양하였다.

1564년 비로소 명종이 선생 형제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문을 세우도록 하였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를 그들이 사는 마을의 거리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로, 보통 당사자가 죽은 후에 시행되었다.

살아서 정려를 받기는 드문 일로 하늘이 내린 효자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를 생정려(生旌閭)라 하여 더더욱 가치있게 여겼다.

갈천과 첨모당은 살아서 정려를 받았으니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효자라 하겠다.

선생 67세때 명종이 경학(經學)에 밝고 품행이 단정한 선비에게 벼슬을 내리고자 했다. 이때 전국에서 선비 6명을 선발하였는데 선생이 그 중 한분이다. 이들에게는 모두 육품직에 제수되었는데 선생은 언양현감(彦陽縣監)에 제수되었다.

언양현감으로 있으면서 마을의 6가지 폐단을 조목조목 상소하여 시정을 요구하였다. 6가지 폐단은 군역, 세금, 부채, 공물제도에 관한 것인데, 백성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명종은 이를 보고 감사에게 전지를 내려 말하기를 『지금 언양현감 임훈의 상소내용을 보니, 자신이 親民의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의 곤란을 목격하고 내게 각조의 폐단을 말했으니 내가 가상하게 생각한다. 이 뜻을 언양에 전하라』 하였다.

여기서 선생이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의 고초를 자신의 일로 여겨 바로잡은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70세에 비안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다. 임지로 떠나기 전 선조가 불러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였다. 이때 선생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말하고 민생의 폐단을 구제할 것』을 힘써 말하였다.

선생은 외직에 있으면서 백성을 사랑하고 관리를 부리는 데 이르러서는 각각 자신들의 도리를 다하게 하고 신의로써 믿게 하였다.

73세때 아우 첨모당이 세상을 떠나자 심히 애통하게 여겼다. 또 남명 조식의 부음을 듣고 만사를 지어 보냈다. 74세때 지례현감(知禮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 10월에 광주목사에 제수되자 나이가 많아 사양하였다. 하지만 임금이 허락치 않아 그 직에 나아가 백성들의 공물과 부역의 폐단을 시정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78세때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제수받았지만 사양하였다. 이때 임금이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83세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제수되었다.  

 

1584년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라에서 약을 지어 전의를 보냈으나 세상을 떠난 뒤였다.
세상을 떠난 후 2년(1586), 안의 용문서원(龍門書院)에 아우인 첨모당과 배향되었다. 1662년 용문서원이 사액(賜額)되었다.

1861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1871년 효간공(孝簡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1996.7.12. 경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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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고택

 

 

 

동계고택은 거창 지역의 고택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방문객도 많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에서 유홍준씨는 '서부 경남 답사에서 거창은 동계고택이 있어 더욱 매력적인 코스가 된다'고 할 정도이다.

 

동계고택은 인조 때 문신인 동계 정온(桐溪 鄭蘊, 1569~1641) 선생이 살던 곳으로, 후손들이 순조 20년(1820)에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전형적인 종갓집 건물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전국의 종갓집 맏며느리 초청 간담회 때, 대표적인 역할을 맡아 인사를 하신 분이 바로 이 동계고택의 차종부였다고 한다. 

 

 

동계 정온(桐溪 鄭蘊)

 

동게 정온은 진사 유명(惟明)의 아들로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별호로 고고자(鼓鼓子)라고도 했다.

어려서 말더듬이여서 고생이 심했는데, 열다섯살 때 윗고을에 살던 갈천 임훈의 문인으로 들어가 총명함을 인정받고, 서른한살에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1535~1623)을 찾아가 사사했다. 

학통으로 보면 남명 조식, 일두 정여창, 내암 정인홍을 잇는 경상우도 영남학파의 거유다.

 

나이 마흔인 광해군 2년(1610)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이때 영창대군의 죽음이 부당함을 주장하고, 또 때마침 일어나고 있던 인목대비 폐모론을 강력히 반대하면서 이를 밀어붙이는 스승 정인홍과 갈라섰다.

