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제와 세조, ‘정난(靖難)’이라는 이름의 찬탈극
혈통세습의 문제를 생각해 본다
14세기 말 건국한 명과 조선은 창업과 수성의 과정에 격변이 잇따랐다.
명이 건국한 것은 1368년이고, 이로부터 24년 후인 1392년에 조선이 건국했다.
지난번 나는 당 태종 이세민과 조선 태종 이방원을 비교해 보았는데, 이 글에서는 명의 3대 황제 영락제와 조선의 7대 국왕 세조를 비교해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두 군주가 권력을 쟁취한 방식에 공통점이 있으며, 이것은 ‘세습’이라는 왕조시대의 권력 승계 문제에 대해 사색해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락제는 명을 건국한 홍무제(주원장)의 4남이다. 창업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서 건국에 기여한 바는 없다.
홍무제는 생전에 후계자로 지목한 장남 의문태자가 죽는 바람에 아들의 장남, 즉 장손자를 후계자로 삼았다. 황권의 정통성을 위해 적장자 승계의 원칙을 고수한 것이다. 결과 즉위한 황제가 2대 건문제였다.
홍무제는 역시 황권의 안정을 위해 아들과 다른 손자들을 변방의 번왕으로 책봉해 내보냈다. 이에 따라 영락제도 북평(북경)의 번왕이 되었다. 그는 출중한 통치술을 발휘해 중앙정부 못지않은 힘을 가지게 되었다. 부담을 느낀 건무제는 숙부인 번왕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 강성해진 영락제는 ‘정난’(靖難, 나라가 처한 병란이나 위태로운 재난을 평정함)을 표방하며 아예 황실이 있는 수도 남경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황제 주변의 간신배들을 척결하여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해서 거병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남경을 함락시킨 영락제는 조카 건무제를 축출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건무제는 행방불명) 이후 그는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반대파를 제거했다.
‘정난’이라고 하면 우리의 귀에 익은 말이다. 바로 세종의 2남 세조(수양대군)가 일으킨 1453년의 계유정난이 그것이다.
세종이 죽고, 권력을 승계한 장자 문종마저 2년 만에 즉자, 역시 장자 승계의 원칙에 따라 12세의 단종이 왕위를 이은 것도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문종은 김종서 등의 대신들에게 단종을 잘 보위해 달라는 유지를 남겼다.
이후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스스로 왕이 되고 끝내는 어린 단종마저 죽였다는 사실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세조는 조선왕조 유일의 찬탈 군주가 되었다. 세조 역시 영락제처럼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했다.
인구에 회자되는 사육신과 생육신 이야기가 오늘까지 생생하게 전한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도 하는 것가
아무리 푸새엣 것인들 그 뉘 땅에 났나니
* 채미 : 고사리를 캠. * 이제 : 백이와 숙제
이것은 사육신의 필두 성삼문이 남긴 시조이다.
첫 단어 ‘수양산’에는 중의적 뜻이 들어 있다. 백이와 숙제가 지조를 지키기 위해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죽은 산 이름이 수양산이다. 다음으로 수양산은 세조, 즉 수양대군을 풍유하기도 한다.
조선 충신의 상징적 인물인 성삼문은 중국 충신의 상징적 인물 백이와 숙제더러 구차하게 고사리는 왜 캐먹었느냐고 힐난한 것이다. 이는 극단적인 지조정신의 표출이다.
공자가 흠모했다는 주나라의 주공은 영락제, 세조와는 대조되는 성인이다. 그는 힘이 약한 조카 성왕을 보위하여 나라를 안정시키면서 나아가 애민정치를 구현했다.
이전에 중국에는 요와 순과 우 임금이 있었다. 요는 순에게, 순은 우에게 권력을 양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혈통 세습이 아니었다. 혈통과 무관하게 덕과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권좌를 선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시대는 지극히 평화로운 이상적 세월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권력 승계가 요순시대와 비슷하다. 모택동에서 화국봉, 등소평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후 장쩌민 - 후진타오 - 시진핑으로 이어진 권력 승계는 선양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명나라 홍무제나 조선의 문종이 조선의 태종처럼 장자가 아닌 능력 있는 아들이나 형제에게 양위했더라면 분명히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개별적인 경우를 일반화해서 말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혈통세습은 언젠가는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나의 친애하는 또 다른 조국 조선도, 아직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과 대한민국 대통령들
자격 잃은 군주들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조선시대 왕에게는 ‘종(宗)’ 또는 ‘조(祖)’라는 묘호가 붙여졌다. 임금이 돌아가면 종묘에서 제사를 드리는데, 그 종묘에 봉안된 위패를 부르는 이름이 곧 묘호다. 당연히 ‘세종’이니 ‘정종’이니 하는 이름 등은 재위 기간에는 쓰지 않았던 호칭이다.
