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보도연맹 사건 : 아 슬플 손, 남에도 북에도 ‘백조일손’이로세

道雨 2012. 12. 1. 10:34

 

[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

                  보도연맹 사건

 

아 슬플 손, 남에도 북에도 ‘백조일손’이로세

 
한국전쟁이 터진 뒤 이승만 정권은 전국의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여 수만명을 재판 없이 총살했다. 2007년 7월11일 경남대 유해발굴 조사단원들이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제1·2 수평갱도에서 발목까지 차오르는 빗물을 헤집고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

 

 

 

1월 제주 하늘은 잿빛이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넓은 들녘에는 누렇게 마른 키 큰 풀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저 멀리 일제 때 미군 공습을 피하려 비행기를 숨겨둔 콘크리트 돔들이 띄엄띄엄 늘어섰다.

차 안에는 보도연맹사건 유족 셋이 말없이 앉아 있다. 열 살 코흘리개 때 아버지, 삼촌을 잃었던 그이들이 이제는 칠순을 넘긴 노인들이 되었다. 그래도 아버지 보러 가는 그이들의 얼굴이며 몸짓은 아이들의 그것 같다.

송악산 섯알오름. 밋밋한 언덕에도 마른풀들이 세찬 바람에 누워 있다. 저 구덩이는 8·15 해방 직후 미군이 일본군 탄약고를 폭파해서 생긴 거란다.

해방이라. 해방?

일제에서는 해방되었다지만 좌, 우 이데올로기에 더 단단히 묶여버렸으니 과연 해방이라 할 수 있을까.

 

 

2008년 봄, 울산 유족회장의 방문

 

저 구덩이, 아니 이제는 풀이 덮혀 잘 보이지 않는다. 1950년 7월, 저 구덩이에서 200여명의 모슬포 양민들이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의 총에 맞아 묻혔다. 그이들의 어머니, 처, 자식들은 시신을 거두려는 엄두도 못 냈다.

그리고 6년 뒤 물과 썩은 시신들이 범벅이 된 그곳에서 유족들은 양수기로 물을 퍼내고 뼈들을 골라냈다. 132구의 두개골이 수습되었지만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어 큰 무덤에 다시 모두 함께 묻었다.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할아버지는 백 분이지만 그 손자들은 다 한 손자다. 제사도 한날한시 다 같이 지낸다.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나라를 국민들로부터 빼앗은 뒤 이 백조일손지묘 묘비를 깨부수었다. 저 자신은 1949년 여수·순천 군반란사건 때 남로당원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다른 동료들을 밀고하고 일제 만주군관학교 선배들 덕에 살아나 군에 복직했다.

백조(百祖), 아니 132명의 할아버지들 유골은 박정희 쿠데타 때 다 흩어졌다.

1992년 4월, 다시 백조일손지묘를 만들었다. 2002년에는 49위를 시신 없이 흙으로 빚어 모셨다.

 

“북에도 백조일손묘가 있지요.” 나는 섯알오름의 그 구덩이를 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유족회장이 쓸쓸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요? 북에도 똑같이 백조일손묘가 있단 말이죠?”

그랬다. 황해도 신천에도 있다. 2002년 10월 평양이 고향인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신부님들 따라 북에 갔을 때 가보았다.

평양에서 사리원 가는 길은 도로에 차가 거의 없었다. 찻길 옆에는 작은 오솔길이 나란히 이어져 있었는데 마을 가까운 데서는 국방색이나 검은색의 두툼한 겨울옷을 입고 등에 커다란 짐을 진 아주머니들이며 노인들이 하염없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신천 박물관 부근에 수많은 희생자들을 한데 묻은 백조일손묘가 있었다. 1950년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3만5000명이 학살당했다. 북의 안내원은 미군이 그랬다고 설명했지만 소설가 황석영은 북 인민정권에 박해받던 지주와 기독교 개신교인들이 그런 거라 했다. 미군이 북상하기 직전 황해도 일대에서 인민군이 후퇴한 권력의 공백상태를 틈타, 우파 사람들이 소작인이나 북 정권에 가까운 주민들에게 대대적인 보복을 한 거라 했다.

좌쪽에서 인민재판을 통해 우쪽 사람들을 죽인 건 어려서부터 영화 등을 통해서 익히 보아왔다.

나는 변호사 일을 하면서 수많은 죽음을 만났다. 가장 최근에는 2009년 용산 망루 여섯 죽음을 만났고, 1990년대, 80년대, 70년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민주화 투쟁 과정의 죽음이나 의문사를 숱하게 보아왔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 전후의 억울한 죽음들도 60년 세월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해결이 안 되고 있다니.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참으로 무섭단 생각이 들었다. 새삼 겁이 더럭 났다.