 

광해군은 격분해 동계를 국문하고 제주도 대정(大靜)으로 귀양보냈다. 동계의 제주도 유배생활은 10년이나 계속됐다. 이 기간에도 동계는 옛 성현의 명언을 모아 『덕변록(德辨錄)』을 지으면서 학문에 힘썼다. 그래서 제주 시내 오현단(五賢壇)에는 5현의 한 분으로 동계가 모셔져 있다.

 

훗날 추사 김정희가 바로 이곳 대정에서 9년간 귀양살이하고 돌아가서는, 일부러 동계고택을 찾아가 '충신당(忠信堂)'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지금 이 현판은 거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동계는 유배에서 풀려나고 대사간, 대제학 등 요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마침내 광해군 시절 전권을 휘두른 정인홍은 참수당했다. 이때 아무도 그의 시신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자 동계는 주위의 위협과 냉소를 물리치고 초연히 옛 제자로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리고 67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652)과 함께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했으나, 결국 인조의 항복이 결정되자, 대성통곡한 다음 국가의 수치를 참을 수 없다며, 배를 갈라 자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너무 늙어 힘이 모자라 죽지 않고 기절했다가 의사의 구원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다시 목숨을 부지하게 된 동계는 고향 거창으로 내려가서는 곧바로 집을 떠나 남덕유산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 조를 심고 고사리를 캐며 삶을 유지하다가 5년 뒤 세상을 떠났다.세상 사람들이 어디로갔냐고 물어오면 모리(某里), 즉 이름없는 동네에 들어갔다고만 대답하라고 했다.

 

동계가 세상을 떠나자, 인조는 문간공(文簡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정려문(旌閭門)을 세우게 했다. 그래서 지금도 동계고택 솟을 대문에는 선홍색 바탕에 흰 글씨로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이라고 씌어 있다.

 

동계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을 지낸 그 이듬해인 1645년, 유림에서는 선생이 은거해 있던 곳에 영당을 세워 모리재(某里齋)라 하고 산 이름도 모리산이라 지었다.

 

동계의 충절은 두고두고 후대에 기리는 바가 되었다. 숙종은 동계의 절의를 높이 재평가해 영의정을 추증했다. 그리고 정조대왕은 동계의 지조를 높이 사 손수 제문과 함께 시를 지어 보냈다. 이 제문과 시는 현판에 새겨 지금도 동계고택 사당에 걸려 있다.

 

      세월 흘러도 푸른 산이 높고 높듯                                                    日長山色碧嵯峨

      천하에  떨친 바른 기상은 여전히 드높아라                                      種得乾坤正氣多

      북으로 떠난 이나 남으로 내려간 이나 의로움은 매한가지                  北去南來同一義

      금석같은 굳은 절개 가실 줄이 있으랴                                              精金堅石不曾磨

 

 

여기서 '북으로 떠난 이'는 청나라로 끌려간 청음 김상헌, '남으로 내려간 이'는 낙향한 동계 정온을 가리킨다.

 

 

 

동계 이후의 초계 정씨

 

세상의 주도권이 노론에게 돌아가면서 청음 김상헌, 안동 김씨 후손은 대대로 출세와 영광을 누렸지만, 당색이 북인인 동계의 후손은 그렇지 못했다.

대북의 영수인 정인홍이 인조반정으로 참형된 이후, 북인의 후예들은 거의 중앙 진출이 봉쇄됐다. 동계가 비록 스승과 갈라서 나오기는 했지만 예외가 아니었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 ?~1728)가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자 난을 일으켰을 때, 동계의 고손자인 정희량(鄭希亮, ?~1728)이 이에 동조해 경상도 지역에서 봉기한 것은 이런 누적된 정치적 소외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정희량이 참형을 당하면서 초계 정씨 집안은 삼족이 멸할 위기에 있었다. 그러나 충신 동계의 후손이라는 것을 감안해 멸족만은 면할 수 있었다.

