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관련

미국에 순종하던 일본도 ISD에는 ‘NO’

道雨 2013. 3. 1. 10:54

 

 

 

     미국에 순종하던 일본도 ISD에는 ‘NO’

 

일본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투자자-국가 소송제(ISD)를 거부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국가의 주권을 손상시키는 이 제도에 합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ISD는 미국이 구상하는 TPP의 핵심이다.

 

 

일본도 미국에 대들 줄 아는 나라였다!

일본 정부와 여당(자민당)은, 미국 주도의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투자자-국가 소송제(ISD)를 사실상 거부하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ISD 제도에서는, 외국인 투자자가 피투자국의 공공정책 때문에 재산상 손실을 입었다고 느끼면 해당국 정부를 국제중재기구(ICSID)에 제소해서 막대한 손해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다. 이로 인해 피투자국 정부는 투자자 눈치 보느라 자국 국민에게 이로운 공공정책을 시행할 수 없는 등 국가 주권이 훼손될 여지가 있다. ISD가 한·미 FTA에서 대표적 독소조항으로 꼽힌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ISD는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협정에서 ‘(외국인) 투자자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어김없이 포함되는 장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일본 정부는 미·일 협력이라는 명분하에 사실상 미국이 시키는 대로 자국통화(엔화) 가치나 금리, 금융 및 서민보호 제도까지 수동적으로 바꿔왔다. 심지어 일본 재정지출에서 가장 중요한 재원인 우정국의 지휘권까지 사실상 미국에 넘기려 했다. 이런 나라가 드디어 미국의 ISD에 감히 “노(No)!”라고 답한 것이다.

   
ⓒ시사IN 조남진
2012년 11월26일 한·미 FTA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ISD 폐기를 요구하며 108배를 하고 있다.

미, 한·미 FTA보다 강력한 ISD 원해

2월14일 무소속 박주선 의원은 ‘(일본) 자민당의 TPP 교섭 참가 판단기준’(‘판단기준’)이라는 짤막한 번역 문건을 보도 자료로 배포했다. 내용은, 자민당이 TPP 교섭에 나서는 일본 정부에게 제시한 여섯 가지 ‘선결 조건’이다. 그중 하나가 “국가의 주권을 손상시키는 ISD 조항에는 합의하지 않는다”이다.

ISD는 투자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공공정책 수행을 견제하는 제도로, 따라서 ‘국가의 주권을 손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자민당의 ‘판단기준’은, 일본 정부에 ‘ISD를 감수하면서 TPP에 들어갈 생각은 마라’고 촉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Reuter=Newsis
2월12일 인터뷰하는 아베 일본 총리. 미국에 순종하던 일본이 최근 ‘노’를 외친다.

그런데 문제는 이 ISD가 TPP의 여러 장치 중 ‘단지 하나’가 아니라 핵심 제도라는 점이다. TPP는 태평양을 둥글게 에워싼 ‘환(環)태평양 국가들’(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싱가포르, 브루나이, 베트남, 말레이시아, 일본, 칠레, 페루)이 공동 창설하기로 한 자유무역지대로, 각 국가는 오는 10월의 에이펙(APEC) 정상회담 이전까지 TPP 협정의 기본 틀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 TPP를 주도하는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TPP에서 ‘자유무역 원칙’ 및 ‘투자자 보호’(이 중 하나가 ISD)를 강화해서 21세기형 ‘글로벌 스탠더드’를 확립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그래서 미국이 구상한 TPP에서는 강화된 자유무역 원칙에 걸맞게 ‘모든 분야에서 예외 없는 관세 철폐’가 강조된다.

그런데 각국이 관세만 철폐한다고 자유무역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정부가 농민들에게 농업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면, 해당 국가의 농산물은 국제시장에서 불공정한 경쟁우위를 누리게 된다. 그렇다면 TPP 같은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의 세계에서는 국가 간 자유무역을 위해 농업보호 같은 국내 정책은 포기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은 특히 ‘서비스 부문’에서 두드러진다. 예컨대 일본에 공적인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다면, 해외의 민간 보험사가 이 나라에 진출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해외 보험사의 국내시장 진출을 위해(=공정한 경쟁을 위해) 기존 금융 및 복지 제도를 수정하거나 폐기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각 나라의 국내용 산업·금융·복지 제도야말로 자칫 민간 투자자들의 자유로운 수익 추구를 방해하고, 심지어 이런 수익을 빼앗는(혹은 빼앗을 것으로 예상되는) 원인일 수도 있다. ISD는 이 같은 국가 차원의 공공적 ‘전횡’을 차단해서 국제적 자유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기초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TPP를 통해 한·미 FTA의 ISD보다 한층 강력한 ‘투자자 보호’ 제도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미국의 염원을, 그동안 지나칠 정도로 순종적이었던 일본, 그것도 자민당이 가차 없이 배신한 것이다.

“ISD가 독소조항이라는 것 명백해져”

자민당의 ‘판단기준’ 중 ISD 이외의 ‘선결 조건’들도, 미국이 선호하는 TPP와는 많이 어긋나리라 보인다. 자민당은 먼저 “‘성역 없는 관세 철폐’를 전제로 하는 교섭 참가에 반대한다”라고 천명했다. 쌀 등 농산물에 대한 수입 자유화를 억제하고 농민보호 정책을 유지하라는 압박이다.

이와 함께 “먹을거리의 안전·안심 기준을 수호한다”도 선결 조건이다. 예컨대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기준이나 검역을 느슨하게 해서 일본의 식품 안전성을 해치느니 TPP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의미다. 한편 ‘판단기준’은, 미국을 겨냥해서 “공업제품의 수치 목표는 수용할 수 없다”라고 못 박았다. 미국의 대일 무역정책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반영한다. 그동안 미국은 엄청난 규모의 ‘대일 무역수지 적자’를 ‘일본의 잘못된 사회·경제 시스템’ 탓으로 몰아왔다. 그러면서 일본의 국내 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한편 예컨대 ‘어느 시기까지 일본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산 제품의 점유율이 20%에 이르러야 한다’는 ‘수치 목표’를 내걸고 압력을 가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밖에도 ‘판단기준’은 “국민 개(皆)보험제도를 방어한다”라고 명시했다. ‘국민 개보험’이란, 일본 국민이라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공적 사회보험이므로, 이는 곧 미국의 보험회사가 일본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벌이게 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의 공적 보험제도를 후퇴시키지 않겠다는 뜻이다. “정부 조달, 금융 서비스 등에서는 일본의 특성을 살린다”라는 조항은, 일본 고유의 ‘재정 조달·지출 시스템’(초저금리 국채로 자금을 조달해 공공사업에 투입)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시사한 것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외교통상위원장인 송기호 변호사는, 자민당의 ‘판단기준’을 환영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 역시 ISD를 반대했다고 강조했다.

협상국 중 미국 다음으로 경제규모가 큰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가 ISD를 반대한다면, TPP의 성격 역시 변화될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도 일본 정부와 공조해서 한·미 FTA의 ISD 재협상을 준비해나갈 필요가 있다.”

보도 자료를 낸 박주선 의원은 “ISD 제도가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라 ‘독소조항’이라는 것이 일본 정부의 TPP 참가 기준을 통해 더욱 명백해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FTA) 발효 후 90일 이내에 ISD 문제를 재협상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11월 론스타로부터 수십억 달러 규모의 첫 ISD 제소를 당한 상태다. 외환은행 인수로 막대한 수익을 거둔 론스타는 한국 정부가 매각 승인을 늦추는 바람에 큰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이종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