 

이승만이 학살한 양민 수만명
유족들은 나중에 뼈를 수습했지만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어
큰 무덤에 다시 함께 묻었다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북 신천에도 이런 합동묘가 있다

박정희는 ‘빨갱이 유골’이라며
묘를 없애고 유족까지 처벌했다
그리고 또 60년이 지났지만
국가는 처형자 명단이 비밀이라며
지금도 내놓지 않고 있다

 

2008년 봄, 울산보도연맹 유족회 김정호 회장이 나를 찾아왔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형사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고 국가로부터 민사손해배상을 받은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거였다. 아, 이제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6·25와 해방정국 때 사건까지 맡게 되었구나.

나는 국가가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은 우익 북파공작원 사건들도 맡았으니, 좌우를 막론하고 내가 무슨 무당 푸닥거리 하러 태어났나 싶기도 했다.

몇년 전 한국방송에서 <서울 1945>라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오랫동안 방영한 적이 있었다. 방영 뒤 이승만 양아들과 장택상 딸이 방송사 피디와 작가를 상대로 명예훼손 고소를 했고 검찰이 기소를 했다. 검사는 참 별걸 다 기소하네. 드라마상 이승만과 장택상이 김구 선생님 암살 배후인 양 묘사했다는 거였다.

재판에서 고소인 쪽 증인으로 여든이 훨씬 넘은 이철승 전 의원이 나왔다. 나는 처음에는 노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반대신문을 대충 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이분이 일방적인 주장을 하길래 하는 수 없이 좀 세게 몰았다. 작가 쪽 증인으로 장택상 역을 맡았던 탤런트 김동현이 나왔는데 재판이 끝나자 언제나처럼 고소인 쪽 사람들이 법정에서부터 욕설을 하고 난리가 났다. 그는 배우로서 연기한 당시 주변상황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 특별히 자신의 사상이 어느 쪽이라고 밝힌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무조건 난리였다.

나나 작가, 피디는 재판 때마다 매번 당해오던 일이었다. 그냥 그 자리를 피해서 법정 정리의 도움을 받아 밖으로 내빼곤 했다. 배우 김동현은 우리와 달랐다. 욕설을 해 대는 사람들에게 눈을 부릅뜨고는 큰 소리로 이러는 거였다. “나, 김동현이야.”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무슨 장군 연기를 하는 거 같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상대방들은 움찔하더니 조용히 사라졌다. 나도 점잖게 내빼지만 말고 한번 그래볼걸 그랬나? “나, 김형태야.” 괜히 그러다가 다짜고짜 멱살이나 잡혔을까.

작가와 피디는 결국 무죄를 받았다.

 

 

비료 준다길래 보도연맹 가입했다가…

 

보도연맹은 1950년 한국전쟁 전후, 좌익으로 몰린 사람들 수만명이 군과 경찰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 재판도 없이 어느 이름 모를 산골짜기에서 총살당한 사건이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잘못된 사건이었다. 인혁당 사건은 그래도 재판하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보도연맹은 재판 등 요식행위도 없이 막무가내식으로 총으로 쏘고 때려 죽였다.

애초 이승만 정권은 1948년 12월 아직 헌법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국가보안법부터 만들어 이듬해 5월까지 무려 9만명을 체포하고 2만명을 재판에 부쳤다. 거센 반발이 일어나자 1949년 6월, 일제 사상탄압에 앞장섰던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을 본떠 보도연맹을 만들었다. 총재는 내무부 장관이, 고문은 국방부 장관 등이 맡았고 공안부검사, 대공 경찰이 운영을 했다. 회원 수가 30만명에 달했지만 해방 전 좌익 계열이었던 사람들 말고도, 인원수 채우려고 비료 준다고 꼬드겨 가입시키는 등 사상과 관계없는 이들도 수없이 많았다. 변호사, 문인, 우익 대한청년단원, 이장 등등.

<사하촌>, <모래톱 이야기>를 쓴 한국 리얼리즘 문학의 큰 산. 요산 김정한 선생님도 당시 보도연맹원으로 잡혀 총살당하기 직전 지인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살아나셨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총검술, 제식훈련을 받았고, 노역에도 동원되었고, 산악수색대 신분증을 발급받아 산을 헤매 다니며 좌익 아지트를 수색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6·25가 터지자 이승만 정권은 7월8일 계엄령을 선포한 후 미군방첩부대 CIC 주도하에 7, 8월 사이에 군인과 경찰이 예비검속을 하고,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여 전국적으로 수만명을 학살했다. 이와 동시에 형무소에 수감된 사상범들이나 부역 혐의자들도 재판 없이 총살했다.

