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한 박정희
1948년 10월 국방부는 여수순천사건에 관련된 장교 및 사병 1천여명을 검거하였다. 조사는 3개월 이상 지속되었고, 1949년 2월8일부터 군법회의가 열렸다.
그해 2월13일까지 이어진 군사재판에서 총 73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제15연대장 최남근에게 총살형이 선고된 것을 필두로, 김학휴, 조병건, 박정희, 백명종 등 4명에게는 무기징역형이, 그밖에는 15년부터 5년까지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경향신문> 1949. 2. 17.)
그러나 중죄인 박정희는 무사하였다. 직속상관인 육군본부 정보국장 장도영이 정일권, 백선엽 등 만주군 출신들과 작당하여 구명운동을 벌였다.
박정희 역시 만주군 출신의 수사관 김창룡에게 옛 동지들, 즉 군 내부에서 암약하던 남로당원의 명부를 넘겨주고 목숨을 구걸하였다.
피값으로 되살아난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일으켰다(1961). 군복을 벗은 그는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다(1963).
경쟁자인 윤보선이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좌시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정희는 자신이 이끄는 ‘국가재건최고회의’와 ‘민주공화당’의 이름으로 윤보선을 고소했다. 있지도 않은 허위사실을 윤보선이 유포했다는 것이다.(<동아일보> 1963. 9. 26.)
박정희와 그 휘하세력인 민주공화당 의장 윤치영, 공보부 장관 임성희, 민주공화당 선전부장 서인석, 정치군인 원용덕 등은 여순사건 또는 남로당과 관련해 박정희가 형을 선고받은 적이 없었노라는 거짓말을 일삼았다.
특히 윤치영과 서인석은 박정희 찬양으로 도배된 <민주공화보>를 작성해 전국의 가가호호에 뿌렸다.
박정희 추종세력은 지금까지도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다.
‘그분이 남로당의 중책을 맡았던 것처럼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당원으로서 활동은 없었다. 인간관계상 최남근 등과 친하게 지내다가 그들의 포섭공작에 휘말려 술 몇 잔 얻어먹은 것뿐이다.’
박정희는 이 거짓말쟁이들 앞에 ‘반인반신’의 성인이 되어 황금빛 동상으로 서 있다.
백승종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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