 

이런 정씨 집안을 다시일으킨 분은 9대손인 정기필(정기필, 1800~60)이다. 그는 현종, 철종 연간에 영양현감을 지내면서, 청렴한 인품과 덕망으로 명망이 드높았다.  

그가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거처할 곳조차 없었다. 이에 안의현감과 고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집을 지어주었으니 그것이 바로 동계고택 바로 곁에 붙어 있는 '반구헌(反求軒)'이다. 반구헌은 반구제심(反求諸心), 즉 뒤돌아보면서 마음을 바로잡는다는 뜻에서 나온 당호다.

 

 

 

 

 

* 동계고택 전경. 왼쪽이 동계고택이고, 오른쪽은 동계의 9세손인 정기필이 살던 반구헌.

 

 

 

* 동계고택의 솟을대문. '문간공동계정온지문 (文簡公桐溪鄭蘊之門)'이란 정려가 보인다.

 

 

 

* 동계고택의 사랑채

동계고택의 건물의 특징을 말할 때 늘 빠지지 않는 것이 '눈썹지붕'과 '이중처마지붕'이다.

사랑채 건물 지붕의 용마루에 낙숫물받이 격의 긴 눈썹을 붙여 그 무게를 더욱 강조하고있다. 오른쪽 편의 돌출된 사랑채 누각의 처마는 좀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로 겹처마로 되어 있어, 더욱 그러한 인상을 받게 된다.

 

 

 

* 사랑채 누각의 겹처마지붕(이중처마지붕)이 매우 독특하다.

우리가 갔을 때, 이 겹처마의 아랫부분이 내려앉고 있어서 시급히 보수가 필요한 상태였다.

 

* 안채 측면 뒤꼍에 있는 오래된 우물. 지금도 이 우물물을 식수로 쓰고 있을 정도로 청량하다.

 

 

 

* 안채의 뒤에 있는 장독대와 사당.

장독대가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의 중간에 있었는데, 뒤로 옮겼다고 한다.

 

 

 

* 사당채 출입문에 적힌 입춘책.

'崇楨丁丑後三百七十四年'이라고 적혀있는데, 숭정 정축년은 1637년, 즉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항복한 해(동계 선생이 자결을 시도한 해)를 말하는 것으로 그 때를 기원으로 삼아 연호를 쓰고 있는 것이다. '숭정정축후374년'은 서기로는 2011년이다.

 

 

* 동계고택의 종부.

우리 나이로 올해 87세가 되셨다고 하는데, 아주 정정해 보이신다. 경주 최부잣집의 따님으로서, 언니는 하회마을의 풍산 류씨(류성룡 가문) 댁으로 시집가셨다고 한다.

 

 

 

* 예전에  잡지에 실린 글과 사진을 보여주며 사연을 얘기해 주셨다.

언젠가 이왕가(李王家)의 후손분께서 이 집을 방문해 '모와(某窩)'라고 써 주셔서 현판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는데, 도난당하여 아쉽다고 하였다.

 

 

 

 

* 예전에 본인이 장만했던 음식들에 관한 자료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날, 마침 이 집의 종손되시는 분이 집에 계셨는데, 우리를 사랑채에 들어오시게 하고는, 친절하게 이 집안에 얽힌 여러가지 사연들을 말씀해주셨다.

 

 

 

 

 

 

 

* 동계고택은 중요민속자료 제205호이며, 동계 선생이 입던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제복(祭服)과 조복(朝服)을 포함한, 이 집에서 보관하고 있던 많은 유물들이 거창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는데, 일괄하여 중요민속자료 제21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추사 김정희가 유배되었던 제주도 대정에는 지난 5월에 '추사유배길 걷기' 코스가 개장되었는데, 여기에 동계 선생이 유배되었던 것을 기념한 '동계정온선생유허비(桐溪鄭蘊先生遺墟碑)'가 포함되어 있다.

작년에 제주도 답사여행을 갔을 때 대정의 추사 적거지를 찾아보았었는데, 당시에는 동계 선생에 대한 내럭을 몰라서 미처 동계 선생 유허비를 찾아보질 못했다.