한편 왕자에게는 ‘군(君)’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 왕의 적처 즉 왕비에게서 난 왕자는 ‘대군’이었고 빈(嬪)에게서 난 왕자는 ‘군’을 붙여 불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임금에게 ‘종’이나 ‘조’가 아닌 ‘군’이 붙은 경우가 있었는데, 노산군과 연산군과 광해군이 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폐위된 임금이라는 것이다.
결국 임금에서 폐위되면 곧장 ‘군’으로 격하되었다는 것인데, 그것도 왜 ‘대군’이 아닌 ‘군’이었을까?
말대로 하면 임금이 폐위되면 곧장 ‘서자 왕자’가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비논리적이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조선의 힘>>(오항녕 지음, 역사비평사)을 읽으면 이 의문이 해소된다. 폐왕에게 묘호를 올리지 않고 폄칭해서 ‘~ 군’이라고 한 것은, 그들을 ‘서자 왕자’로 격하시킨 것이 아니라 다른 뜻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자의 <<자치통감강목>> 범례에는, 왕을 참칭한 경우 그저 ‘아무개 군’이라는 식으로 기록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폐위된 왕은 ‘왕 같지도 않은 왕’이요, 나아가 ‘왕을 참칭한 경우’와 크게 다를 바 없으므로, 그저 ‘~ 군’이라고 하여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으로 격하해 불렀다는 것이다(이 중 노산군은 숙종 대에 이르러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주지하듯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는 전직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이 있으며, 현직 박근혜를 추가해서 무려 11명이나 된다.
그런데 이 중에서 ‘대통령 같지도 않은 대통령’은 누구일까?
내 생각으로는 불행히도 과반 이상이 ‘대통령 같지도 않은 대통령’에 해당된다. 그래서 접근 방법을 달리해 차라리 ‘대통령다운 대통령은 누구일까’로 물으면 어떨까? ‘대통령다운 대통령’은 두 명 혹은 많아야 세 명이다.
<<조선의 힘>>의 저자 생각도 나와 다르지 않다. 사상사가 전공인 저자 오항녕은 '대통령 같지도 않은 대통령'으로 먼저 전두환과 노태우를 들고 있다. 두 사람은 대통령직을 얻을 때 군사반란이라는 불법을 저질렀고, 임기 중에도 불법을 저질러 퇴임 후 유배되기도 하고 법정에 서기도 하여 최고형을 받았으니, ‘대통령을 참칭한 자’ 또는 ‘폐위된 대통령’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공식 직함을 뭐라고 해야 할까?
폐왕을 ‘~ 군’이라고 격하해 불렀던 조선시대에 견주어 볼 때, 그들에게 ‘전(前)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주는 것은 부당하지 않겠는가?
전두환과 노태우는 조선시대로 치면 폐위된 왕이나 진배없는 위인들이다. 게다가 그들은 재산을 은닉한 채 추징금마저 미납함으로써 최소한의 속죄조차도 거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그들에게 ‘전(前) 대통령’이라는 공식 직함을 줄 수 없지 않은가?
평범하게 ‘씨’를 붙이는 것은 불공정하다. 왜냐하면 ‘씨’는 건강한 보통 국민들에게 통용되는 범칭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힘>>의 저자는 고심 끝에 대통령 직함을 강등시켜서, 한 사람에게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다른 한 사람에게는 ‘9사단장’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자고 제안한다. 그래서 ‘전두환 전 합수부장’, ‘노태우 전 9사단장’으로 부르자는 것이다.
저자는 같은 이치로 ‘박정희 전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라는 호칭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나는 아예 현대적 감각으로 이름을 곧장 불러 전두환에게는 ‘두환군’ 노태우에게는 ‘태우군’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순식간에 변하는 법이다.
장차 이명박과 박근혜의 호칭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