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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몽연(夢緣)일세 : 추사-초의, 퇴계-고봉, 신영복-설악무산

道雨 2016. 4. 13. 10:51

 

 

 

 

오호라, 몽연(夢緣)일세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

 

 

 

추사는 당대의 시서화 3절, 그러나 초의만 생각하면 철부지로 돌아갔다. 저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초의는 불립문자의 불제자인지라, 답장도 인색했고 감정도 안 드러냈다. 그런 초의도 추사의 유배 앞에서는 무너져 내리는 억자을 감추지 못했다. ‘안개비에 봄마저 떠나가고…’.

 

 

퇴계는 고봉과 봉은사에서 이별한 이듬해 별세했다. 고봉은 2년 뒤 성균관대사성 등을 지내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 도중 고부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몽영의 말처럼 고봉에게 퇴계는 절벽을 얻은 계류였고, 퇴계에게 고봉은 태양에 걸린 구름이었다.

 

 

추사는 1840년 9월2일 한양에서 제주도로 유배 길에 나서 20일 해남에 도착했다. 일지암에서 초의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완도 이포로 떠났다.

이포까지 배웅한 초의가 일지암으로 돌아왔을 때는, 추사가 떠난 뱃길과 하늘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당에는 엊그제 핀 자미화가 후두둑 떨어져 있었다.

 

“오늘 아침 안개비 따라 봄마저 가버리고/ 그대가 떠나간 석양 하늘을 바라보네/ 꽃을 떨군 줄기는 앙상하여 초췌한데/ 줄기에서 떨어진 꽃은 태연히 잠들었네.”

 

소치 허련은 초의에게서 서화의 틀을 익히고, 추사에게서 서화의 도를 배웠다. 그는 내로라하는 도화서 화공을 제치고 현종의 어진을 그렸다.

왕은 그를 불러 물었다.

“추사와 초의선사의 관계가 각별하다는데 어떤 사인가.”

몽연(夢緣)이었지요.”

소치는 훗날 저의 자서전 제목을 ‘몽연록’이라 했다.

 

“편지를 보냈지만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산중에 바쁜 일은 없을 것 같은데 혹시 나 같은 세속의 사람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보구려. 나는 이처럼 간절한데 그대는 묵묵부답인 걸 보니 절교를 하자는 것입니까. 이것이 과연 스님으로 맞는 행동입니까?”

 

추사는 당대의 시서화 3절. 그러나 초의만 생각하면 철부지로 돌아갔다. 감정을 쏟아냈다.

그러나 초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불제자인지라, 답장도 인색했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초의도 추사의 유배를 보면서 무너져 내리는 억장을 감출 수 없었다.

‘안개비에 봄마저 떠나가고…’.

 

초의는 편지 대신 때마다 가장 좋은 차를 골라 추사에게 보냈다. 추사는 그 차를 마시며 초의를 그리워했다.

 

 

“정좌처다반향초 묘용시수류화개”(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고요히 앉아 차를 반쯤이나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 그대로네. 주인은 선정에 빠져들고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효당 최범술) “스님은 멋대로 마냥 웃고 있으소, 걸림돌 없는 곳이 바로 우리 사는 데라오. … 한 침상에서 다른 꿈 없는 것이 좋기만 하고, 같은 음식 먹었으니 어찌 창주가 다를까.”

 

 

뱃속마저 다르지 않다는 게 추사가 본 둘의 우정이었다.

 

1856년 추사는 일흔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초의는 제문에 처음으로 비탄을 담는다.

 

 

“슬프다, 선생이시여. 42년의 깊은 우정을 잊지 말고 저세상에서는 오랫동안 인연을 맺읍시다. … (생전) 정담을 나눌 제면 그대는 실로 봄바람이나 따스한 햇볕 같았지요. … 슬픈 소식을 들으면 그대는 눈물을 뿌려 옷깃을 적시곤 했지요. 그대 모습 지금도 거울처럼 또렷하여 그대 잃은 나의 슬픔 헤아릴 수 없습니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작고하기 전해 이조판서에 임명되지만, 칭병을 이유로 간곡히 고사해 겨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

1569년 3월4일 한양을 떠나 그날 밤 동호의 몽뢰정(옥수동)에서 보냈다. 이튿날 한강을 건너 봉은사에 묵었다.

수행자 중엔 고봉 기대승(1527~1572)이 있었다. 고봉은 퇴계가 배편으로 남한강을 거슬러 떠나는 것을 보고 돌아와, 3월15일 편지를 썼다. 달포여 만에 편지를 받아든 퇴계는 4월2일 답장을 보냈다.

 

“강 위의 이별은 꿈결처럼 아득했습니다. 양근에서 돌아온 김별좌에게서 길 떠나시던 모습을 들으니, 슬프고 그리운 마음 갑절이나 더했습니다. 그리는 마음 말로 다하기 어렵습니다. … 앞으로 가까이 모시지 못하게 되었음을 생각할 적마다 마음이 절로 슬퍼집니다.”

