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어떤 영웅 이야기

道雨 2015. 1. 6. 15:07

 

 

                 어떤 영웅 이야기

 

 

 

해당 분야를 넘어 문외한에게 알려질 정도로 압도적인 업적을 남겼을 경우, 그를 “전설” 혹은 “신화”라 부른다.

 

미국의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이 그런 사내였다.

어지간한 선수는 출전조차 어려운 세계 3대 도로 일주 사이클 대회, 그 정점에 있는 투르 드 프랑스에서 그는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일곱 차례 연속으로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100년 넘은 대회 역사에서도 7연패는 암스트롱이 처음이었다.

더 놀라운 건 고환암으로 생사의 기로에 놓였다가 복귀해 이룬 성과라는 점이다.

 

한해 한해 암스트롱은 기적을 써내려갔다. 사이클계뿐 아니라 수많은 지구인이 그 경이로운 드라마를 숨죽여 지켜봤다. 미국에서의 인기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유럽의 스포츠’라 해도 과언이 아닌 도로 사이클에서, 쟁쟁한 유럽 출신 스타들을 제치고 우승을 거듭하는 랜스 암스트롱은 완벽한 아메리칸 히어로였다.

사이클 팬덤의 주도권도 점차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왔고, 암스트롱이 타던 미국산 브랜드 트렉 자전거는 어마어마한 성장을 거듭했다. 본인이 돈방석에 앉은 건 물론이다. <포브스> 인터넷판에 따르면, 암스트롱은 2005년 세계 스포츠 스타 수입 9위였다.

마침내 투르 드 프랑스 7연패를 달성하자, 랜스 암스트롱은 ‘농구의 마이클 조던’처럼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암스트롱이 ‘사이클 황제’로 등극한 뒤 한참이 흐른 2012년, 충격적인 뉴스가 발표됐다. 그가 도핑으로 고발됐다는 소식이었다. 미국반도핑기구(USADA)는 수천쪽 분량의 정밀한 조사를 통해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을 확보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암스트롱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도핑 방법을 용의주도하게 실행했다. 많은 동료들을 공범으로 끌어들였으며 때로 협박까지 했다. 한마디로 죄질이 나빴다.

거짓말을 일삼으며 버티던 그는 결국 도핑 사실을 인정한다.

 

투르 드 프랑스 7연패를 포함해 1998년 8월1일 이후 암스트롱의 모든 사이클 대회 성적이 취소되었다. 사이클 선수 자격 또한 영구 박탈되었다. 영웅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사실 암스트롱이 암 투병에서 복귀한 1999년에 이미, 수상쩍은 정황이 포착되었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 상당수가 즉각 위화감을 느꼈을 정도로 그의 주행은 지나치게 빨랐다.

사이클계에는 도핑이 만연해 있었고 유망한 젊은 선수가 돌연사하는 사고가 점점 늘어나던 시기다. 결정적으로 약물검사에서 양성반응이 나왔다.

그럼에도 그는 제대로 조사받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당시 팀 마사지사 에마 오라일리의 증언에 따르면, 약물 양성반응이 나오자 팀 스태프들은 ‘우리편 의사’로부터 진단서를 받아 연맹에 제출하기로 결정한다. 극심한 안장통 치료를 위해 예전부터 약물을 복용해야 했다는 소견이었다.

누가 봐도 허술하고 미심쩍은 해명이었다. 하지만 놀랍도록 신속하게 받아들여졌다.

 

암스트롱은 돈과 명예를 원했고, 연맹과 업계는 슈퍼스타의 추락을 원하지 않았으며, 팬들은 영웅서사에 목말라 있었다. 미필적 고의, 암묵적 방조, 뭐라 부르든 그것은 일종의 집단적 자기기만이었다. 그 뒤 벌어진 일은 우리가 아는 대로다.

 

거짓말쟁이는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랜스 암스트롱이라는 현상’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건 영웅을 갈망하는 걸 넘어, 영웅을 발명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거대한 신기루다.

 

<뉴욕 타임스> 기자이자 <거짓의 사이클>(Cycle of Lies)의 저자 줄리엣 머쿠어는 랜스 암스트롱에 관한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암을 극복하고 돌아왔다는 스토리, 바로 그것이 랜스 암스트롱이 실제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에 눈감게 만들었다.”

 

박권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