좌익이건 아니건, 형무소 죄수건, 어떤 이유로도 군경 멋대로 처형할 수는 결코 없는 일이었다. 이 지경이 되면 국가가 존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2009년 2월, 울산보도연맹사건 민사1심 법원은 이렇게 확인했다.

“본질적으로 국가는 그 성립요소인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부담한다고 할 것이고 어떠한 경우에도 적법한 절차 없이 국민의 생명을 박탈할 수는 없다 할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관련 문건들을 대부분 파기해 버려서 정확한 전국적 피해 상황은 알 수가 없다.

나는 2008년 6월, 울산보도연맹 유족회들을 대리해서 민사 손해배상재판을 시작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수십개의 유족회가 만들어져 있지만 당시 울산 유족회는 제일 먼저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아주 단결이 잘된 모임이었다.

울산보도연맹의 경우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20~30명씩 매일 밤 불러내어 어디로 데리고 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유족들이 막연히 죽었을 거라 추측만 했을 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고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유족들은 문수산과 대덕산 일대를 수색하면서 집단 학살된 무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사건 후 처음으로 태화강변 백사장에 모인 100여명의 부인들은 “피학살자 명단을 밝혀라. 학살 장소와 주모자 명단을 밝히고 의법조치하라. 유족대책을 세우라”는 요구를 했다.

경찰은 그때는 물론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죽은 사람들 명단은 3급 비밀이라며 이번 재판에서도 끝까지 내놓지 않았다. 그러고는 거꾸로 원고들 가족들이 그때 죽었는지, 월북했는지 어찌 아느냐고 흰소리를 해 댔다.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국가’는 변한 게 없다.

그때는 전쟁통이라 그랬다 치고, 2008년까지도 처형자 명단을 비밀이라며 안 내어놓는 건 도대체 국가 구성원 누구의 뜻인가. 대통령? 소송을 맡은 법무부 장관? 경찰? 변호사?

 

 

가족 억울함 호소하고 다닌다고 사형!

 

1960년 6월로 돌아가서, 결국은 6·25 당시 보도연맹원들을 실어 날랐던 운전수의 안내로 학살현장이 밝혀졌다. 유족들은 대운산 골짜기에서 구덩이 17개를, 반정고개에서 6개를 발견해서 825개의 두개골을 발굴했다. 그들을 묶어 끌고갔던 철사줄, 금이빨, 도장, 처녀의 머리채 등도….

누가 누구의 아버지요, 할아버지인고. 여기도 ‘백조일손’이었다. 아아, 슬플 손. 여기도 저기도 백조일손이로세.

나는 울산유족회에도 황해도 신천의 백조일손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도 함월산 백양사 앞에 그 수북한 유골들을 합장했다.

1961년 5·16 이후 박정희 정권은 울산 보도연맹 피학살자 합동묘와 추모비도 해체해 버렸다. 그리고 특수범죄처벌법을 만들어 법 제정 이전 유족들의 행위를 소급해서 처벌했다. 조상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 달라는 호소가 죄가 된다는 거였다. “‘빨갱이’ 유골을 발굴해서 이적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했다.”

대구, 밀양과 거창, 부산, 마산, 제주도 백조일손 유족회 대표 등 28명이 잡혀가 혁명재판에 회부되었다. 선고 형량은 사형 1명, 징역 15년 3명, 10년 4명, 7년 2명, 집행유예 3명.

세상에, 가족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하고 다닌 게 사형이라고? 그는 대구의 부유한 집안 출신 의사였는데 6·25가 터지자 예비검속을 피해 숨어 있었다. 그를 대신해서 처가 잡혀가 학살당했다. 4·19 이후 경북 유족회장을 맡아 처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려고 돌아다니다 박정희 정권에 붙잡혀 유족회 활동을 한 ‘죄’로 이번에는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10년 감옥살이하다 풀려나서 6년 뒤인 1978년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그 아들이 아버지 재심을 신청했고 2011년 대법원은 유족회 활동은 이적행위가 아니라며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5·16 혁명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총무처 장관, 감사원장을 지낸 이석제는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5·16 후 박정희의 사상 문제가 불거지자 보도연맹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반공에 대한 의지를 미국에 보여주려 했다.’

박 정권은 특수범죄처벌법을 이용해 보도연맹 신원활동뿐 아니라 4·19 이후 활발해진 혁신정당, 노동조합, 학생운동 활동가들을 무려 4000여명이나 검거해서 쿠데타 정권의 안정을 꾀했다.

이렇게 해서 백조일손들은 다시 가시밭길을 걷게 되었다.

 

<다음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