 

“동호의 배 위에서 나누었던 정이 꿈결 속에 되살아나니, 봉은사까지 따라와 묵은 하룻밤의 뜻이 더욱 깊어집니다. 서로 취해 말없이 바라보며 천리의 이별을 다 이루었습니다. 손수 쓰신 편지와 시 한 편을 받으니 마치 다시 얼굴을 대하는 듯하여 참으로 위로되고 다행스러움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앞으로는 만날 날이 아득하여 기약이 없으니….”

 

퇴계와 고봉의 가연 또한 추사와 초의의 몽연 못지않았다. 두 사람이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명종 13년(1558년) 10월. 문과에 급제한 신진 학자 고봉은 오늘날 국립대 총장인 성균관대사성 퇴계를 찾아갔다.

그해 12월 퇴계는 고봉에게 첫 편지를 보냈고, 이후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1570년 12월, 퇴계가 세상을 뜨기까지 13년 동안 계속됐다. 특히 1559년부터 1566년까지 편지로 이어진 사단칠정 논쟁은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 최고의 관심사였다.

 

퇴계는 첫 만남에서 고봉의 그릇을 알아봤다. 첫 만남 직후 그는 고봉에게 편지를 보냈다.

 

 

“기 선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병든 몸이라 문밖을 나가지 못하다가, 덕분에 어제는 마침내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 내일 남쪽으로 가신다니 추위와 먼 길에 먼저 몸조심하십시오.”

 

고봉을 대하는 퇴계의 자세는 지극히 정중했다.

 

 

편지글은 언제나 “황이 두 번 머리 숙여 절합니다”로 시작하거나 “병든 늙은이, 진성의 이황은 눈이 어두워 함부로 적었으니 송구합니다” 혹은 “이황이 삼가 말씀드렸습니다”로 맺었다.

26살 차이이자, 당대 최고의 석학이라고 저의 주장을 강요하는 일이 없었다. “그대의 논박을 듣고 제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쳐 보았는데… 이처럼 하면 괜찮을는지요.”

 

 

얼마나 저를 낮추었는지 고봉은 하소연했다.

“저에 대한 예우가 너무 무거워 소생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헤아려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퇴계는 고봉과 봉은사에서 이별한 이듬해 별세했다. 고봉은 2년 뒤 성균관대사성 등을 지내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 도중 전북 고부에서 세상을 떠났다.

‘계류가 절벽에 걸리면 폭포가 되고, 구름이 해에 걸리면 채운이 되나니~.’

유몽영의 말처럼 고봉에게 퇴계는 절벽을 얻은 계류였고, 퇴계에게 고봉은 태양에 걸린 구름이었다.

 

육필 편지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빛의 속도로 전달되는 전자우편이 있는데, 도착에 사나흘 걸리고, 쓰고 지우고 다시 쓰다 보면 하룻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인 편지를 누가 주고받을까.

그러다 보니 영혼의 떨림이 편지로 전달되는 일은 사라졌다. 하지만 예외도 있는 법.

 

스님, 그간 소식 올리지 못했습니다. 결제 중이신 줄 모르고 출판사를 통해 책을 우송했습니다. 안거에 방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특히 불편한 것은 척추신경에 장애가 와서 운신이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런대로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스님께서 권고하신 매일매일의 집필은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지금쯤 얼음 시내에도 물소리 들으시겠지요.”

 

“근계, 안거라는 이름으로 산짐승처럼 동면에 들기 위해 백담사 무문관에 있습니다. 그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강의> 두 권의 저서를 받았습니다. ‘국어사전 290쪽’은 세 번 읽었습니다. 들겅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참 오랜만에 들었습니다. 신영복의 백랑도천 같은 분노요 통곡이요 어깨울음이었습니다.”

 

서울 성북동엔 흥천사가 있다. 절집 언덕 위에 삼각선원이 있고, 입구엔 낯익은 글꼴의 ‘손잡고오르는 집’ 현판이 걸려 있다. 신영복의 이른바 백성 ‘민(民)체’다.

흥천사 조실 설악무산 스님은 집을 짓고는, 선어록의 한 귀퉁이에 있는 ‘파수상 동행’을 택호로 삼고, 우리말로 써줄 이를 찾다가 신영복과 인연이 맺어졌다. 2013년 7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연은 짧았다. 신영복의 몸엔 이미 악성종양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몇 차례의 만남과 너덧 차례 전자편지 오간 게 전부였다. 그러나 무량겁 인연이 있었던지 곧 지음(知音)을 이뤘다. 스님의 마지막 전자편지는 이렇게 맺었다.

 

 

“…노골이 신영복 선생이 체험한 그 일기일경을 다 사량하고 어떻게 증득할까마는 <강의>를 들으면서 사색하면 올겨울은 동면에 들기 전 해동을 맞을 것 같습니다. 입원하셨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퇴원하셨다는 소식은 못 들었습니다. 설악무산 합장.”

 

신영복 선생은 1월16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음은 아마도 들겅 밑을 흐르는 물소리가 스님에게 전했을 것이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