 

 

 

 

 

거창의 불상들

 

거창 지역에는 거창한 절집은 없지만, 불상 등의 유물은 여럿 남아있다.

이번 답사에는 시간 관계상 빠진 금원산 가섭암터 마애삼존불(보물 제530호)을 비롯하여, 농산리 석불입상(보물 제1436호), 상림리 석조보살입상(보물 제378호), 양평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377호) 등, 이 외에도 여러 유물들이 있다.

이번 답사에는 농산리 석불, 상림리 석불, 양평리 석불 등 세 군데를 돌아보았다.

 

 

 

 

 

 

* 농산리석불입상은 낮은 산 비탈 중턱의 호젓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차량이 다니는 길에서 불과 100여m 밖에 떨어지지 않아 그늘진 나무숲 사이로 산책하듯 올라가면 작은 공간이 나오고 불상이 등을 보인 채 서 있다.

불상이 등부터 보이니 어색하긴 하지만, 들어가면서 옆 모습부터 훑어보면 참 아담한 불상이라는 느낌이 온다.

보물 제1436호이며,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 석불의 몸체와 광배는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고, 기단부와 발등까지가 또 다른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 기단의 앞부분에는 약간의 조각 흔적이 있는 듯 하며, 뒷부분은 자연 그대로의 암석이다.

 

 

 

 

거창읍내에는 두 개의 커다란 석조 불상이 있다.

거창읍의 동서에 각각 1개씩이어서, 거창 읍내를 지켜주는 석불로 전해지기도 한다. 상림리(거창읍의 서쪽)와 양평리(거창읍의 동쪽)의 석불이다.

 

 

 

* 상림리 석불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관음보살상인데, 대부분의 관음보살상이 여성적인데 비해, 이 불상은 크기나 몸매, 인상이 무인(武人)같은 느낌을 준다. 보물 제378호.

 

 

 

* 얼굴의 반쪽과 뒷쪽으로는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어 험한 느낌울 준다.

 

 

 

* 뒷면에도 옷주름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양평동에도 크기가 상림리 석불과 비슷한 석불이 있다.

상림리의 석불이 보살상임에도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양평리의 석불은 반대로 여래상이면서도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 인근에 비구니 스님들이 절을 조성하고 있기도 하다.

 

 

 

 

* 양평리의 석조여래입상은 머리에 큰 갓을 쓰고 있는데, 이는 후대에 추가로 제작되어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377호.

 

 

* 부드러운 인상에 옷 주름도 비교적 상세하며 여성적인 느낌을 준다. 전체적인 체구에 비해 어깨는 좁은데 머리 부분과 가슴에 올려진 왼손이 지나치게 크게 조각된 것이 좀 어색하게 느껴진다.

 

 

* 윗부분(머리에 쓴 갓, 어깨)에 비해 허리 아래쪽(다리와 발부분)이 좁아서 마치 여성이 항아리치마를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 양평리 여래입상 옆의 화단에 작약꽃이 예쁘게 피었기에 사진에 담았다.

 

 

 

 

 

거창 지역의 답사로 가 보고 싶은 곳이 남았지만, 미처 다 돌아보질 못했다. 그 중에서도 다음 거창 답사 때는 꼭 가보았으면 하는 곳이 두 군데 더 있다.  

하나는 동계 선생이 마지막을 보냈던 모리재, 다른 하나는 침류정인데, 침류정 뜰에 있다는 '파리장서(巴里長書)' 비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파리장서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거창의 거유인 면우 곽종석을 비롯해 전국의 유림 대표 137명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작성 서명해, 이를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이 상하이에서 프랑스 빠리의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한 것이다.

이것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부분의 유림대표가 체포됐으며, 일부는 국외로 망명했고, 곽종석은 감옥에서 순사했다. 바로 이 파리장서운동이 거창에서 일어났고, 그 문장은 곽종석이 쓴 것을 기린 사적비이다.

 

기미독립선언은  종교계 대표 33인이 주도했고, 파리장서운동은 유림의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 파리장서운동 관련 거창박물관 전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